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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과 싸워 이긴 유일한 나라 대월(베트남)과 장기 항전한 고려국
인류역사에서 몽골 만큼 유라시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무패 행진을 이어간 나라도
없었는데 그 몽골의 천하무적 기마부대를 맞아 싸워서 이긴, 그것도
3번이나 싸워 모두 승리한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따이 비엣(大越 대월, 월남,
베트남)으로 훗날 프랑스 및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저력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집트 맘루크군이 일칸국 훌라구칸의 부하 키트부카가 이끄는 시리아 주둔군
을 격파한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가 있다지만 각 2만을 동원한 소규모전투이며
더욱 몽골 군대는 몽고와 중국에 걸친 원나라 본국이 아니고 수많은 칸국 중에 이란 지방
에 세워진 작은 나라인 일칸국이었으며..... 더욱 지휘관은 칸이 아닌 일개 장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와 역사, 종교, 문화적으로 닮은 쌍둥이 나라가 있으니 베트남으로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해 4군을 세우고는 남월을 침략해 9군을 세웠으며 베트남은 유교를 받아들여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 선출돼 유교에 의해 나라를 통치했으며 두 나라는 궁궐도
장안을 모방했고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중국에 대항하며 프랑스 식민지가 되는 과정도 닮았습니다.
중국에서 월(越) 은 고대 강남의 남방 민족의 통칭으로 중원 사람들과는 언어가 달라 대화가 되지
않았는데, 주나라 이후 점차적으로 중원 사람들이나 다른 소수 민족들이 강남의저장성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한족 이 대거 이주하여 민족이 물갈이 됐다고 보여집니다.
월(越) 민족의 위치는 저장성 사오싱시 를 중심으로 하여 광둥성, 광서성, 장시성, 푸젠성
등의중국 동남부와 베트남(월남)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니... 우리가
베트남을 남월(南越) 또는 월남(越南) 이라고 부른게 여기서 부터 연유하는데 운남성의
타이족이 남하해서 태국 을 세웠듯이 월(越) 중에 백월(白越)이 남하해서 베트남 을 세웁니다.
진나라가 망한 BC 203년 중국 남해군위 조타(趙佗 찌에우다) 는 남해군과 계림군에 남월(南越)
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광동성과 광시자치구에 복건성과 북부 베트남 을 아우르는 영토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한무제에게 망했으며, 1802년 안남을 재통일한 쟈롱제 는 청나라에 남월
을 국호로 인준해 달라고 요구하니 청나라는 남월 대신에 월남으로 바꾸어 인정하니 베트남 입니다.
백월(白越)족 언즈엉은 BC 275년 하노이의 원주민 반랑왕국을 멸망시키고 어우락 왕국을 세웠는데
진(秦)나라에 망하고 그후 남월(南越) 이 한무제에게 망하자 베트남인들은 쯩자매가 독립전쟁
을 일으킨 이래 찌에우어우의 봉기후 독립을 쟁취했으나 수나라에 점령되었고 당나라의 착취
에서 쿡트씨가 자립하고 939년 응오꾸엔은 5대 10국의 하나인 남한군대를 격파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후 베트남의 레(黎)왕조는 980년 5대 10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승승장구하는 기세의
송나라 대군의 침략을 격퇴했고 그 후에 리(李)왕조는 절치부심해 대군을 동원해 다시 쳐들
어온 송나라 군대를 물리치니 중국은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하는지라 독립국가를 유지하게 됩니다.
1차 대 몽골전쟁 : 1226년 수립된 베트남의 쩐(陳)왕조는 1257년 몽골군 우량하타이가 이끄는
5만대군의 침략을 격퇴하니 징기스칸 이래 몽골의 대외정복 전쟁에서 당한 최초의 패배
이니 몽케칸의 아우 쿠빌라이는 운남의 대리국을 제압한후 부하 우량카타이를 시켜 수하
2명을 사신으로 보내 '자신들은 송나라를 치러 갈테니 귀순한 뒤 길을 열라' 는 뜻을 전합니다.
