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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교과서
강 유 미
(서울대학교 부속 초등학교 6학년)
2년 전 오월이 다 지나가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아빠의 퇴직으로 인하여 갑작스런 여행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많은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나와 내 동생은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외가가 미국 LA에 있기 때문에 그 동안 엄마와 함께 한 여행은 여러 번 있었지만 아빠와 함께 가능 해외여행은 처음이라서 더더욱 신이 났다.
여름휴가 때도 시간이 짧아서 근사한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하시고 15년 넘게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셨던 아빠께서도 오랜만에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기대가 크신 듯했다.
커다란 가방 속에 필요한 옷들과 신발, 그리고 동화책 등을 챙겼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내 친구 쟈니에게 선물할 창작동화도 여러 권 샀다. '또 무엇이 필요한 걸까?' 1학기를 마치기 전에 떠나는 여행이라 학교 공부가 걱정되어 고민 끝에 교과서도 챙겨 넣었다. 짐이 많으니까 넣지 말자는 엄마와 아빠의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내 동생의 책과 함께 내가 메고 갈 가방에도 꼼꼼히 챙겨 넣었다. 뚱뚱해진 내 가방을 보고 엄마는 좀 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짐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비행기에 올라 가슴 설레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뉴욕에 사는 내 친구 쟈니네 집에 도착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시차 적응도 되고 쟈니와 서먹서먹했던 마음도 이젠 풀리게 되었다. 쟈니는 우리말이 무척 서툴렀다. 물론 나는 영어가 서툴렀지만 말이다. 쟈니는 내가 답답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런 쟈니가 답답했다.
"치, 자기는 한국 사람이면서 한글도 잘 모르고 잘난 척이야!"
나는 삐쳤지만 곧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내 동생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고 쟈니는 우리말을 잘 못하니까 내가 선생님 역할을 멋지게 해서 쟈니가 서툰 우리말을 잘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먼저, 1학년 읽기 교과서에 나오는 '너, 나, 우리'라는 단어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다음으로 그림을 보여주면서 '우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아기, 나'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었다. 쟈니는 조금 힘들어하는 듯 했지만 아주 잘 따라해서 난 선생님과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나는 쟈니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껴 매일같이 쟈니가 학교에서 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이번에 어떤 단어를 알려줄까? 하고 고민도 했었다. 또 쟈니가 오면 오늘 배운 것에 대해서 숙제를 내주면 쟈니가 숙제도 해오고 열심히 공부해서 받아쓰기 공부도 했다. 내가 마치 선생님이 된 것처럼…….
내 동생도 공부를 같이했다. 교과서 하나를 가지고 내 동생과 쟈니가 사이좋게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책표지 포장한 그대로 아주 빳빳했던 책이 열심히 공부하느라 많이 넘겨서 그런지 아주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교과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학기가 끝나 차곡차곡 책을 모아서 보게 되면 어쩜 그렇게도 교과서가 깨끗한지 아깝기도 하고 뭔가 무척이나 허전했던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비중이 컸던 영어 학원, 그리고 다른 학원을 갔다 오면 하루는 다 지나가 버리고 그렇게 교과서는 외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교과서가 큰 몫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내 친구 쟈니와 동생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활용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얼른 내 책을 꺼냈다. 아주 어른스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교과서를 치켜들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신 부모님께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달라진 우리 모습을 쟈니 부모님과 함께 연구하고 계셨다.
"아니,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말고는 들춰보지도 않던 책을 어쩜 저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
"그러게 말이야, 모두들 눈이 반짝반짝, 교과서가 쟈니의 선생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네."
쟈니 부모님께서도 국어 교과서를 활용해서 쓰기와 읽기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 무척 대견하고, 기특하셨던 모양이다. 교과서를 통해 선생님 역할을 톡톡히 한 나는 쟈니 아빠로부터 영어 동화책을 여러 권 선물 받았다.
너무 너무 의미 있었던 여행이었고 난 뚱뚱해진 내 가방 속에 넣어간 교과서가 너무 너무 고마웠다.
할머니와 교과서
조 연 경
(대전탄방중학교 2학년)
"할머니, 저 국어 책 좀 가져다주세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 도착해서 책가방을 열어보니 분명히 가방에 넣은 것 같은 국어 책이 없었다.
'어떡하지? 호랑이 선생님께서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
나는 부랴부랴 공중전화로 달려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는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그 시간이면 늘 할머니만 계셨다.
