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문중 이예안 회장 제공 / 2024년 11월 준공 예정
백사 이항복선생기념관이 경기도 포천에 건립된다.
이항복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에 앞장선 조선 시대 대표적 명재상이다.
2021년 3월 15일 경기도 포천시에 따르면 사업비 30억 원을 들여 5~6월 사이 이항복 선생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24호)역이 위치한 가산면 금현리 일대 5940㎡(1800평) 규모의 부지에 기념관을 짓는다. 개관 목표 시기는 내년 2024년 5월이다.
당초 이항복선생기념관 건립은 14대 종손(宗孫)인 이상욱(李相旭. 1942~2015/73세) 씨가 2006년부터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씨가 2015년 고인이 되면서 중단됐다.
이후 종가 맏며느리인 조병희 여사가 해당 터를 포천시에 기부체납했다. 그러면서 포천시가 2018년부터 이항복선생 기념관 건립을 맡았다. 시는 2020년 3월 설계 용역을 진행하고, 지난해엔 경기도 문화유산관광자원 개발사업 선정을 통해 사업비를 확보했다.
이항복선생기념관엔 종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던 유물을 복제해 전시할 계획이다.
포천시는 이곳을 학생들을 위한 교육장소로도 활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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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 이항복 후손이 400년간 간직한 보물들, 국가에 기증
▲백사선생이 <천자문>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가 쓴 친필 중에는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이 있다. 백사가 유교경전 <예기>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 ‘제통’, ‘예기’ 편을 써서 병풍으로 만든 것인데, 백사의 9대손이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제작했다. 백사는 “나이 어린 학도나 아이들이 제사를 지낼 때 무턱대고 윗사람만 따라할 뿐, 그것이 무슨 의의인 줄 전혀 모르고 있음을 걱정해서 엣 경전에 나온 제의(祭儀)를 직접 써서 병풍으로 남긴다”고 기록했다.
▲백사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좌측)과 호성공신 교서(국립박물관 제공)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명재상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유물들이 국가에 기증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늘(2019년 11월 21일) 이항복의 15대 종손인 이근형 씨로부터 종가에서 약 400년간 간직한 호성공신 교서와 초상화, 천자문 등 문화재 17점을 전날 기증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가운데 이항복 관련 자료는 모두 6점입니다. 그 중 호성공신 교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1등 교서로 보물급 가치가 있으며 이항복이 손자를 위해 쓴 천자문은 손글씨 천자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는 점에서 귀중하다고 박물관 측은 강조했습니다.
이항복이 1604년 책봉된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로, 세 등급으로 나눠집니다.
당시 1등 공신으로 분류된 인물은 이항복과 정곤수단 두 명입니다. 초상화는 모두 2점이며 호성공신이 됐을 때 받은 초상화를 18세기에 다시 베껴 그린 겁니다.
이항복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해 40년 가까이 관직 생활을 했습니다.
정유재란까지 다섯 차례 병조판서를 지냈고, 1600년 최고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백사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께서 1604년 책봉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로, 세 등급으로 나뉜다. 당시 1등 공신으로 분류된 인물은 이항복과 정곤수, 단 두 명이었다.
이항복이 받은 호성공신 교서에는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봤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함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라며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에 발탁돼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아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고 기록됐다.
교서는 공신 이름과 업적, 특권, 명단을 적은 문서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가로 271㎝·세로 37㎝이며, 명필로 알려진 한호가 글씨를 썼다. 마지막 부분에는 발급 날짜가 있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 도장이 찍혔다.
이항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로서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했고, 왕자는 평양으로 호종했다. 이에 1613년에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 호종에 공을 세운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 임해군 역모 처리와 관련해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 김진재 옥사 처리에 기여한 형난공신(亨難功臣) 2등에 각각 임명됐다. 그에 앞서 1590년에는 정여립의 난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모두 5차례 공신이 됐다.
▲ 백사 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 후손들이 기증한 초상화는 모두 2점이다. 호성공신과 위성공신이 됐을 때 받은 초상화를 18세기에 베껴 그린 후모본(後模本)이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이항복 초상화에는 원본 특징이 남았으나, 얼굴과 복식에 명암을 넣은 점은 18세기 특색"이라며 "위성공신상 후모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이항복 초상화 초본'과 얼굴 표현이 유사해 서울대 작품이 이항복 57세 때인 1613년 초상화 초본(밑그림)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물 기증에 기여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두 초상화는 후모본이지만, 국난을 극복한 기개와 영웅적 면모가 잘 드러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 백사 이항복 위성공신상 후모본(좌측)과 서울대 박물관 소장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천자문은 이항복이 1607년 손자 이시중(1602∼1657)을 위해 손수 쓴 자료다. 굵고 단정한 해서(정자체)로 정성 들여 쓴 뒤 "정미년(1607)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라고 당부의 글을 남겼다.
또 다른 기증 유물인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白沙先生手書祭屛眞蹟帖)은 이항복이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서 제사와 관련된 글을 써서 제작한 병풍을 9대손인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화한 송설체(松雪體·조맹부 서체)를 바탕으로 한 근골(筋骨) 있는 서체가 잘 남았다.
▲ 이항복 친필 천자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외에도 이항복 증손인 이세필(1642∼1718) 초상화 1점과 이항복 후손이 받은 교지 등 문서 5점, 초상화함과 보자기 등이 국가에 기증됐다. 박물관은 내년 3월부터 7월까지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이항복 종가 기증 기념전을 열 계획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주이씨 백사공파는 조선시대 명문가 중 명문가"라며 "이항복과 같은 명재상이 그리워지는 시기에 이처럼 귀한 선물을 받은 만큼, 잘 연구하고 전시하겠다"고 말했다.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선생의 친필(450x600)/2007.09.08 종가에서 국립박물관 기증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