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5. 12. 01
■ 병인양요, 아직 안 끝났다.
양헌수와 조선軍의 외침 들리는가… “강화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내놔라”
이덕일의 산성기행 | 강화 정족산성
강화도만 제대로 답사해도 한국사 대부분을 꿰찰 수 있다.
강화도는 ‘역사문화답사 1번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 시대 유물·유적이 널려 있다.
강화는 예로부터 갑비고차(甲比古次)·혈구(穴口)·해구(海口) 등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강화는 고구려의 혈구군으로 바다 가운데에 있고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갑비고차란 현대어로 ‘갑곶’ 또는 ‘갑곶이’라는 말로, ‘고차’는 바다로 돌출된 곶(串)을 뜻한다.
강화 동쪽 바닷가에는 갑곶리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갑은 둘(2)이라는 뜻인데, 한강 하류의 조강(祖江)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갈라져 한 줄기는 강화 북단으로 흐르고, 한 줄기는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鹽河)로 나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통진강(通津江)이라고도 불리는 염하는 김포에서 가깝게 보이지만 몽골 군사가 40여 년 동안이나 건너지 못했다는 바다 아닌 바다다.
강화도 산성 답사는 정족산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순서다.
정족산성은 단군이 세 아들 부소·부우·부여를 보내 쌓게 했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는 이칭(異稱)이 전한다.
해발 220m의 정족산은 세 개의 산봉우리가 세 발 달린 솥의 발(鼎足)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답사는 정족산성에서 시작했지만 글은 대략 시대 순으로 서술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강화산성으로 가는 길에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명한 고인돌이 있다.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비파형 동검과 함께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다.
고인돌은 탁자식이라고 불리는 북방식과 바둑판식으로 불리는 남방식으로 나뉘는데, 강화도는 두 양식의 교차지점이다.
강화도·고창·화순의 고인돌 유적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부근리 고인돌은 사방에 4개의 세움돌을 세우고 그 위를 커다란 바위로 덮었는데 짧은 세움돌 2개는 없어졌다.
길이 6.4m, 폭 5.23m, 두께 1.34m, 전체 높이 2.45m로 중량이 50t을 넘는다.
●부근리 고인돌과 고대 유적
그런데 부근리 부근에는 이런 석재가 없고, 마니산에 자연 판상석을 떼어낸 흔적이 남아 있다.
옛사람들이 거대한 판상석을 떼어내 운반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고인돌이 결코 무의미한 돌로 보이지 않는다.
고인돌은 흔히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는 부녀자나 어린 아이의 유골도 발굴돼 일률적으로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 뼈와 함께 청동검·마제석검·화살촉·토기류나 옥 같은 부장품도 출토돼 무덤의 용도도 있지만 제단이나 기념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6만~7만기 정도다.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 적어도 3만5000기 정도가 분포하는 고인돌 왕국이다.
고창·화순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에 2만여 기의 고인돌이 있고, 북한의 평양지역에도 1만여 기가 밀집해 있다고 한다.
강화도에도 157기가 분포한다.
고인돌은 중국의 한(漢)족이 사는 중원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이족의 강역이던 만주 랴오닝(遼寧) 지역에 316기가 있고, 저장(浙江)·후난(湖南)·쓰촨(四川)성과 티베트·대만처럼 주로 소수민족 거주지역에 소수가 분포한다.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도 600여 기가 있으며, 인도네시아에도 200여 기가 밀집해 있다고 전한다.
영국 런던 근교의 스톤 헨지나 프랑스·스페인 등지에도 거석(巨石)문화가 존재하는데, 한때 일부 서양학자는 고인돌이 중국에서 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만주가 동이족 지역인 줄 몰랐던 까닭이다. 동이족은 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몽골 적봉시를 중심으로 하는 홍산(紅山)문화는 동이족문화인데 몇 년 전 필자가 그 중 우하량 유적을 답사했을 때 돌로 만든 선사시대 무덤이 다수 있는 것을 목격했다.
