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고 옥한흠 목사
“죄 얘기하고 십자가 얘기하면…예배 싸늘해졌다"
[백성호의 예수뎐]
예수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 21절)
골고다 언덕에 못박힌 십자가의 예수 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만약 “주여! 주여!”만 외치다가 하늘나라에 간다면 어찌 될까. 우리는 과연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나의 속성’과 ‘천국의 속성’이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예를 들어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이 있다고 하자. 그 기름은 바다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름은 제아무리 바다 한가운데 떠 있어도 바다의 삶을 살 수가 없다.
(22) 고 옥한흠 목사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 지적…예배 분위기 사늘해져”
천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여! 주여!”만 외치다가 천국에 갔다고 하자. 나는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이 된다. 나의 속성과 천국의 속성은 여전히 다르다. 바다 위에 뜬 기름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과연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예수는 수차례 강조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속성’을 체화하라고 말이다. 이를 통해 나의 속성을 바꾸라고 말이다. 그렇게 천국의 문을 지나오라고 말이다.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에 있는 예수상. 재판을 받고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처형장으로 향했다.
고(故) 옥한흠(1938~2010) 목사는 복음주의 영성을 지향했다. 생전에 그는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대표 설교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지적하면 예배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집니다.”
이 말끝에 옥한흠 목사는 “이놈이 죄인입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됐다”라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옥한흠 목사는 개신교계 안팎에서 지금도 깊이 존경받는 목회자다. 그의 목회와 설교는 늘 ‘십자가’를 찾았다. 서울 강남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교회(사랑의교회)를 일군 뒤에도 ‘십자가 설교’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 그도 “죄를 얘기하고, 회개를 얘기하고, 십자가를 얘기하면 성도들이 불편해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주일 설교에서 ‘자기 십자가’가 점점 빠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고 옥한흠 목사는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다. 그가 개척한 사랑의교회는 강남에 있으면서도 강남의 교회와 다른 면모가 있었다. [중앙포토]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다. 예수는 아예 ‘좁은 문(the cramped gate)’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그 문으로 가라고 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복음 7장 13~14절)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문은 늘 좁다. 문만 좁은 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길도 험하다. 그래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사람들은 더 넓은 길을 좋아한다. 왜 그럴까. 굳이 자신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둔 욕망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을 찾는다.
예수가 말한 문은 좁다. 그곳을 지나려면 뭔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무게를 줄이고 가벼워져야 한다. 그래야 지나갈 수 있다. 그렇게 무게를 내려놓는 방식이 ‘자기 십자가’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우리의 눈에는 온통 가시밭길이다. 예수가 말한 ‘좁은 길, 좁은 문’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굳이 그 길을 택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사서 고생일 테니. 그래서 넓은 길을 좋아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매끈한 포장도로와 넓은 문을 좋아한다.
이스라엘 예수살렘의 올드시티 전경과 유대 성전 앞에서 설교하는 예수의 모습. 제임스 티소 작품.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오래된 성곽 앞에 섰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한다. 입 안에 ‘쓴 것’이 들어오면 씹기도 전에 뱉어낸다. 그게 뭘까. ‘아버지의 뜻’이다. 대개 그렇다. 나의 뜻은 달고, 아버지의 뜻은 쓰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 속에 ‘하늘나라의 속성(천국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러니 우리가 뱉어내는 건 결국 무엇일까. 씹기도 전에 뱉어내는 게 대체 무엇일까.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뜻’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 속에 하늘나라의 속성이 담겨 있다. 예수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고 누차 강조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속성이 비로소 나의 속성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거기야말로 ‘천국의 문’이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불이(不二)의 문이다. 아버지의 속성과 나의 속성은 그런 식으로 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문 밖에서 왔다갔다한다. 서성일 뿐이다. 문 밖에서 맴도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다시 말한다. 마치 2000년 전에 살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꾸짖듯이 말한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문이라고 말하며, 그 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복음 23장 13절)
예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삼키는 우리가 스스로 천국의 문을 잠가버린다고 일갈한다. 그 문을 잠근 탓에 나도 못 들어가고, 남들까지 못 들어가게 한다고 지적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에 대한 우리의 기계적ㆍ도식적ㆍ율법주의적 신앙 때문에 말이다. 예수는 그걸 “불행”이라고 불렀다.
〈23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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