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천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해적(海賊)들은 감히 우리 배에 접근(接近)하여 공격(攻擊)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우리는떼 데움(Te Deum)을 불렀습니다. 그러니 이웃 배들의 선원들에게 발각될까봐 작은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날이 저물자 우리는 수백 척의 배가 모여 있는 정박지(碇泊地)로 들어갔습니다. 관례(慣例)에 따라, 군인(軍人)들이 와서 임검(臨檢)을 하고 정박세(碇泊稅)를 받았습니다. 뱃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야 할 것을 이내주고, 우리가 당한 일을 기다랗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당한 위험(危險)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이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밤이 되자, 그들은 임검(臨檢)을 하지 않고 물러갔습니다. 조금 뒤에 해적(海賊)들이 정박소(碇泊所) 입구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감히 어쩌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길을 떠났을 때에 세 번째로 그 해적(海賊)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항(同航)하는 50척 가량의 배와 같이 갔으므로, 해적(海賊)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얌전하게 물러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후로는 다시는 우리를 귀찮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12월이었는데, 이 무렵에는 도둑이 흔하고, 벌도 그다지 엄하지 않습니다. 관리(官吏)들은 겁도 나고 마음도 약하고 해서, 또 어쩌면 일종의 미신(迷信)으로, 이런 지나친 일들을 눈감아 줍니다.
그러나 날씨는 여전히 좋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물이 나는 이 여행(旅行)이 마침내 끝나기를 위하여 기원(祈願)을 하는데, 복건주교(福建主敎)님 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일찍 도착하지 않도록 기도(祈禱)를 드렸습니다. 주교님은 우리 배가 태수(太守)의 명령으로 푸간(Fougan) 포구(浦口)에서 붙잡혀 대만(臺灣)으로 보내질까 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3월 1일에 포구(浦口)에 닿았는데, 그때 대만(臺灣)의 반란(反亂)이 진압(鎭壓)되었다고 공식으로 보도(報道)되었습니다.
복건주교(福建主敎)님이 우리들과 그중에서도 내게 베풀어주신 애덕(愛德)은 이루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행꾼까지 합해서 14명이나 주교관(主敎館)에 머물렀으며, 그중 몇 사람은 여러 달 동안을 묵었습니다. 주교(主敎)님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너그럽게 마련해 주셨고, 우리가 안전(安全)하게 여행(旅行)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의 이 너그러움은 우리에게 대해서 뿐만 아니고, 우리보다 먼저 지나간 선교사(宣敎師)들과, 우리 뒤에 온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은 도움을 주셨고, 그들에게 당신 교구(敎區)로 경유(經由)해 가라고 청하기까지 하십니다.
이렇듯 고귀(高貴)하고 가톨릭 주교(主敎)다운 행동으로, 그분은 포교성성(布敎聖省)의 찬사(讚辭)와 감사(感謝)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별로 부유(富裕)한 것도 아닙니다. 별로 많지 않은 재력(財力)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주교님이 그렇게 많은 비용(費用)을 쓰시는 것을 보기가 대단히 민망스럽다고 말하면, 그분은 그저
천주께서 안배하실 겁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3월 9일, 모방(Maubant) 신부가 와서, 사천포교지(四川布敎地)를 포기(抛棄)하고, 나를 따라 조선(朝鮮)에 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교섭(交涉)을 받고 놀랐으나, 책임(責任)을 지고 싶지가 않아서, 둘이 복건주교(福建主敎)님과 상의(相議)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계획(計劃)에 대한 찬반(贊反)의 이유(理由)를 듣고 난 주교(主敎)님은, 모방(Maubant) 신부가 조선(朝鮮)에 가는 것이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어느 면으로는 필요(必要)한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목적지(目的地)의 변경(變更)을 허락(許諾)해 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사천주교(士擅主校)님께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편지(便紙)를 그 지방으로 떠나려던 참이던 보행꾼에게 맡기고, 모방(Maubant) 신부는 바로 그날로 우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가 맡아가지고 있는 복건(福建)의 소교구(小敎區) 힝화(Hing-hoa)로 떠났습니다. 여러 해째 서양인(西洋人)을 하나도 보지 못했던 강남지방(江南地方)에 서양인 여럿이 별안간 나타나면, 박해(迫害)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므로, 내가 먼저 가고, 모방(Maubant) 신부는 얼마 후에 나를 따라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년 3개월 후에 나는 사천교구장(四川敎區長) 시니뜨(Sinite) 주교(主敎)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주교님은 편지에 이런 말을 섰습니다.
조선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모방(Maubant) 신부가 우리 포교지에 와서 그의 열심을 발휘하여 주면 좋긴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가 당신을 따라가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왕(王) 요셉도 기꺼이 당신께 보내드립니다.
