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보다 일찍 잠이깬 오늘 아침 e - book 서점을 뒤지다 발견한 사진작가 신미식의 사진에세에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표지다. 어떤님이 보면 눈이 번쩍뜨일 사진이기도 하다. ㅎㅎ
체게바라의 젊은날 여행기를 다룬 영화 "모토크로스 다이어리"의 포스터를 연상케하는 사진이어서 내친김에 신미식작가를 검색해 보았다. 꽤 유명한 사진작가다.
나와같은 중늙은이 세대에겐 젊은날 해외 여행은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사건이었는데,(나는 신혼여행도 고풍스럽게 기차를 타고 다녀왔다^^*)젊은 작가였을거라는 지레 짐작과 달리 신미식 작가는 의외로 나와 거의 같은 동세대다. 요즘은 해외여행이 자유로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수시로 해외여행을 다녀 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무리 해외 여행이 자유로워도 세상을 누비며 카메라에 자신의 시각을 담아 낼 수 있는 재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오늘 아침 인터넷에서 끼와 재능을 골고루 갖춘 작가를 만난김에 이곳에 소개한다.
(우리 구미 박사모님들중에도 재능있는 분들이 많으니 기회가 되면 이곳에 소개하고 싶다.)
서른 살에 카메라를 사고, 다음해부터 세계를 누비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 잡지사 아트디렉터를 그만두고, 20년 가까이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20여 권의 책을 낸 신미식. 세상은 그다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수입도 거의 없어 근래 10년은 신용불량자로 살았다. 그래도 사진에 미치고 여행에 미친 신미식은 다시 낯선 길 위에 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은 신미식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희귀한 바오밥나무를 사진으로 국내에 처음 알리면서 그는 존재감을 갖게 됐다. 최근에는 케냐의 한 쓰레기처리장에 위치한 마을의 아이들로 구성된 ‘지라니 합창단’을 찍은 포토에세이『지라니 합창단 희망을 노래하다』(끌레마)를 출간했다. 여행사진작가 1세대라 불리는 신미식을 그가 운영하는 효창동의 갤러리까페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났다.
까페가 참 아늑하고 예쁘다. 원래 까페에의 로망이 있었나?
까페 문화를 정말 좋아했다. 예전에는 저 뒤처럼, 혼자 까페에서 일하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었다.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까페에도 자주 들렀고, 그러면서 까페를 운영하는 꿈을 꿨다. 하지만 돈이라곤 없었지. 여기 차릴 때에도 돈이 없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꿈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돈 없이 꿈으로 까페를 차렸다고?
4, 5년 전에 내 전재산이 까페 보증금의 1/10쯤이었다. 그게 전부였는데 건물주랑 꿈을 나눴다. 재미있는 인연인데, 이 까페 건물주가 웹 에이전시 회사를 하는데 내가 거기서 일을 했다. 하루는 나한테 꿈이 뭐냐고 물으시더라. 갤러리까페를 하는 거라고 했더니, 대뜸 “이 근처에서 할래요?”하는 거다. 돈이 없다니까, 동업을 제안하셨다. 그래서 인테리어 비용은 내가 대고, 운영하고 대신 수익은 나누는 구조로, 그렇게 시작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도 나를 믿어줬던 게 정말 고마웠다.
요즘은 어디 가서도 그런 얘길 한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5초 안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항상 머리 속에, 가슴 속에 꿈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고. 그래서 그때 내가 가진 모든 돈을 까페 인테리어 비용으로 다 쓰고, 보증금 없는 하숙집에 들어갔다. 2, 3평 정도 되는 하숙집에서 몇 년 살았다. 지금은 생활이 괜찮아져서 집을 얻어서 나왔지만.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겐 노래만이 유일한 희망
신미식 작가가 찍은 '지라니 합창단'
『지라니 합창단 희망을 노래하다』의 배경이 된 케냐의 한 쓰레기처리장에 있는 마을 '고로고초'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임태종 목사님(지라니 문화사업단 회장)이 날 초대해 주셨다. 나도 전에 TV에서 지라니 합창단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아이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아프리카는 그 동안의 작업으로 익숙한 곳이기도 했고. 포토에세이에 실린 사진들만 모아 크게 실은 사진집『The unstoppable songs of hope: 희망을 노래하다』(푸른솔)도 내고 전시회도 열었는데, 인세는 전부 지라니문화사업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서로 뜻이 잘 맞았다.