우하량 유적에서는 중국 최초의 옥룡(玉龍)도 발굴돼 옥을 좋아하는 중국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남의 역사도 자국사라고 우기는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중국문화라고 우기지만 필자가 방문했을 때 우하량 유적의 한가운데로 4차선 도로를 내는 것을 보았다. 말로는 자국문화라지만 몸으로는 홍산문화가 파괴돼야 할 남의 문화라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정족산성은 단군이 세 아들인 부소·부우·부여를 보내 쌓게 했다고 하여 삼랑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화도에는 고구려의 역사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려산 청련사는 고구려 장수왕 3년(415) 인도의 천축조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정상 연못에 핀 다섯 색상의 연꽃을 날려 하얀 꽃잎이 떨어진 곳에는 백련사를 짓고, 파란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청련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강화도에는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고려산 치마대(馳馬臺)는 연개소문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곳이며, 오련지는 연개소문이 말에 물을 먹였다는 연못이다.
강화도는 강도(江都)라고도 불린다. 고려의 임시수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 궁터를 둘러싼 산성이 강화산성이다.
막상 가보면 산성이라기보다 고려 궁터를 둘러싼 내성에 가깝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했다.
실제 천도 결정자는 최충헌의 아들이자 최씨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다. 당초 최우는 몽골과 강화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종 18년(1231)의 1차 침략 때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이 항복 지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재추회의를 열어 그의 처형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이 최우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려 하자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하기로 결정한다.
강화도는 물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고 천도 후에도 전국의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조운(漕運·해상운송)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경에서 결사항전하자는 주장이 더 많자 최우는 고종 19년 6월 자신의 집으로 재추 대신들을 불러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강화 천도를 결정했다. 야별초 지유인 김세충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최우에게 도성사수론을 주장하자 그를 끌어내 목을 베는 사건도 발생했다.
●강도(江都) 40년
드디어 고종 19년 7월 강화로 천도하는데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진흙길에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천도한 강화도는 고종의 아들 원종이 재위 11년(1270) 무신정권을 붕괴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만 38년 동안 도읍이었다.
이때 강화도로 따라간 문신 이규보가 “천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난다고 해도 지척의 푸른 물을 건너지는 못하리라”라는 시구를 남긴 것처럼 강화도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던 유일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는 국왕과 일부 지배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백성은 산성이나 섬으로 이주하라는 ‘해도산성입보(海島山城入保)’를 지시했다.
몽골 군사의 물자를 고갈시키려는 일종의 청야(淸野)전술이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귀족은 각지의 조운을 통해 올라오는 세곡을 먹고살 수 있지만 농사를 짓지 않으면 당장 굶어야 하는 백성에게 해도산성입보는 가혹한 정책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대장군 송길유가 섬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백성을 때려죽이거나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어 물 속에 던졌다 거의 죽게 되면 꺼내기를 반복했다는 만행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해도산성입보를 명령한 지 20여 년이 지난 고종 43년(1256) 8월 “여러 도에 사자를 보내 사람을 모아 모두 섬으로 들어가게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우게 하였다”는 기록처럼 백성은 해도산성입보를 거부했다.
고통받는 백성과 달리 최씨 정권 집정자들은 강화도에 개성과 같은 모양의 궁궐을 짓고 격구를 할 수 있는 구장까지 만들었다.
또한 절을 지어 개성에 있던 이름을 짓고 세 겹의 성곽을 둘렀다.
또한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행사도 꼬박꼬박 치렀는데 그 호화스러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부인사 소장 대장경판이 소실되고 경주 황룡사 9층탑이 불탄 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것은 무인정권에 수탈당하던 백성과 천민이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백성과 천민의 항전이 없었다면 고려는 이때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강화도의 지배층은 침략자와 싸우는 대신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최우의 뒤를 승려 출신의 서자 최항(崔沆)이 이었고, 최항의 뒤는 최항이 여종에게서 낳은 최의(崔픿)가 이었다.
그러나 고종 45년(1258) 최씨가(家)의 가노 김준(金俊)·유경(柳璥) 등이 최의를 살해하면서 최충헌부터 60년간 계속되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그러자 고종은 재위 46년(1259) 4월 태자 전(?·원종)을 몽골로 보내 강화협상을 지시했다.
두 달 후 고종은 세상을 떠나는데, 그 다음달 몽골의 헌종도 세상을 떠났다.
고려 태자(원종)는 중국 개봉(開封) 인근에서 황위계승자 쿠빌라이(忽必烈·세조)를 만난 이후 일관되게 원과 화친을 추구했다.
