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
가톨릭 일꾼 신문/2024년 여름호
한상봉
교회는 세상이 아직도 낯설다
우리는 미운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반면에 연인들은 서로 말을 섞고 살을 섞고 싶어 안달한다. 하느님 역시 인간에게 말을 섞고 살을 속고 싶어 하셨다. 그분이 인간에게 섞은 말씀들은 성경으로 남아 있고, 그분이 인간에게 섞은 사는 성체 성산에서 기념된다.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먹어라.” 마음이 간절하면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러니 중요한 건 마음이다 신앙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선포한 ‘신앙의 해’ 한가운데서 선출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여겨진다‘ 때마침 제2차 바티칸 공의의 개막 50주년을 지낸 직후였으며, 요한 23세 교종이 ’지상의 평화‘라는 사회 회칙을 반포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교종으로 장엄하게 선포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교회 현장, 사목 헌장, 사회교리 문헌인 ’지상의 평화‘는 한결같이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인 교회가 시선을 교회 바깥으로,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과 신음하는 생태계를 위해 투신할 것을 요청해 왔다, 교황청에서 펴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역시 3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회 교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이 아직도 낯설다 견고한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 때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안전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 안에서 여성 수도자와 남성 사제들에게 거는 기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여성 수도자들은 본당 수녀들처럼 교회에 안 살림을 맡아서 하는게 제격이라는게 가톨릭 교회 전통적 견해다. 주교들 역시 수녀들을 바라볼 때마다 딸 자식을 바라보듯, 수녀원 안에서 안전하게 기도만 하라고 부탁한다. 그 자애심을 탓할 수 없겠지만 수태고지 이후 나자렛에서 유다 땅까지 당차게 혼자 몸으로 엘리사벳을 찾아갔던 마리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 수도자들은 예수님의 독립적인 제자로 보지 못하고, 늘 남성 사제의 그늘 안에 붙잡아 두었던 교회를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성 수도자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처녀이며, 동시에 세상과 인간을 품어 안는 어머니다. 처녀는 순결하고 어머니는 강하다. 처녀는 나자로의 누이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어머니는 마르타처럼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이웃 사랑의 최고 형태는 ’정치적 사랑‘이다.
만약 전통적인 견해대로 여성 수도자들이 교회 살림만 돌보아야 한다면 바깥 살림도 겸해야하는 남성 사제들은 복음의 빛으로 사회 문제를 얼마나 다루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실상 가톨릭 교회에서 사회적 사안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밝힌 사회교리에 대해 사제들조차 충분한 견해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신학교에서 사회교리를 숙지한 것도 아니고, 사제 평생 교육원에서 보수 교육도 받지도 못했다. 사회교리를 모르니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 입장을 알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에 사제들이 참여하기란 더욱 어렵다. 반면 본당 신자들은 대부분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며, 나름대로 정치적 사안을 분별해야 하는 시민이며, 때로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유권자다. 가계부를 작성하거나 아이 교육을 염려하고 병원에 갈 때조차도 모든 신자들은, 심지어 사제 자신과 수도자들도 ’정치‘의 영향력 안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정치의 목적은 공동선”에 있으며, 신자 모두에게 이웃 사랑의 구체적 형태로서 ’정치적 사랑‘을 설파하고 있다.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사형을 내린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2013년 9월 16일 성령 마르타의 집 소강당 미사 강론)
따라서 사제들이 신자 다수의 삶이 연루되어 있는 사회교리에 무관심하고, 사회복음화에 나서지 않는 것은 ’직무 태만‘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신앙 안에서 돌보아야 할 의무는 일차적으로 신자들 자신에게 있으며, 사제들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향에 따라 양을 지키는 ’양치기 개‘에 불과하다고 보더라고 사정을 달라지지 않는다. 사제들은 세상이 설파하는 우상(맘몬)에 맞서 신자들의 복음적 삶을 함께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자못 영적인 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싸움에서 그 전투)교본이 ’사회교리‘다. 물론 신자들에게 ’복음화‘라면 무조건 입교자들을 늘이고 본당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용산참사가 발생했을 때,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고 소란할 때,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설 때, 노종현장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줄줄이 무덤으로 들어갈 때,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떼로 수장될 때, 군에 간 채상병이 급류에 떠내려 갈 때,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이 나라 민주주의가 하루 아침에 만신창이가 될 때에도 교회는 ’대체로 안녕‘했다.