할머니는. "내가 글씨를 알아야제. 국어 책이 우째 생겼노?" 라며 걱정을 하셨다.
나는 대충 국어 책의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설명했고 전화는 끊어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학교 정문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만치서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가 그 날처럼 반가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손에 뭔가가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는 국어 책을 찾으신 게 분명했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반갑게 부르며 달려갔고, 할머니는 내게 책을 내미셨다.
"이거 맞제? 내 얼매나 찾느라 고생했다고…一. 우리 강아지, 한참 기다렸나?"
할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땀을 닦으셨다. 내가 기다릴까봐 뛰어 오신 때문이리라.
'아!'
그런데 할머니께서 내게 건네주신 책은 국어 책이 아니라 사회 책이었다. 순간, 눈앞에 호랑이 선생님의 성난 얼굴이 스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할머니께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국어 책도 못 찾아? 나 어떡해. 벌 받는단 말이에요!"
그 때까지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계시던 할머니는 가져온 책이 국어 책이 아닌 걸 알고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우짜겠노! 미안타. 내 다시 갔다 오꾸마."
할머니는 땀 닦던 일을 멈추시고 집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이미 늦었어. 이제 수업 시작하는데 뭐!"
나는 할머니의 말에 퉁명스러운 대답을 하고는 쌀쌀맞게 돌아서 버렸다. 사실 국어 책을 가져오지 않은 건 나였으니까, 할머니가 잘못한 건 없었는데도 나는 할머니께 화를 낸 것이었다. 돌아서서 교실로 들어오면서도 나는 줄곧 책을 가져오지 않은 나를 반성하기는커녕 글씨를 알지 못하는 할머니를 원망했고,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서 우리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엄마도 원망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평생을 글씨도 모른 채 불편하게 사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가끔씩 상품에 써 있는 설명서를 몰라서 물어보시며
"에그. 내도 한글이라도 쪼매 배웠으마 얼매나 좋겠노. 이 놈의 까막눈 신세, 답답해 죽겠다!" 라고 하실 때면 무심코
"할머니, 한글 배우면 되지요? 그거 아주 쉬워요."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던 것도 반성이 되고,
"아이구, 할머니는 그것도 몰라요?" 라면서 버릇없이 굴었던 내 모습도 후회가 되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는 내 눈치만 살피셨다. 혹시라도 선생님께 벌을 받지나 않았는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내 표정을 살피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또 나대로 쑥스러워서 할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날 밤,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내 방에 들어오셔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연경아! 니 책 좀 보이 줄래? 할매가 글씨 공부를 쫌 해야겠다. 니 심부름도 잘 해주야겠고 할매도 답답해가 안되겠다." 이러시는 게 아닌가?
그랬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내게 미안하다는 생각만 하고 계셨던 것이다. 철없이 할머니께 화를 내고 돌아선 손녀를 미워하기는커녕 책을 제대로 가져다주시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마음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모르는 채로 살았던 한글을 배우겠다고 내게 교과서를 좀 빌려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내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나는 고작 선생님이 내리시는 벌이 두려워서 할머니를 원망하고 화를 냈던 것이 너무나 죄송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나는 할머니에게 안겨 한참동안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게 책을 가져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부터라도 할머니가 글씨를 아셔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그래, 바로 그거야!"
할머니와 나는 그 날 이후로, 하루에 한 시간씩 교과서를 이용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기본이 되는 글씨를 알려드리고 나서 내가 학교에 간 사이 할머니는 그 글씨를 암기해 놓으셨다가 시험을 보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좀 힘들어 하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는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시며 때로는 귀찮을 정도로 공부 시간을 기다리셨다. 할머니는 그만큼 공부에 굶주려 계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는 날이다. 학교에서 돌아 온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현관 입구에 붙어있는 메모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연경아, 문 잘 잠그고 있어라. 할머니 장에 간다"
'세상에!'
비록 글씨는 아직 비뚤비뚤하였지만 틀린 글씨 하나 없이 써 놓으신 할머니의 메모지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이제 우리 할머니는 가끔 신문도 보고 간단한 편지도 쓰신다. 그러면서 우리 손녀딸이 내 선생님이라고 동네에 자랑도 하신다고 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약 봉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라며 소녀처럼 웃으시는 할머니를 뵈면 나는 우리 할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어쩌다 내가 할머니께 보물 1호가 무어냐고 여쭈어 보면 우리 할머니께서는 손자, 손녀 다음으로 4학년 국어 교과서를 꼽으신다. 아마도 할머니를 문맹에서 구제해 준 귀한 책이기 때문이리라. 책장에 아직도 귀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국어 교과서를 볼 때면 할머니와 나를 연결해준 또 하나의 귀한 고리 같아 내게도 그 교과서는 귀한 보물임에 틀림없다.