베트남의 쩐 태종이 사신을 가두자 우량카타이는 2만 5천 병사를 아들 아주(阿朮)와 차크차크두
에게 맡겨 다이 비엣을 침공하자 쩐 태종은 6개군을 이끌고 출정하니 쩐 구옥뚜안(陳國峻)
이 수군으로 국경을 봉쇄했지만 우량카타이는 수도 탕롱(昇龍)를 향해 진격해
빈레를 공격했고 쩐 왕조는 타오강(红河)에서 코끼리병과 기병, 보병으로 횡렬로 늘어섭니다.
몽골 군은 대리국에서 차출한 병사들을 전방에 열지어 전진시켰고 몽골군은 그 뒤에 숨어서
쩐의 군대에 타격을 입히는데, 차크차크두의 군대는 강을 건너자 쩐 태종이 직접 지휘
하는 코끼리병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아유가 기마궁대로 코끼리의 눈과 피부에 화살
을 퍼붓자 쩐 왕조 군대는 주춤하기 시작했고 쩐 태종은 결국 노강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쩐 구옥뚜안은 사람들에게 음식은 파묻거니 숨겨두고 깊은 곳으로 피신하라 지시하는데...
결국 강을 건넌 몽골군은 수도 탕롱을 점령합니다. 하지만 보급선이 길어져 식량이
부족해진 몽골군은 베트남군의 청야 전술로 식량을 구하지 못하자 굶주렸고
쩐 태종이 군을 몰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기습을 가하자 몽골 군은 크게 패배합니다.
우량카타이는 잔여 병력으로 탕롱을 통제할수 없으니 화잉산(橫山)을 지나 운남으로 퇴각한뒤
남송을 공격하러 출발한 쿠빌라이와 합류했고 몽골 제국에서는 따로 2명의 사신을 보내
쩐 태종을 왕으로 봉했으나 침공 사실에 화가 난 쩐 태종은 사신을 결박한 뒤 내쫓는
데 6만 베트남군(+ 보급병 4만)이 5만 몽골군을 맞아 4만명의 몽골군을 몰살시킨 것입니다!
2차 대몽골 전쟁 : 쿠빌라이는 1259년 고려(高麗)의 항복을 받고 1278년 남송을 멸망시킨
후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와 다이 비엣(대월)을 정복하기 위해 선박을 모은
후에 1284년 7월 21일 9번째 아들 토곤(脫歡)을 진남왕(鎮南王) 겸 총사령관에 임명
하고 20만 대군으로 광동(廣東)에서 바다로 베트남 중부 점성(占城 참파)국을 공격합니다.
다이 비엣(대월)은 점성(참파)국을 돕기 위해 군대와 함선을 보냈지만 몽골군 수게투는 수도
도반(阇槃) 해안에 상륙한후 성채를 점거하니 국왕은 숲으로 도주하는데 점성국 정벌
은 북 베트남의 다이 비엣(대월)을 정복하기 위한 포석으로 점성을 점거함으로서
원나라군은 다이 비엣의 북쪽과 남쪽을 포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습니다.
대월은 수도 탕롱에서 회의를 소집하지만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점성국까지 점령한 원나라의
위세에 겁을 먹은 지방의 왕과 귀족들이 참석을 거부하니 1285년 12월 쩐 성종은
건홍전에 노인들을 모은 뒤 "우리가 응우옌(원)의 침공에 저항하겠는가?" 라고 물으니모두가
하나 되어 "싸우자!" 를 외치니 분위기에 이기지못해 지역의 왕과 귀족들은 지원군`을 보내옵니다.