1달간, 고로고초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어땠나?
책에도 썼지만 처음엔 상상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쓰레기더미와 사람이 하나가 돼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악취도 너무 심했고. 하지만 그곳 초등학생들로 구성된 지라니 합창단의 노래를 듣는 순간 정말 감동적이었다. 아이들이 해외 공연 때 단복을 잘 차려 입고 노래를 하는 것보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자연스럽게 연습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다. 애들하고 놀고 사진도 찍고, 풍선도 불어 주면서 친해졌다. 내가 워낙 아이들과 노는 거 자체를 좋아한다.
그렇게 희망 한 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든 이유가 뭘까?
그 곳에 가보니까 알겠더라. 그 아이들이 비전을 갖고, 꿈 꿀 수 있는 길은 결국은 노래라는 걸. 이 책의 제목은 ‘희망을 노래하다’지만, 원래는 ‘노래만이 희망이다’였다. 정말 이들에게 희망은 노래뿐이다. 쓰레기라는 개념을 떠나서 거긴 최악의 빈민가다. 아이들의 한 40% 정도는 부모가 없거나 한 명만 있고, 에이즈 환자들도 한 20%는 되는 것 같다. 꿈을 꾸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은 공간이다.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초등학교를 학비 없이 다닐 수는 있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거기에 대해 의문점조차 가지지 못한다.
그 곳의 초등학교에서는 노래를 한번도 가르치질 않는대. 악보를 본 적도,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불러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적인 수준의 합창단을 만들고, 우리나라나 외국에 공연을 다닌다니 정말 감동적이지 않나? 생각해 보라. 1년 내내 하루에 몇 시간씩 노래를 하는 아이와 쓰레기장에서만 사는 아이의 정서 차이를. 그건 엄청난 의미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밝다. 합창단 아이들이 전부 120여 명 정도 되는데, 국내에 와 있는 아이들은 한 35명 정도 된다. 그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만나고 꿈이 생기고, 돌아가서 공부를 하고.
지라니 합창단의 비전이 그거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학비도 대준다. 그 중에서 뛰어난 학생들은 한국의 대학이나 미국 아이비리그 등에 유학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거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오바마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거다.
합창단은 결국 아프리카를 살리기 위한 굉장히 문화적인 접근인 거네.
아프리카의 가장 큰 문제는 타락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거지. 합창단이 목표가 아니라, 훌륭한 지도자를 만들고 싶은 거다. 아프리카가 변하려면 올바른 지도자가 절실한데, 그런 지도자를 키우는 게 임태종 회장님의 목표인 것 같다. 지금은 지라니 아트스쿨을 만들기 위해서 땅도 다 사놨으니까. 지금 지라니 합창단의 연습실은 엄청 열악하거든. 이 아이들에게 학교가 갖는 의미는, 아이들 집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집들이 아주 작은데 두 평 남짓한 공간에 5, 6명씩 산다. 대체 어떻게 잠을 잘까, 계산해도 안 나온다. 그러니까 애들이 집에 안가는 거다. 집에 가면 공부를 할 수가 없거든. 그 아이들에겐 학교가 꼭 필요하다.
아이들 사진을 찍고 인화해서 선물로 주던데. 자기 사진을 손에 꼭 쥔 아이의 모습을 보니까 뭉클하더라.