"연경아! 니 시간있으마 올 여름에는 내한테 영어도 좀 가르쳐 줄래?"
이제는 한글을 넘어서 영어까지 가르쳐 달라고 우리 할머니는 틈만 나면 요즘 내게 뇌물 공세를 펴신다. 나는 그렇게 젊게 사시는 우리 할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할머니, 사랑해요. 그리고 교과서야 고마워!"
나의 길잡이
이 재 림
(영주 영광여자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를 다니던 때의 이야기다. 신학기가 시작되던 3월 초의 어느 날, 책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평소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을 사기 위해 시내 서점에 갔었다. 이 책 저 책 두리번거리며 책을 고르던 나는 무심결에 주위를 살피다 유난히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몰려있는 코너에 눈을 두게 되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코너로 발걸음을 옮겨 아이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곳엔 수많은 종류의 문제집과 자습서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의 자습서와 문제집들은 나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이것도 봐야 할 자습서 같고 저것도 풀어야 할 문제집인 것 같았다. 어디선가 한번쯤 이름 들어본 것만 같고 친구들 한 두 명이 가지고 있는 문제집도 눈에 띄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나는 몇 권의 문제집과 자습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아차'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책을 다시 내려놓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 간다고 해도 어차피 다 풀지 못할 것을……. 괜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매번 되풀이되는 충동구매의 유혹을 뿌리치느라 헛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빈번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처음 교과서를 받았을 때의 그 설렘과 기쁨을……. 예쁜 강아지 인형도, 소꿉놀이 장난감도 다 밀쳐내 버리고 새 교과서가 어느 새 내 보물 1호가 되었던 그 시절이. 그 시절, 내 손엔 항상 교과서가 쥐어져 있었다. 옆집 미경이네 갈 때도, 명절 때 할머니 댁에 갈 때도. 나도 이제 학교에 다니는 귀하신 몸이란 걸 뽐낼 수 있는 내 신분 상승의 유일한 증거물인 양 난 교과서를 늘 끼고 다녔었다. 겉 표지에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와 반, 번호, 이름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던 그 책. 항상 동거동락하던 나의 친구, 그것은 내게 말 그대로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잠시. 어느 날부터인가 교과서는 더 이상 내게 가슴 벅찬 보물이 아니었다. 때론 방바닥을 뒹구는 천덕꾸러기로, 때론 겉장 한 귀퉁이가 찢겨져 나간 기형으로, 또 때론 온 얼굴 가득 낙서로 얼룩진 볼품 없는 모습으로 내게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아끼고 소중히 다루던 교과서에 내 손으로 낙서를 하고, 내 손으로 내팽개치고, 내 손으로 칼자국을 남겼다.