흥도왕(興道王) 쩐 구옥뚜안은 병사들의 몸에 몽골인을 죽이자는 '살달(殺韃/삿탓)' 문신을 새기
게 하니 “적이 오면 목숨을 걸고 타격하고, 보이지 않으면 산 속에 숨은뒤 투항해서는
안 된다.” 조정에서는 쩐 구옥뚜안을 국공(國公)에 임명하니‘절제하여 천하의 여러 군을
통솔하며(節制統領天下諸軍) 군관을 택하고 장수를 통솔할 권리를 가진다(擇軍校有將才者分統部伍)“
쩐 구옥뚜안은 후퇴하면서 식량을 파묻거나 불태운뒤 일대를 텅 비워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작전을 채택하며 토곤의 1로를 막았고 2로는 나시르 웃 딘이 이끄니 운남(雲南) 에서
차이강(齋江)을 따라 오자 쩐 태종의 아들 소문왕(昭文王) 쩐 냣두앗이 맡았으며 3로는 점성국
을 정벌한 수게투가 이끌고 올라오니 원나라군은 30만~50만이고 베트남군은 20만~30만 입니다!
첫 전투 깔리(可里)에서 쩐 병사들은 패배했고 쩐 구옥뚜안은 반끼엡(萬劫) 으로 퇴각하니 쩐 끼엔
은 원나라군에 항복하고 매국노가 되는데 2월 11일 원의 장수 우마르가 수군을 이끌고
반끼엡을 공격하니 쩐의 함선과 격돌했고 쩐의 수군은 승리했으나 우마르의 수군이
쩐 구옥뚜안의 군대를 포위하자 쩐 성종이 원군을 보내 우마르 군대를 공격해 시선을 돌립니다.
쩐 구옥뚜안은 수도 탕롱의 홍강(瀧紅) 에 도달하니 원나라 군대는 즈엉강에서 쩐군과 마주치자
쩐의 군대는 퇴각했고 많은 선박들이 나포되니 토곤은 부교를 건설해 즈엉강을 건너
수도 탕롱으로 들어갔지만 청야작전으로 텅 빈 폐허 뿐인지라 토곤은 홍강 근처에
야영지를 세우고 망쿠다이는 육로로 우마르는 함선을 이끌고 다이 비엣의 황제를 추격합니다.
제 2로를 담당한 나시르 웃 딘의 군대는 차이강을 따라 투밧까지 나아가니 베트남 황제는 홍강
을 따라 티엔즈엉(天長)으로 후퇴했고 원나라 군대가 추격해 다막(沱幕)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쩐 빈쩡(陳 平仲)은 황제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600명의 병사`로 공격합니다.
원나라 측에서는 쩐 빈쩡의 결사대를 뚫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무려 6번이나 공격을
감행해야 했는데 원의 장군은 붙잡힌 쩐 빈쩡이 왕족임을 알고는 회유하기 위해 자신
들이 점령한 북쪽의 왕이 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나는 북쪽보다 주군이 계신
남쪽에 있기를 바라고 우리는 사로잡히면 죽을 뿐이다! 새삼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냐?"
그는 원하던대로 절개를 지킨채 26세에 죽음을 맞이햇으니 훗날 다이 비엣에서는 쩐 빈쩡이 의
를 지켰다고 해서 '보의왕(保義王)'으로 추대합니다. 팜 응우라오(范 五老)는 낭산에서
끊임없이 기습을 가해 원나라 군대를 지치게 만들었는데 예전에 원에 항복한 쩐 끼엔이
응우옌(원나라) 군을 이끌고 베보(衛布)를 급습하면서 쩐의 장수인 응우옌 탓텅을 사살합니다.
이때 소국왕(昭國王) 쩐 익탁이 원나라에 투항하자 쿠빌라이는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하는
데 타인호아에서 패배함으로써 쩐 인종은 황망히 달아나니 쩐 구옥뚜안은 큰 배로 원나라
군의 이목을 끌면서 작은 배를 타고 두 황제를 구한 뒤 바다로 해서 치응우옌(雉完)
으로 되돌아가자 토곤은 수게투 군대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추격하지 못합니다.
