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佐鎭將軍墓
요약설명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년) 장군의 묘소이다. 묘역 뒤로 담장을 둘렀고 봉분 아래에 둘레석을 설치했다. 상석과 장명등, 묘비가 있으며 양쪽에 말 석상 한 쌍이 있다.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한 장군은 만주에서 군사훈련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큰 업적을 세웠다. 1930년 만주 산시역 앞에서 고려청년회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인근 야산에 묻힌 장군의 유해를 1940년 부인 오숙근이 몰래 가지고 와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봉분을 만들지 않은 채 안장하였다. 1957년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김두한이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여 부인의 묘와 합장했다.
“청산리전투”
김좌진 장군은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15세 때 노비문서를 태워 30여 명의 노비를 풀어주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했으며 북로군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21일에서 27일까지 김좌진과 휘하의 이범석, 나중소 등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만주 전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포를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저질렀다.
상세설명
독립운동가인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이다.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1905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1913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루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33년 장군의 유해를 밀감상자로 위장해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8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