교과서는 점점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과서를 펴기만 하면 밀려오는 졸음에 시달려야 했고, 공부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나는 교과서만 보면 오르지 않는 성적과 부모님에 대한 죄송스러움, 부담감에 짓눌렸다. 그러면서 시험기간에는 언제나 문제집부터 찾았고 내 책상 위엔 항상 이름 있는 출판사의 자습서가 놓여 있었다. 유난히 공부가 안 되는 날엔 한 권 두 권 사 두었던 문제집은 손도 대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내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할 만큼 쌓여만 갔다. 나는 마치 알코올 환자가 중독적으로 술을 찾는 것처럼 문제집에 집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친척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집엔 척추장애를 가진 고등학생 언니가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보니 바로 교과서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볼 게 많다고 저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나…. 시시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그 언니가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애 때문에 학원 공부는커녕 학교 공부도 온전히 할 수 없었던 그 언니의 대학 입학은 내게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찌릿해짐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 가슴 뭉클한 감동이 되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동시에 그 때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그 언니의 밝게 빛나던 해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언니는 장애 때문에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교과서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읽고 또 읽었단다. 그렇게 공부했다고 했다. 그 언니에게 있어 교과서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학교이고, 선생님이었다. 또한, 꿈이고 희망이었던 것이다. 온전한 몸으로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였다. 앞으로의 미래를 마음껏 펼치고 열어볼 수 있는 빛이고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내 방 책꽂이에 쓸쓸히 자리하고 있는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 언니처럼 내 꿈과 희망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코흘리개 적 느꼈던 가슴 벅찬 설렘이 내 가슴속에서 다시 되살아남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잊고 지냈던 오래 전 소꿉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움과 기쁨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 때부터 나의 공부하는 태도는 변하게 되었다. 시험공부를 할 때에는 항상 교과서부터 정독을 했고 모르는 부분은 다시 읽어보았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으면 참고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난 후 문제집을 풀어보아, 내게 부족하고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을 다시 한번 더 보강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난 후 시험을 치렀다. 그렇게 많은 문제집을 풀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성적이 눈에 띄게 많이 향상되었다. 교과서의 내용을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든 후에는 같은 문제를 계속 틀리지 않았으며, 이 문제집 저 문제집 이리저리 옮겨가며 문제만 많이 풀고, 정작 그 문제를 내 것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어느 새 교과서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훌륭한 스승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교과서는 나에게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열어 줄 길잡이가 되어 나와 함께 숨쉬고 생활한다. 때때로 지치고 힘들어 방향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맬 때도 내 소중한 교과서는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 없는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며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기숙사 열람실 내 작은 책상 위에 한 모퉁이에서, 어둠 속을 밝혀주는 한 자루의 촛불처럼 내 지친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험난하고 고단한 가시밭길일 것이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벗어나고만 싶은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입시전쟁……. 나 또한 앞으로 3년, 지옥 같은 입시전쟁을 이겨낼 것이다. 흔들림 없이 쉼 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이끌어 줄 내 소중한 교과서와 함께.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결코 꺼지지 않는 강한 촛불이 되어 내 머리를 지혜로 채워주고 내 가슴을 희망으로 색칠해 주리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밀려드는 졸음과 싸우며 한 권의 교과서를 꺼내 든다.
내 꿈이 담겨 있는, 내 미래가 담겨 있는 교과서를…….
타다만 교과서
강 철 오
(밀양밀성여자중학교 교사)
나른함이 온몸을 휘감고 도는 오월의 오후, 미희에게 오늘 배울 단원을 읽도록 해 놓고 교실을 한 바퀴 돈다. 오늘도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은 아이가 대여섯이나 된다. 교과서 없이 수업을 받는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핏대를 세워 보지만, 소귀에 경 읽기다. 책이 없는 녀석은 수행평가 수업태도 점수에 반영하겠다는 엄포도 약발을 잃었다. 어차피 두어 달 뒤면 버려질 책이라고 생각해서일까? 하도 교과서 검사를 철저히 하는 바람에 '교과서'라는 별명까지 얻은 내 시간이 이럴진대 다른 시간은 오죽할까.
새 책 받고 서너 달만 지나면 열에 한 두 명은 교과서를 잃어버린다. 더 한심한 것은 잃어버리고도 찾을 생각을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실에 교과서가 굴러다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가방이 무거우면 제일 먼저 덜어내는 게 교과서다.
이것도 공교육이 홀대받는 한 단면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니다. 분명 그런 면이 있다. 과외금지 조치가 풀리고, 사교육 열풍이 불면서 교과서는 아이들의 조롱거리로 희화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심심풀이 땅콩 삼아 교과서 제목들을 기상천외한 말들로 뒤바꿔 놓았다. '국어'를 '북어, 굶어, 붕어, 궁예'로, '음악'을 '옴약'으로, '미술'을 '마술'로, '과학'을 '광약'으로, '영어'를 '병팔이'로, '수학'을 '수박'으로.
언젠가 수업 시간에 참고서를 펴놓고 있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가 황당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 참고서 갖고 수업하면 안 돼요? 학원에선 그렇게 하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교과서는 참고서 보조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주객전도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유난히 교과서를 챙기는 사연을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얘들아, 옛날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아이들은 갑자기 웬말이냐 싶어 눈을 동그랗게 쳐다보더니, 한 목소리로,
"예∼".
하고 교실이 떠나가라 외친다.
옛날 그러니까 너희들 부모님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일 거야. 어느 시골에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어. 뒤주에 쥐도 안 끓을 만큼 집이 가난했지. 큰집에서 얻어 부치는 논밭 몇 마지기가 전부인 처지에 형제는 무려 4남4녀였으니 어련했겠어? 그래도 여학생은 운이 좋았지. 여섯째로 태어난 덕에 그나마 중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여자가 말이야.