원종 9년(1268) 12월 김준은 평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임연(林衍)에게 제거되는데, 원종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원종 11년(1270) 3월 임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뒤를 이었으나 역시 원종의 사주를 받은 어사중승 홍규(洪奎) 등의 사주를 받은 삼별초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렇게 무신정권은 100년 만에 막을 내리고 왕정이 복고됐다.
삼별초는 원종의 사주를 받고 임유무 정권 제거에 가담했지만 막상 출륙환도가 결정되자 크게 동요했다.
드디어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야별초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이 출륙을 거부하면서 삼별초의 항전이 시작된다.
배중손 등이 “배를 모아 공사의 재물과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해 무려 1000여 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은 삼별초가 내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음을 뜻한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임금으로 추대하고 진도(珍島)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대몽항쟁에 나섰다.
●이건창 생가와 강화학파
정족산성 밖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일행은 화도읍 사기리에 있는 강화학파 영재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생가를 찾았다.
이건창은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명성을 날렸으나 불의에 저항하다 거듭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대청마루의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편액이 훗날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친구 매천 황현의 글씨라는 점에서 이건창의 성격을 알 것 같다. 이건창이 올곧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집안의 남다른 내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 함락되자 동생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자결로 항의했다.
그런 피는 이건창은 물론 동생 이건승(李建昇)에게도 전해졌다.
나라가 망하자 1910년 9월 24일 이건승은 대나무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웃 마을에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골 집을 나섰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망명길에 오른 것이었다. 개경의 전 홍문관 시강 왕성순(王性淳)의 집에서 충북 진천의 홍승헌과 만나 압록강을 건너는데, 만주의 횡도촌에서는 먼저 망명한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초 함께 망명하기로 했던 이건방을 만나 되돌아가 조선 양명학을 전승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만주로 떠난 이들은 모두 성리학자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자였다.
이들은 모두 만주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동부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한 홍승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천에서 아들 홍인식이 달려갔으나 관을 살 돈이 없어 교포들이 십시일반으로 관을 마련해주었다.
다른 망명객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겨진 이건방의 제자가 강화학파의 마지막 계보를 이은 위당 정인보다.
위당의 뒤를 잇는 학자가 있는지…. 이건창 일가가 강화도에 자리 잡게 된 뿌리는 조선 숙종 때의 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건창 생가를 둘러본 발길은 정제두 묘소로 향했다.
조선 후기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라는 말이 있었다.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이다.
양명학이 주자학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면서 생겨난 독특한 현상이다.
정제두는 조선 후기에 거의 유일한 외양내양(外陽內陽)의 선비였다.
그는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몰두했으나 병약했다.
34세 때는 뒷일을 아우에게 맡기는 글을 쓸 정도로 위독했는데,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박세채(朴世采)에게 “심성(心性)의 뜻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문성(王文成·왕양명)의 학설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라는 유언 비슷한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죽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났고 그때부터 그는 양명학자를 자처했다.
그 후 숱한 시비 속에서도 양명학 연구에 매진하던 정제두는 61세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한다.
그의 <연보>는 이 해 장손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 선조의 묘가 있는 강화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독재와 주자학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던 때였다.
그가 강화도로 이주하자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그를 따라 강화로 이주했다.
이렇게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미 서술한 이건승·홍승헌·정원하와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지향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정제두 묘소에 다다르자 서예가이자 한국화가인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가 큰절을 올렸다.
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던 음택(陰宅)이라면서…. 이렇게 죽은 선현과 산 후예가 시공을 뛰어넘어 정신으로 만나는 것이 답사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오늘날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 대는 데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재는 이런 풍토가 없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다.
승화 후 온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기면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원종 14년(1273) 봄 김방경과 흔도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40여 년에 걸친 고려의 대몽항전도 막을 내렸다.
삼별초군이 떠난 후 강화도를 점령한 몽골군은 모든 시설을 불살라 버렸지만 충렬왕 17년(1286) 원나라 반란군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다시 2년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되어야 했다.
강화도에서는 이처럼 세계제국 원나라와 40여 년에 걸친 얽히고 설킨 장대한 드라마가 전개됐다.
그나마 중국이나 유럽제국과 달리 고려의 국체(國體)가 보존된 것 역시 40여 년에 걸친 항쟁의 산물이었다.