차별과 배제, 무관심의 세계화가 교회 안에서 고스란히 관철되고 있다. 공감과 연대의 마음으로 현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일부 사제 수도자들을 향해 ”미사를 정치도구로 이용한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교회와 복음에 대한 모욕이다. ”고통받고 있는 자매형제들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고 말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을 헛되이 날려 보내는 일이다.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처럼, 교회 안팎의 악마적 세력은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 문을 닫은 제 가슴을 치는 대신에, 세상을 위해 투신하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데 무심한 공범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은, 교회는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 병원이라는 교종의 말씀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3년 8월, 이탈리아 예수회가 발간하는 잡지 ’라 치빌타 가톨리카‘와 인터뷰하면서,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자비의 사목자들“ 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목자들이 있는 ”어머니이며 여성 목자인 교회를 꿈꾼다“고 전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존재
이런 점에서 교종은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기쁨‘을 통해 세상을 향해 출발하고, 뛰어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고 기뻐하는 교회를 요청했다. 교종은 ”문 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어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 주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나는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복음의 기쁨 49항) 교종이 믿는 교회는 ’통행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이기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성체도 “완전한 자들을 위해 내리시는 상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해 주시는 강력한 치료제요 영양제”라면서 성사를 향해 나아가는 문은 어떤 경우에도 다쳐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교종은 이 시대의 요구를 무시한 채 전례와 교리에만 과시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회를 바깥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세상에 투신하는 ’두려움 없는 사랑‘
참 된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대 교황들은 바티칸에 머물며 황제다운 위용을 과시해왔다.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프란치스코 교종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봉사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성찰했다. 교회가 아직도 봉건제적 유습을 버리지 못했어도, 자각한 삶들이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옷을 벗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주의의 시선을 잡시 접어두고 복음적 확신 안에서 거닐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이다. 복음은 현실 앞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일부 주교들은 “신자들이 모두 다 같은 생각이 아니라서”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할 수 없다고 변명해왔다. 물론 교구 시낮들 가운데 정치적 견해와 사안에 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 모임”처럼 과격한 발언으로 사제들의 사회참여적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침묵하고 있지만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제란 복음적 진정성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신자들의 동의를 반드시 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생각이 아닌, 주님 즉 복음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하느님이지 신자가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작심한 하느님 백성이다. 때로 설득의 대상이기도 한 다른 주교와 사제 평신도에게 알아서 미리 ’투항‘하는 일부 사제와 주교들을 보면’ 복음에 대한 충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교도권이란 신자들의 의견이 갈릴 때일수록 효력과 효횽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천주교 제주 교구장이었던 강우일 주교는 그동안 여러 기회를 통해 ‘신앙의 재구성’을 요구해 왔다. 이 요구는 단지 신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에게 ‘신앙의 재구성’이 요청된다. 절박한 시대의 요구 앞에서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스승 예수와 운명을 나누어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도 나눠 가져야 한다. 주교와 사제들이 “만일 예수가 나였다면...”하고 묻지 않는 것은 절실한 기도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수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 아니다.
주교들과 사제 수도자들은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전례를 하고, 성체조배를 하고, 묵주기도에 열성을 드리지만, 정작 성경이 드러난 예수에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추어 보며 개별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분에게서 해답을 찾지 않는 신앙이라면, 아무리 수천만 단의 목적 기도를 봉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과 견주어 생각하지 않는 한, 그 기도가 나와 하느님 나와 예수와의 관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우일 주교는 <가톨릭 교회는 왜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가?> 라는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것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강우일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니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에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 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이다.”
예수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았으며,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가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