경부선 열차를 타고 사상역을 지날 때면 55년 전이 생각나 속웃음을 짓는다. 부산진역을 지나 구포역 가까이에 있는 이 작은 역에는 그때도 여객열차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런대도 그곳에서 서울까지 열차를 타고 다녔었다. 저녁 때 부산진역에서 상경하는 일반승객들과 군인들을 잔득 태운 십이 열차가 외지고 커브가 진 사상역을 지날 때는 멀리서부터 기적을 울리며 천천히 갔다.
논산에서 전반기 훈련을 마치고 부산 수영에서 10주간의 차량운전교육을 받을 때였다. 한 달이 지나면서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일요일 저녁 점호 시까지 외출이 허용되었다. 발급 받은 외출증으로는 부산시내을 벗어 날 수가 없었지만 서울 출신 몇 명이 작당을 해 사상역으로 달려가 철길 옆에 숨는다. 십이 열차가 숨이 찬 듯 커브를 천천히 돌때 벼락같이 뛰어가 달라붙는 것이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서부영화에서 열차를 습격하려는 갱단들처럼 이었다. 하지만 군복에 교육생 마크가 선명하게 붙어있는 이등병이라서 열차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교육생의 신분으로는 철도 이동수송관이나 헌병들에게 붙잡히면 아예 무시와 곤욕을 당했고 있는 것으로 요령을 잘 부려야 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들 통했지만 어쨌든 붙잡히면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12시간 이상 그들의 눈을 피하고 속이는 게 상수였다.
민간 열차를 타려고도 했지만 헌병들의 순찰과 감시가 심해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그해의 겨울이었다. 역시 같은 요령으로 십이 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영등포역 들어섰다. 눈치 것 뒤쪽으로 뛰어내려 철조망 사이로 빠져 나가 동대문으로 가는 첫 전차를 타고 다시 돈암동으로 가 삼양동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께서는 군대를 도망쳐 나오지 않았나 하고 의심을 하는 표정이었다. 교육 수료를 앞두고 준비할 것과 부대 배치를 잘 받으려면 절대로 필요한 것이 있었다. 일단 사정을 잘 말씀드리고 용돈을 두둑이 챙긴 다음 곧바로 집을 나섰다.
부산으로 내려 갈 때는 각자가 알아서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군용열차는 그때도 용산에서 출발했다. 입장권으로 용산역에 내려가 숨어 있다가 휴가병들이 열차를 타려고 몰려나올 때 살짝 섞여서 열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상의와 모자를 벗어 선반에 올려놓고서는 느긋하게 자는 척하고 있는다. 이동수송관이나 헌병이 종종 지나다녔지만 차내가 워낙 복잡했고 상황을 살펴 위험하다싶으면 용변을 보러가는 척하고 일어나 미리 피해 있었다.
대전역에 도착해 호남선열차를 기다릴 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 시 간이 넘게 기다리다 옆자리 병사와 시비가 붙어 치고 박고하다가 내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쫒아오는 헌병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상의만 챙겨 들고 급히 객차의 유리창을 깨 부시고 뛰쳐나갔다. 1960년 12월 중순, 밖은 캄캄하고 살을 애일 듯이 추웠다. 열차가 서있는 선로 바닥에 엎드려 동정을 살피다가 열차가 움직이려는 순간에 빠져나가 기관차 뒤에 붙어있는 아무도 없는 석탄 간에 올라탔다. 엎드린 채로 내려가면서 터널을 통과 할 때마다 유연탄가스를 마셔야 했다.
이른 아침 부산진역에 도착했을 때 뛰어 내리려다 어지러워 두 번이나 쓰러졌다. 내 생애의 마지막 십대였는데 이대로 잘 못 되서는 않겠다 싶어 기를 쓰고 3부두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서 세수를 하고 모자를 사 쓰려고 군장품 가게를 찾다가 저승사자 같은 순찰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자도 없이 새까맣게 된 몰골을 보고 조롱하면서 밤새 도둑질을 한 놈일 게라고 윽박질렀다. 아니라고 변명을 했지만 몸수색을 해 집에서 가져온 상당한 용돈과 조교들에게 바칠 양담배까지 몽땅 빼앗고 겨우 모자 살돈만 주면서 빨리 가라고 엉덩이를 찼다.
그 후에 나는 카투사가 되어 왜관과 대구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주말이면 당시의 특급 통일호에 연결된 미군열차를 타고 사상역을 지나 부산까지 외출을 다니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곤 했다. 그 때 군인들을 태운 십이 열차는 막연하나마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과 피난살이를 접고 서울로 향하는 이들의 애환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저녁때 출발하여 12시간 이상을 달리면서 추풍령 고개를 헐떡이며 넘고 대전역에서는 호남선으로 올라오는 군인들과 같은 형편의 승객들을 기다려 태우느라 1시간이상을 지체하는 게 보통이었다.
요즘 무궁화호는 넓고 쾌적한 분위기에 식사를 하고 과자류와 음료수를 골라 사 마실 수 있는 카페 간이 별도로 있다. 거기에는 자동으로 안마도 하고 노래도 불을 수 있는 미니 룸까지 설치되어 있어 이전 세대를 겪은 나에게는 격세지감이다. 그렇지만 열차 내에서 이동판매원이 오징어 땅콩을 왜치며 막소주를 팔고, 한겨울 대구역에 도착해 실로 열 개씩 묶은 국광사과를 사서 아삭아삭 깨물어 먹었던 시절이 더없이 그립다. 그렇게 열차를 타고 다녔던 추억 때문에 나는 많이 바쁘지 않으면 그 시절의 십이 열차 격인 무궁화호를 타고 다닌다.
영동역은 서울과 부산의 한 중간으로 김밥장수들이 되돌아가는 경계선이었다. 휴가 가는 기분에 들뜬 병사들이 오징어 발을 뜯으면서 막소주를 몇 병씩 마시고 나면 소란해 질 때가 있었다. 조용히 하라느니 못하겠다느니 티격태격하다가 같은 부대원들까지 합세하여 패싸움이 벌어진 경우에는 헌병이 출동하고 발차시간이 늦어지기도 했다. 지나간 열차문화는 열악한 사정 때문에 썩 좋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속도와 편리함에 치우쳐 사는 요즘보다는 훈훈했었다. 그래서 내게 무궁화호는 느긋하게 여행하기엔 딱 좋은 이 시대의 십이 열차가 됐다. 201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