아프리카 아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친해지는 방법으로 생각해 냈다. 휴대용 포토프린터로 뽑아 주는 거니까 어렵지 않다. 한번도 사진을 찍어 본 적 없는 이 아이들한테는 자기 얼굴이 담긴 사진은 평생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정말 좋아들 한다. 더 나아가 가족사진도 찍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나만을 위한 사진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우선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러면 수줍은 성격의 사람들은 인물사진 찍기 힘든 걸까?
사진은 기능적인 실력을 연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격을 적극적으로 바꿔야 한다. 적극적이어야 인물에게 밀착한 사진이 나온다. 나는 사람을 워낙 좋아하니까 두려움이나 부담이 없지만 만약 그게 어렵다면 정물이나 풍경 사진을 찍으면 되겠지.
지라니 합창단 아이들은 먼지 나고, 냄새가 난다. 하지만 난 먼저 다가가서 안아주고 풍선도 불어주고, 사진도 찍는다. 그래야 교감이 되고, 서로의 마음이 열린다. 연예인들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잘 찍히려고 노력을 해서다. 둘 다, 잘 찍으려는 자와 잘 찍히고 싶은 자가 만나야 최고의 사진이 나온다. 이 아이들에게도 그런 거다. 하다못해 디지털 카메라니까 뷰파인더로 찍힌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거다. 그 순간을 같이 즐기면, 사진이 하나의 놀이가 된다. 즐거운 거다. 사람은 다 똑같은 거거든.
어쩜 아이들 눈이 그렇게 크고, 예쁘게 생겼을까. 책에 실린 사진들이 다 생생하더라.
아이들 눈이 거울이더라고. 나도 거기에 반해서 눈을 찍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제는 신미식 사진은 아이들의 눈빛을 담는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다. 난 인위적으로 멋 부리는 사진은 찍지 않는다. 나에게 감동은 자연스러움, 살아있는 사진이다. 내가 찍는 사진이 나한테는 멋이다.
나는 지금껏 내가 찍은 사진에 대해서 작품이라고 얘기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사진이다. 잘 찍은 사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좋은 사진이라고는 생각한다. ‘어떻게 찍었어, 대단하다’ 라는 것보다는 ‘우와, 나도 저렇게 한번 찍고 싶어’하고 만만하게 보여지는 걸 원한다. 누군가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사진이면 족하다.
서른 다섯권의 책을 내면 후회가 없을 것 같아
이 책 말고도 최근 두 권의 책이 더 나왔다. 자전에세이『사진에 미친놈, 신미식』(비전과 리더십)이랑 사진집『Colors of the Sea: 신미식의 NLL 사진기행』(플래닛미디어)이 그거다.
어쩌다 보니 시기가 겹쳐졌다.『사진에 미친놈, 신미식』은 내 부끄러운 온갖 인생사를 다 썼다. 한달 뒤면 내 나이가 쉰이니까 사진을 찍은 지 20년이 됐다. 그 동안 수입도 없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1년에 1천 만원도 못 벌었지. 근데 쓰는 걸 생각해 봐. 여행 다녀야지. 의료 보험도 다 없앴고, 국민연금도 못 내고. 사회에서 격리가 돼 살아왔다
몸의 장기도 팔러 많이 가봤다. 지금이야 이런 얘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는데.(웃음) 그 때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거였다. 그래도 후회는 안 했던 것 같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고통이라면 그냥 그걸 즐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10년 가까이 신용불량자로 살았는데, 빚 청산한지 이제 2년 됐다. 지금 죽는다 그래도 별로 미련이 없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빚 청산은 어떻게 할 수 있었나?
그간의 내 작업물들, 책을 10권 넘게 내면서 신미식이라는 존재가 알려지고, 사진을 전시하고 팔기도 하면서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더라. 최근 2, 3년은 벌이가 썩 좋아졌다.(웃음) 큰 프로젝트 제의도 오고, 삶이 워낙 고단해서 그런지 강의 제안도 잦다. 강의도 요즘에 많이 한다. 그래서 내가 목표했던 것들을 어쨌든 간에 이룬 거다.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겠다고 목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여행사진작가로 사는 내 삶에 대한 목표는 이미 이뤘거든.