1285년 4월 7일, 수게투 군대가 진격하자 두 황제는 남쩌우강(南兆江)에서 배를 타고 피해
타인호아로 달아납니다. 북부에서 온 토곤의 원나라군은 맞지 않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인해 고생하기 시작했고 수게투가 우마르와 함께 쩐 황제
들을 추격했지만 찾는데 실패한데다가 풍토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니 추격을 중단합니다.
쩐 구옥뚜안은 4월 북쪽으로 돌아와 홍강의 원나라군 진지를 점령하고 탕롱 공격을 준비하는데
쩐 냣두앗은 함뜨(咸子)의 원나라 군을 공격하는중 자신의 부대에 옛 남송의 장수들이
있는 것을 활용해 남송 깃발을 함께 펄럭이며 공격하자 양양 전투에서 남송군의 저항에
시달렸던 수게투는 트라우마가 되살아 났는지 질색을 했고 남송 출신 장수들은 분발합니다.
한술 더떠 한인과 몽골인으로 혼합된 원나라 군대 사이의 유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오직 탓(韃/타타르)놈 들만 죽인다!" 고 외치면서 한인 출신의 장수들에게는 맞아도
전혀 무해한 종이로 만든 화살을 날려댔는데 남송 깃발과 종이 화살 작전은 전투
에 지쳐 있던 원나라군의 한인 장수 및 병사들은 전투에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됩니다.
1285년 6월 24일 쩐 구옥뚜안이 공격하자 수게투는 해안가로 달아났으나 사살되었고 기겁한 우마르
는 말을 달려 타인호아로 들어갔으며 한편, 쩐 인종은 수게투의 잘린 머리를 받게 되었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이군!" 이라고 감탄하며 입고있던 외투를 벗어 수게투의 머리를
감싼 뒤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는데 탕롱에 주둔한 토곤의 군대도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쩐 꾸앙하이는 북으로 진격해 응우옌(원나라) 군의 기지들을 점령하자 원나라군내 한인 병사
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니 쩐 냣두앗은 병력을 빼어 쩐 꾸앙하이에게 지원군으로 보내
주었고 원나라군을 피해 흩어져 있던 쩐군은 쩐 꾸앙하이의 진격을 보고는 합류함으로서
군대의 규모는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루터에 버려진 채 정박되어 있던 많은 원의 함선을 탈취합니다.
쩐 꾸앙하이는 홍강을 거슬러 올라가 원나라군을 공격해 전함을 불태우는데 수게투가 패해 퇴각
했다는 소식에 토곤은 군을 물리는데 1285년 6월 24일, 쩐 인종이 토곤의 군대를 공격하니
적장 장헌(張憲)을 사로잡은 뒤 길잡이로 삼아 서쪽의 원나라 군을 공격하자 원나라
군은 패배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우마르는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채 바다로 달아납니다.
쩐 구옥뚜안은 2만을 모아 홍강 북쪽 원나라 군을 공격하자 배를 구하지 못한 원나라 군은 필사적
으로 달려서 탈출해야 했으며, 원군 이항은 쩐군의 추격을 맡기 위해 후위에서 쩐 꾸옥니엔
(陳 國巘)이 이끄는 쩐군과 마주쳤으니 독화살을 맞고 토곤이 있던 투민으로 퇴각하던
중에 전사했으며 나시르 웃 딘이 이끄는 군대는 운남으로 철수하면서 베트남은 대승리를 거둡니다.
3차 대 몽골 전쟁 : 1258년 몽골의 제1차 침공과 1283년의 제2차 침공까지 두 번의 대월(越) 원정을
실패한 쿠빌라이칸은 분노를 삭힐 수 없으니... 기어이 1287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토곤등
10만 몽골군에 송나라 출신 수군을 합쳐 3번째로 침공하니 박당간 전투로 격전 끝에 물리칩니다.