위로 언니 셋은 겨우 초등학교만 마치고 일찌감치 도회지로 돈을 벌러 나갔지. 여학생이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언니들 덕분이었어. 힘든 객지 생활하면서 공부 못한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언니들이 동생들을 고등학교까지는 시키려고 했던 거야. 여학생도 언니들의 눈물 젖은 바람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어. 전교 10등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둔 가을이었어. 모든 농사일을 사람 손에 의지하던 그 시절 농촌의 가을은 부지깽이도 일어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빴어. 그래서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도 일년에 두 세 번은 일손 돕기 가정실습이란 걸 했지. 난 중·고등학교 시절 농사일 거든다고 결석한 적도 여러 번 있어.
그렇게 바쁜 농사철에 여학생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한다고 늦게 들어오곤 했어. 여학생의 아버지는 그런 딸아이가 영 못마땅했어.
하루는 등교하는 딸아이 등에다 대고 대못을 박듯 고함을 쳤어.
"오늘도 또 늦었단 봐라. 그때는 내가 가만 안 둘테니."
아버지의 목소리엔 서슬 퍼런 노기가 실려 있었어. 그런데도 여학생은 걸음 한 번 안 멈추고 휑하니 집을 나섰지. 오히려 지켜보는 동생들 간이 바짝 졸아들었어.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남동생은 수업을 마치고 이웃 중학교 교문에서 누나를 기다렸지. 누나가 오늘 또 늦었다가는 아무래도 큰 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거야. 그러나, 마치는 종이 치고, 동네 누나들이 다 나오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누나는 끝내 나오지 않는 거야. 남동생은 애가 타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어.
그 날은 벼 타작을 하는 날이었지. 장정 두 사람이 붙어 서서 연신 발로 밟아가며 돌리는 탈곡기가 당시로선 최신식 농기계였어. 벼이삭을 털고 난 짚단을 논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쟁이면서 남동생은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어. 누나가 언제나 모습을 보일까, 눈길은 한길 쪽을 향해 열려 있었지. 그러나 결국 누나는, 서쪽 하늘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어.
여학생이 나타난 건, 일을 끝낸 식구들이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어. 발걸음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모를 뻔했지.
"야 이년아, 학교가 그렇게 좋으면 집에는 뭣하러 들어와! 니가 그러고도 아가리에 밥이 들어갈 것 같아?"
아버지는 맨발로 마당으로 내달았어. 그리고는 책가방을 낚아채 소죽솥 아궁이로 달려갔지. 소죽을 끓이느라 훨훨 타고 있던 장작불이 여학생의 가방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어. 고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 어머니가 불길을 헤치고 허겁지겁 가방을 꺼냈어. 여학생은 눈사람이 녹아 내리듯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지. 아버지는 그 길로 나가, 어머니 말에 의하면, 술에 곤죽이 되어 새벽녘에야 돌아왔어.
남동생은 누나의 교과서를 한 권 한 권 추스르기 시작했어. 조심스레 이물질을 떼어내고, 칼과 가위로 불탄 부분을 오려내고…. 다행히 완전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어. 교과서 곳곳에 배인 누나의 공부 흔적들이 시꺼먼 재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남동생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 내년에 중학생이 되면 공부 잘하는 누나 책으로 공부하리라 다짐했던 자신의 꿈이 허사가 되어 버린 것도 마음 아팠고. 그런데, 정작 큰 일은 그 다음 날 벌어졌어. 멀쩡히 아침밥까지 챙겨 먹고 나간 여학생이 가출을 해 버린 거야.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안 오길래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같은 학년에 다니는 동네 여학생이, 순애가 오늘 왜 결석을 했는지 담임 선생님이 집에 한 번 가보래서 왔다는 거야.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친한 친구들이 다 찾아다니며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어. 이튿날 남동생은 누나 책상 서랍에서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발견했지.
아버지, 전 이제부터 이 집 딸이 아닙니다. 찾지 마세요.
엄마, 미안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학생으로 뽑혀서 학비 걱정 덜어 주고 싶었는데….
철오야, 내 교과서 손질해 줘서 고마워. 니 정성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할게.
남동생은 이 편지를 어머니한테 드렸지. 잠잠히 편지를 읽고 난 어머니가 말했어.
"아무한테도 편지 이야긴 하지 말거라."