●병인양요와 양헌수 장군
수목장터를 지나면 동문이고 그 앞에는 작은 비각이 서 있다. 병인양요의 명장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승전비다.
흥선대원군은 한때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프랑스의 힘으로 막기 위해 가톨릭을 이용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극단적 억압정책으로 돌아섰다.
대원군은 고종 3년(병인년) 남종삼·홍봉주 및 수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도를 학살했는데, 이때 벨누 등 프랑스 신부 9명도 처형했다.
페롱·칼레·리델 등 체포를 면한 3명의 신부는 조선인 신자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청나라 지부(芝?)에 도착한 이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의 참상을 전하면서 정벌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자국인의 처형에 항의하는 한편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조선으로 출병했다.
로즈 제독은 먼저 일부 기함을 보내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와 수로 탐사를 마치고 물러갔다.
발칵 뒤집힌 조정에서 한강 수로 양쪽에 포대를 강화하고 부대를 증강 배치한 가운데 로즈는 기함 베리에르호를 비롯한 군함 7척에 대포
66문과 병사 1520명을 싣고 강화도로 향했다.
리델 신부와 최선일(崔善一) 등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 길잡이였다. 10월 16일 로즈 함대는 강화를 점령하고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왔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군은 문수산성에서 저항했으나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주목사에서 순무영 천총(千總)이 된 양헌수는 기습전으로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기로 하고 11월 7일 칠흑 같은 그믐밤에 정족산성으로 잠입했다.
양헌수와 549명 조선군의 기습을 받은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과 8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조선군은 전사자 1명에 부상자도 4명뿐이었다. 프랑스군은 11월 10일 강화에서 철수하면서 고려 궁터 안 외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를 비롯한 345권의 주요 서적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리고 외규장각마저 불태워 버렸다.
프랑스는 1993년 고속철도사업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고속철도가 완공된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다.
문화대국이 아니라 약탈대국임을 입증한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지 않는 한 병인양요는 아직 끝난 전쟁이 아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길목, 연미정
고려 궁터 앞 누각에는 ‘김상용 순의비(金尙容殉義碑)’가 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남문루로 올라가 담뱃대로 화약궤에 불을 붙여 자결한 인물이다. 이렇게 김상용은 순절했지만 강화 방어의 책임을 진 강화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의 행위는 지금도 혀를 찰 만하다.
반정 1등공신 김류의 외아들인 김경징은 청군이 염하를 건너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술만 마시며 놀았다.
<연려실기술>에는 왕족과 대신이 강화도로 피란할 때 김경징이 자신의 집안 사람과 재산을 옮기는데 “경기도의 인부와 말을 모두 동원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사익을 앞세운 인물이었다.
심지어 세자빈이 김경징을 불러 꾸짖자 겨우 배로 건너도록 할 정도였는데, 막상 청나라 군사가 들이닥치자 부검찰사 이민구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도망쳤다. 결국 김경징은 강화 수비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사사(賜死)됐는데, 그의 아들 김진표도 부친 못지않았다.
김진표는 할머니 유씨와 어머니 박씨, 아내 정씨, 그리고 할아버지의 첩 신씨, 부친의 첩 권씨 등에게는 “죽지 않으면 장차 욕을 볼 것입니다”라고 자결을 종용해 놓고 자신은 도주했다.
김류 가문의 부녀자 3대는 강화도에서 자결한 반면 김경징과 김진표는 어머니와 아내를 모두 죽게 하고 달아난 것이다.
이런 상황이므로 자결을 택한 김상용의 순절이 백성에게 면목을 잃은 조선의 사대부에게 더욱 절실했는지 모른다.
이제 강화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연미정(燕尾亭)으로 향한다.
강화 남문에서 17번 도로를 타면 강화읍 월곶리의 연미정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물줄기가 만났다 다시 갈라져 강화도 북쪽을 통해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 강화로 천도한 후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에 학생을 모아놓고 공부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중종 5년(1510)의 삼포왜란 때 제포(薺浦)에서 큰 공을 세워 경상병마절도사가 된 황형(黃衡)에게 이 땅을 사패지로 주고 정자도 지어 주었다고 전한다.
황형은 집 근처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 소나무를 선박·성책·행궁 등을 만들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 때 이른바 ‘형제의 맹약’을 체결한 장소도 연미정이다.