박당강 전투 (Trận Bạch Đằng 陣白藤)는 1288년 오늘날 베트남 할롱만 근처 박당강에서
벌어진 원나라와 쩐흥다오가 이끄는 대월군 간의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대월이 승리함으로써 베트남 역사에서 외세에 대항한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쿠빌라이는 아들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0만에 가까운 정예군과 이외에도 2만 1천명
수군에 수백척 전선과 장문호 장군이 이끄는 수십만석의 식량을 운반할 선단도 갖추었는데 출병에
즈음하여 쿠빌라이는 토곤을 불러 “소국이라 하여 교지(交趾)를 만만히 보지 말라” 는 충고를 내립니다.
1288년 베트남은 오늘날 하노이에 해당하는 수도 탕롱에서 관민을 소개(疎開)한 후, 대월의 총
사령관 쩐흥다오 장군은 몽골군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박당강 근처에서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으니 박당강은 옌훙 지역과 투이응우옌 지역을 지나 바다에 도달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350년 전인 938년에 응오꾸옌(吳權)이 오대십국 중 하나인 남한(南漢)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전을 벌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1288년 3월부터 전투를 준비한 쩐응다오
장군은 응오꾸옌이 구사한 것과 같은 방식의 전술을 준비했으니 그는 조수간만의 차를
분석하여, 썰물 때 바닥에 말뚝을 심어두었으며, 복병을 배치하는 등 전투를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운남에서 출발해 수도 탕롱을 점령한 몽골군은 식량부족에 시달렸으니 보급 선단이 오지 않으니
토곤은 군대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고 반끼옙까지 퇴각시키자 이 때를 노려 베트남군은
몽골군이 장악한 지역들을 다시 탈환하기 시작하니 민병과 유격대들이 퇴각하는
몽골군을 괴롭혔고 상당한 손실을 입히자 토곤은 그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다시 퇴각합니다.
4월 초순 오마르가 이끄는 보급함대가 하이난을 지나 접근해 강을 거슬러 오르자 베트남군
은 다리와 도로를 파괴했고, 몽골군에 전투를 도발하는 가운데 몽골 수군(옛 송나라인)
이 박당강 근처에 도달하니 베트남의 소함대가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자
몽골 해군은 열심히 베트남군을 추적했으며 그들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듭니다.
둑에서 잠복하고 있던 대월 함대가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니 갑작스런 맹공에 몽골군은
패닉에 빠져 바다쪽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미리 심어놓은 말뚝과 목책에 많은 함선들이
침몰하기 시작했고 양 둑쪽으로 도망가려 했던 몽골군은 쩐흥다오 장군과 왕이 대기
시켜둔 대군과 다시 맞딱뜨려야 했으니 몽골 함대는 모두 전멸하고, 오마르는 사로잡힙니다.
해전에서의 완승과 더불어 육지에서도 대월군이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
를 대부분 전멸시켰으니 토곤의 군대는 랑선까지 후퇴합니다. 대월 이외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던 베트남 남부의 진랍왕국과 중부의 참파왕국은 쿠빌라이칸에 고개를 숙인
반면에 대월의 승리는 초강대국에 맞서 자주독립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새로 들어선 베트남의 호왕조는 1406년 명나라 대군의 침략에 패해 중국의 식민지 가 되었으나
1428년 레러이가 명나라 군대 몰아내고 레왕조를 세우는데, 1780년 청나라 20만 대군이
침공해 수도 탕롱을 점령해 독립을 위협했으나 1788년 베트남 중부 후에에서 왕위
에 올라 새로운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 는 청나라 대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지켜냅니다.
막강한 기마군단인 세계 최강 몽골군을 맞아 굴복하지 않고 오랜 기간 끈질기게 투쟁해
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나라가 둘 더 있으니... 45년간이나 싸운 송나라와 29년간
(실제 전투는 11년) 버틴 고려왕국 이니.... 전 세계는 작은 나라임에도 1차에서
9차 침공까지 29년간이나 끈질기에 항전하며 버틴 고려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칭송합니다.