남동생은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어. 당연히 아버지한테 보여 드려야 하는 거 아니겠어? 어때, 너희들은 이해가 가니? 오, 그래. 은선이가 잘 말해 주었구나.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 주지 않기 위해서였지. 정말로 아버진 이 일로 몹시 괴로워하신 것 같아. 돌아가시는 순간에야 감추고 지냈던 아픔을 토해 내셨지.
"모질고 독한 년, 내가 어떻게 해서든 고등학교까지는 시킬 작정이었는데…."
여학생이 집을 나가고 4년 가량 뒤,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뜨셨지. 임종을 앞두고 애타게 찾는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집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은 안타깝게도 아버지와의 화해 기회마저 영영 놓쳐 버렸어.
나중에 거처를 안 어머니가 아버지 살아 생전에 한 번 다녀가라고 목을 매는데도 황소 고집으로 버티던 여학생을 두고 사람들은 '모질고 독하다'고 입을 모았지. 하지만 남동생은 누나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 교과서와 함께 시꺼멓게 타버린 마음이 다시금 새하얘지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그 동안 여학생은 서울 어느 산업체 야간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려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고 있었지.
"선생님, 산업체 학교가 뭐예요?"
"응, 일하면서 배우고 싶어하는 근로 청소년들을 위해 큰 공장 같은 데서 운영한 학교야.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세월이 흘러 남동생은 교사가 됐지. 여학생은 누구보다 남동생이 교사가 된 걸 기뻐했어. 왜냐하면, 자신도 교사가 되고 싶었거든. 교사가 되어 처음 만났을 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학생은 장롱 위에서 웬 종이상자 하나를 내려놓았어. 거기엔 타다 만 교과서들이 퀴퀴한 먼지 냄새를 풍기며 가지런히 누워 있었지.
"이런 걸 뭣하러 지금까지…."
남동생은 숨이 턱 막히면서 울대가 조여와서 말을 잇지 못했어.
"객지 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걸 보면서 이를 악물었어. 재를 털어 내던 그 여린 손이 어느 새 이렇게 컸네?"
남동생의 손을 거머쥐는 누나의 손등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어.
"어때, 재미있어?"
"슬퍼요."
그러자 아이들이 일제히,
"맞아요∼." 한다.
"이야기 속의 남동생이 선생님 맞죠?"
미선이의 물음에 나는 엷은 웃음으로 답한다. 시계를 보니 수업 시간의 절반이 훌쩍 지나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수업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게 어찌 교사이랴. 아이들이 그 어느 수업 시간보다 진지한 태도로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얘들아, 오늘날 너희들에게 국어 교과서는 한 학기만 쓰고 나면 폐지 신세로 전락하는 책에 불과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애틋한 삶의 무늬를 아로새기기도 한단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이 새삼스럽다는 듯 교과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애정 어린 눈길로.
심사를 마치고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 공모한 교과서 수필 공모 행사가 올해처럼만 풍성하면 좋겠다는 내 심정에 모든 심사위원들이 동의를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번 공모전은 기분 좋은 행사입니다. 먼저 응모 작품편수가 지난해에 비해 많이 늘었다는 점이 그렇고, 일반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늘었고, 글의 수준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교과서에 얽힌 추억을 읽어보니 왜 이렇게도 사연이 많은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정말 다양하구나 싶었습니다.
교과서를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격찬하는가 하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고 노래한 글을 대하는 순간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과서 공부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 수준 높은 글도 적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배제한 채 참고서와 과외공부에만 매달렸다가 상급학교 진학 시험에서 낭패를 본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일반인들의 글에는 역시 감동과 삶이 녹아나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여수ㆍ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큰형이 죽고 바로 위의 형과 함께 학교에 입학하여 교과서 한 권으로 같이 공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교과서라는 소재를 통해 담아냈지만, 이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속내 이야기를 ‘교과서’라는 매개체를 통해 줄줄이 토해낸 수필 응모자들의 풍요한 정신세계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러한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나마 가슴 속에 서린 추억을 올곧이 펴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교과서연구재단은 교과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재단입니다. 따라서 이런 유익한 행사를 통해서 교과서에 대한 일반인과 학생들의 관심을 제고하는 노력을 앞으로도 계속 기울여 주시기를 바라며 심사평에 갈음합니다.
2005. 10.
제3회 교과서 관련 수필 공모 심사위원회
위원장 한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