4월 12일, 강남(江南)으로 떠날 차비를 차려야 한다는 소식(消息)이 왔습니다. 짐을 꾸리고 돈 회계(會計)를 해보았더니, 은화(銀貨)로는 꼭 260 프랑이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가 통용(通用)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 안 되는 돈을 가지고, 7,8 천리나 되는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나는 보행꾼을 마카오로 다시 보내며, 통용(通用)되지 않는 돈을 바꿔서 새 돈으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보행꾼도 돈도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23일, 우리를 남경(南京)으로 데려다 주기로 되어있는 배에 올랐고, 27일에는 닻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항해(航海)는 지난 번 보다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짙은 안개가 끼어, 4,5백 미터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항(同航)하는 배들은, 대통을 불어 서로 신호(信號)를 하여, 너무 멀리 떨어져서 해적(海賊)의 손에 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어둠 속에서 미처 암초(暗礁)를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衝突)할까봐 닻을 내려야 하였습니다. 2월부터 5월 말까지 이곳의 바다는 짙은 안개가 뒤덮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면 하늘이 대단히 맑아져 먼 데 있는 물건(物件)도 잘 보입니다. 이것은 라 ․ 뻬루즈(La Perouse)가 관찰(觀察)한 것인데, 나도 그와 비슷한 것을 관찰한 것입니다.
5월 6일, 해가 채 돋기 전에 우리의 배는 사주(砂洲)에 올라앉았습니다. 다행이도 바람이 약하고, 우리의 곤경(困境)을 눈치챌만한 해적(海賊)도 근처에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이 곤경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로(水路)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0일과 11일에는 우리가 발견되었고, 또 아마 서양인(西洋人)으로 알려진 모양이어서, 세 사람이 배에 왔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은 우리를 실컷 보려고, 내 동료 중의 한 사람이 숨어있던 선실(船室) 문을 열었습니다. 내 동료는 이런 무례(無禮)한 호기심(好奇心)에 약간 마음을 상하였습니다마는, 담대한 사람인 우리 배의 선하감독(船荷監督)은,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고 우리를 안심(安心)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이 불측(不測)한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뱃길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못된 계획(計劃)을 실행(實行)에 옮길 시간이 없었습니다.
12일에는 우리는 절강성(浙江省)의 북쪽에 있는 햐푸(Hia-pou)라는 포구(浦口)에 닿았습니다. 조금 후에 우리는 상륙하여 배를 세내어 가지고, 강남(江南)의 맨 남쪽에 있는 도시(都市)의 하나인 샹난푸(Chang-nan-fou)까지 갔습니다. 우리 배의 주인은 우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의 이상한 얼굴, 짐짓 침묵을 지키는 것, 조심해서 숨어있는 것 따위가 그의 의심(疑心)을 자아냈던 것입니다. 읍내(邑內)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저어가기를 거절하며, 우리들과 동행(同行)하던 중국인 의원(醫員)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아편장사 하는 영국인들을 내 배에 데려 왔구려. 당신이 조심하지 않은 탓으로 내가 붙들려가게 되었소.
의원이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배 주인은 우리가 밀수(密輸)를 하는 서양인(西洋人)인줄로 계속 믿고 있었습니다. 몇 백량의 돈을 그의 손에 넌지시 쥐어주게 하였더니, 그제부터는 우리가 영국인(英國人)도 아니고, 밀수(密輸)를 하는 서양 인(西洋人)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낮에 약방(藥房)을 하는 교우(敎友) 집으로 들어갔는데, 일행은 복건(福建)에서 성품(聖品)을 받은 젊은 포르투갈 선교사(宣敎師)와 젊은 중국인(中國人) 신부(神父)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었습니다.
내 눈이 파란 빛이므로, 나는 검은 사(紗)로 된 마스크로 가리니, 눈섭과 코도 대강은 가려졌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느라고 이런 마스크를 하고 다닙니다. 파란 눈, 큰 코, 노란 머리, 갸름한 얼굴, 벌건 얼굴 따위는 중국에서는 수상하게 보는 것들입니다. 머리가 크고 둥글고, 얼굴이 넓적하고, 눈썹이 별로 많지 않고 두드러지지도 않고, 눈이 작고 검고, 무섭게 팽팽하게 생긴 선교사(宣敎師)로서, 더구나 관화(官話)를 웬만큼 할줄 안다면, 안전(安全)하게 여행(旅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 모양이나 얼굴 모습이 성소(聖召)를 주는 것은 아니니, 이런 특징(特徵)만을 따지는 것 보다는 천주성령(天主聖靈)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선교사(宣敎師)로서의 도덕적(道德的) 특성(特性)을 중요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의 섭리(攝理)에 우리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슬기의 규칙을 소홀히 하여도 안 됩니다. 천주께서는, 원하시는 때에는 외교인(外敎人)들의 눈을 가리어,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게 할 줄을 아십니다. 또 발각되었을 경우에도 좋지 못한 결과(結果)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특히 돈이 있 어 밀고인(密告人)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