1차 몽골 고려 침공 :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
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낸후 잘라이르부 출신 장수 살리타가
이끄는 3만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와 철주를 함락시켰는데 몽골군은 이때
투항한 고려 장수 홍복원 군사들과 함께 박서와 김경손이 지키는 귀주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20만명 몽골군 주력은 금나라로 진격했고, 고려를 침공한 3만 기병은 후방의 위협을 제거
하기 위한 것이니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직접 이끄는 본대 1만은 안주에 머물고, 북로군
1만은 북쪽 귀주성으로 보냈으며 남로군 1만은 개성으로 남진시켰는데 대월
(베트남) 을 침공한 40만에 비하면 적은 숫자니 고려 정복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9월 황해도의 황주와 봉산이 함락되자 고려 조정은 채송년이 이끄는 중앙군인 3군을 출격
시키게 되는데 9월 13일 몽골 남로군 8천과 고려 중앙군 2만이 야전에서 처음으로
맞붙는 장소는 교통의 요지 동선역이었으니 중간에 마산의 초적 3천명이 몽골군
측면을 습격하자 몽골군이 후퇴하니 고려군은 적 선봉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동선역에서 패배한 몽골 남로군은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가 있는 안주까지 퇴각했고
채송년이 이끄는 고려군은 안주의 안북성까지 진격을 하자 몽골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북성 서쪽과 동북방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 안북성을 포위하니 총사령관인
대장군 채송년은 몽골군의 핵심이 기병인 것을 아는지라 공성전을 대비할 것을 주장합니다.
좁은 고개에서 싸워 이길수 있었던 동선역 전투와 달리, 이 넓은 평야에서 싸운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며 완전히 패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으니 곽주성(郭州城)과
힘을 합쳐 몽골군의 전면 공세를 막아낸후, 몽골의 힘이 좀 빠지면 곽주성 병력이
몽골군의 퇴로를 막고, 안북성 병력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강경파가 반대하고 나섰고 우군진주(右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우리는 야전에서 몽고군
을 이겼는데 뭐가 무섭냐? 웅크리지말고 싸우자!" 라고 주장하니 목소리 큰 그의 말에 따라
고려군은 성 밖에 나가 진을 치게 되는데, 다른 진주(陣主)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는 성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고 이를 본 대집성은 병사들을 나두고 혼자만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1만 5천 몽골군은 고려군 2만이 성 밖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넓은 곳에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하자 지도부가 없는 고려 3군은 몽골군과 맞붙게 되었는데
몽골군은 말에서 내려 부대별로 대열을 지은후 이를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던 고려
우군에게 말에서 내린 몽골군 사이로 갑자기 기병들이 돌격해오자 고려군은 우왕좌왕 합니다.
우군을 구원하려던 고려 중군도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고려군은 겁에 질려 너나 할 것 없이
황급히 성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몽골군은 이 기세를 타고 추격해 공격했으니
이 때문에 절반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났고, 장군 이언문(李彦文),
정웅(鄭雄), 우군판관 채식(蔡識) 등도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니 전투가 아니고 학살이라?
고려 중앙군은 궤멸되어 전투수행 능력을 상실하니 살리타이는 극소수 병력만 안북성에 주둔시켜
동태를 살피게 하고 병력은 개경으로 내려보내자 고려 고종은 스님 3만명을 개경으로
불러모아 밥을 먹이며 기도를 시켰습니다.(親飯僧三萬 凡三日) 하지만 간절한 기도에도
부처님은 응답이 없고 개경에 도착한 몽골군은 흥왕사 등에 방화를 저지르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던 고려 조정은 회안공 왕정을 보내 살리타이에게 보물을 바치고 몽골과 강화
조약을 맺는데 채송년이 대집성의 말을 무시하고 성 안에서 버티며 저항만 했더라도 월남
을 침공한 몽골군이 40만인데 비해 고려를 침공한 병력은 3만이라는 아주 적은 숫자라...