『Colors of the Sea: 신미식의 NLL 사진기행』은 NLL(북방한계선) 주변 서해와 섬들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모두 지난 여름부터 석 달 동안 찍은 것들이다. 나도 분단의 아픔, 이념의 시대를 겪어 본 세대라서 작업 의뢰가 왔을 때 흔쾌히 응했다. 한국에 살면서도 갈 수 없는 곳을 가볼 기회였고, 여행 사진이 아닌 이런 식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한다는 것도 큰 기회였다. NLL 지역 사진을 찍은 건 내가 한국에서 최초라고 들었다. 내년에는 DMZ를 찍어서, 이 책에 실린 사진들과 함께 사진집을 내려고 한다.
특히 최근 포격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 연평도 사진도 실려 있다.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고 정말 충격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복잡미묘하다. 지금 가면 좀 아플 것 같아서 다시 못 가고 있다. 그리고 2명의 민간인이 죽었지 않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랑 같은 민박집에 묵었던 분들이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던 섬, 연평도를 담은 신미식 작가의 사진들
여행사진작가 1세대라고 불리는데.
아마 내가 여행사진작가라는 타이틀을 국내에서 처음 달았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1세대라고들 한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 바오밥나무 사진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그런 면에선 뿌듯하지. 그리고 아마 사진가로서 스무 권의 책을 내는 것도 최초일 거다. 나이 쉰에 이렇게 사는 놈도 최초일 것 같아.(웃음)
벌써 스무 권 썼는데, 평생 책은 몇 권 쓸 계획인가?
서른 다섯권. 안 되면 마는 거지, 뭐. 그 정도 낸다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고 그래도 안되면 한국에서 산다는 게 별로라고 생각하려고.(웃음) 최선을 다했다는 나만의 기준을 세운 거다. 그 전에는 내가 힘들어도 불만을 가지지 말자는 거지. 목표는 예순 다섯까지 배낭여행을 다니고, 계속 책을 내고, 그 이후에는 사람들과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 거다. 프로는 몸 관리를 해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술, 담배 안 하고, 하루 8시간 자고, 밤 11시면 집에 들어간다. 지난 20년을 꼬박 그렇게 살아왔다.
내년 계획은?
두 권의 책은 무조건 나올 거다.(웃음) 그리고 내년 3월에 다시 마다가스카르에 가서 그 동안 꿈꿔 왔던 도서관을 지어주려고 한다. 학교를 하나 선정해 놨는데 시 예산이 부족해서 책걸상이 없대. 그래서 그거 채워주고, 운동장도 만들고, 마을에 우물도 파고 그게 요번 목표다. 독자들과 함께 후원금을 지금 1,200만 원 정도 모았다. 목표는 한 2천 만원이었지만. 일반독자들이 나를 믿고 조금씩 내서 1,200만 원이라는 큰 돈이 모였다. 혼자 가는 건 아니고 독자들하고 같이 간다.
그리고 9월에는 에디오피아에 신발 천 켤레를 가지고 갈 예정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신발을 신으면 사망률이 20% 가까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에디오피아를 여행하니까 마음이 짠한 거다. 신발 회사에서 후원도 받고, 안되면 500켤레라도 꼭 가지고 가고 싶다.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한다. ‘네가 아프리카 애들을 다 후원할 수도 없고 몇 명만 해주고 나머지는 안 해주면 티나 나겠냐’고. 나는 그냥 길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돕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이 두 프로젝트가 나한테 큰 일이 될 것 같다.
첫댓글 참으로 인고의 시간이 신미식 작가님을 오늘날 세상에 알릴수있었던것처럼
저 자신도 불의와 타협하지않으며 소신것 주관대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구주사님 반갑습니다 내주관이 뚜렷하면 일하시는대도 흔들림이없겠쥬...좋은 꿈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