연미정은 ‘강화8경’의 하나인데 ‘연미정 달맞이’가 특히 유명하다.
시원한 정자와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기만 해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이었으나 최근 출입이 전면 허용됐다.
연미정에서 한강 쪽으로 바라보이는 섬이 유도(留島)다. 예전에는 서해에서 올라온 배가 연미정 앞 이 섬에서 닻을 내리고 기다렸다 만조가 되면 강을 따라 마포나루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이곳에 서면 파주·김포 일대는 물론 북한 땅인 개풍도 손에 닿을 듯 가깝게 여겨진다.
이 강만 건너면 북한인데 언제 뱃길로 북한 땅에 가볼 것인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 오른다.
●정족산성과 정족산 사고
정족산성은 그 자체로 숱한 문화재를 갖고 있다.
둘레 2.3km의 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성문이 있는데 1970년대 복원한 남문의 문루가 ‘종해루(宗海樓)’다.
좌측부터 시작되는 이채로운 현판이다. 정족산은 고졸한 사찰을 하나 품고 있는데 유명한 전등사다.
사찰의 중창기문에는 아도화상이 381년(소림왕 11)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소수림왕 2년(372)이니 가장 오래된 사찰일 것이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는데 충렬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玉燈)을 헌납한 후 전등사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정화궁주는 비운의 여인이다.
종실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의 딸로 충렬왕과 혼인했으나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왕비로 다시 맞아들이면서 별궁으로 쫓겨나야 했다.
전등사에는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다.
대조루(對潮樓)라 쓰여 있는 2층 누각이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한다.
대조루 누각 밑을 빠져나와 계단을 오르면 전등사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 처마 밑에는 절집을 짓던 도편수의 사랑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을 벌하기 위해 여인의 형상을 깎아 세웠다는 나부상(裸婦像)이 있다. 혹자는 원숭이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등사 종각의 범종은 보물 제393호인데 특이하게도 북송(北宋)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전통 범종과 달리 상부에 음통(音筒)이 없다.
북송 철종 4년(1097) 제작돼 중국 허난(河南)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사용하던 종이다.
일제는 철이 부족하자 교회나 사찰의 종까지 마구잡이로 거둬 갔는데 이때 전등사 종도 빼앗겼다.
해방 후 전등사 주지 승려가 종을 찾아 다니다 부평에 있던 일제 병기창 뒷마당에서 이 종을 발견했다.
숭명사 범종이 중국에서 실려와 용광로에 들어갈 운명이었으나 그 전에 일제가 패전하면서 살아난 것이다.
전등사 요사채를 돌아 가궐 터를 지나면 ‘정족산사고(史庫)’ 터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던 ‘장사각(藏史閣)’과 조선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의 두 건물이다.
정족산 사고는 일제강점기에 파손돼 주춧돌만 남아 있었으나 1999년 옛 사진을 보고 복원했다.
종전 후 조선은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 마니산사고로 옮기고 복사본을 4부 더 만들어 춘추관과 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분산, 보관했다. 그 후 마니산사고본은 병자호란 때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로 넘어갔고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철종과 잠저구기(潛邸舊基), 용흥궁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1831~1863)이 살았던 강화읍 관청리의 용흥궁(龍興宮)은 다른 가옥에 둘러싸여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원래는 초가삼간의 움집이었으나 철종 4년(1853)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확대 개축했고, 광무 7년(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했다.
용흥(龍興)이라는 글자 그대로 용(왕)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이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었다.
헌종이 재위 15년 만에 죽자 헌종의 모친인 대비 신정왕후 조씨 일가가 정권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한 순조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국왕으로 지목되었다.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지목해 왕위를 계승시킨 것이다.
이때가 되면 권력은 노론 일당의 소수 벌열 손에 들어가 국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철종의 큰형 이원경은 헌종 10년(1844) 이른바 ‘민진용의 옥사’로 사형당했다.
친형이 사형당한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할 정도로 모든 권력을 노론 벌열이 쥐고 있었다.
더구나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철종이 느닷없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국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재위 2년(1851) 대왕대비 김씨는 서둘러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철종은 안팎으로 안동 김씨에게 포위된 셈이 되었다.
철종의 재위 기간에는 천재가 끊이지 않았고, 삼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했으나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왕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철종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유일한 혈육으로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했으나 혼인 직후 죽고 말아 혈육마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