귀주성도 버티고 있었으니 안북부와 곽주성이 건재했다면 제1차 몽골의 침공은 막았을 것입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백성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몽골군
이 철수한후 돌아온 관리들이 은그릇이 없어졌다며 성을 지킨 노비들을 처벌하자 반란
이 일어났으나 몽골격퇴의 공을 평가한 조정은 반란을 용서하는데 조정이 강화를 맺자
귀주성 박서도 항복했고 몽골군은 개경과 평안도에 감독관 다루가치를 72명 배치하고 철수합니다.
2차 몽골 고려 침공 :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무사정권의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다지니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남쪽을 공략합니다.
수군이 없는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해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는 고려의 김윤후 스님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는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
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북부 주현(州縣)의 거의 회복합니다.
3차 몽골 고려 침공 : 1235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면서 따로 당올태(唐兀臺)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치니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으니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때에 파괴되었습니다.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화도는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부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는데... 1238년 김보정(金寶鼎) 보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했는데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왕족 신안공 전을 왕제(王弟)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냅니다.
4차~5차 몽골 고려 침공 : 귀위크 칸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
하며 아모간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나 이때 몽골은 칸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 예케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
하니 동주(철원)·춘주(춘천)·양근(양주)·양주(양양) 을 공격한후 충주성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예케는 병으로 귀국하는 중에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햇지만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
하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하니 완전히 철병합니다.
6차 몽골 고려 침공 : 몽케 칸은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며 1254년 7월 자랄타이(車羅大)를
정동원수로 5천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니 전국을 휩쓸고 남하해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몽케칸의 명으로 군을 돌리는데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때 보다 심해 몽골에
잡혀간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라 했습니다.
7차 몽골 고려침공 : 이듬해 몽케 칸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
하여 대군을 보내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지만....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합니다.
8차 몽골 고려 침공 :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으니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을 알현
케 하여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킵니다.
9차 몽골 고려 침공 : 몽골은 끈질기게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으니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인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됩니다.
1259년 3월 박희실(朴希實) 을 사신으로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게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고려는 항복하였으며 그해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습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는데 이후
원나라가 고려에 원종의 입조와 군대파견을 요구하자 고려내에서 반원세력이 크게
힘을 얻고 임연을 중심으로 1268년 원종을 폐위시키지만 원나라가 군대를 파병하니
1270년 원종이 복위하면서 고려는 몽골에 90년 가까이 내정간섭을 받는 지배를 당합니다.
1270년에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는 완전히 복종했으며 무신정권 임유무가 처형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었으니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킨지 100년만으로 1259년에 원종
이 몽골에 입조할때 몽골에는 몽케 칸이 급서하고 왕위 계승을 놓고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유목계 본지파와 쿠빌라이가 이끄는 농경계 한지파(漢地派)가 대립하였습니다.
이 때 원종이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항복하였고 이것은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아리크부카를 물리치고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 라는 명을 내리니 이후 몽골이 고려를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고려는 이 세조구제를 들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몽골이 대월(베트남)을 침략한 병력은 1차 5만, 2차 30~50만, 3차 40만인데 비해 고려를 침공
한 숫자는 1차 3만, 6차 1만 그 외는 2만 정도로 보니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안군은 1차 때 안북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는 강화도에 숨어 내륙
으로 나오지 않으니 몽골군과 전투는 없었고 지방군이나 백성들이 성에 웅거하여 항전했습니다.
대월(베트남)은 국왕과 왕족에 귀족이며 장군등 지도층이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했고 특히 황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 나타나 원나라군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로하게 하고 적이
지치면 월남군이 기습하는등 모범을 보인 반면에 고려왕과 최씨 무신정권과 귀족들은
강화도에 숨어서 전투라고는 모른채 격구를 즐기고 잔치를 벌이는등 편하고 안락하게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