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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표상체계가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정리하다 보니 글이 아주 길어졌습니다.
시간나시는 분들은 읽어보세요.
내부표상체계(Internal Representation System) 이해하기
시각, 청각, 신체감각, 후각, 미각 등의 다섯가지의 감각양식을 사용하여 내면에서 정보나 경험, 기억을 표상하는 여러 가지 통로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표상의 개념은 어떤 객체나 경험을 자신의 뇌 속, 즉 마음속에 대표하여 떠올리는 그림 즉 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님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에서 장님들이 코끼리에 대해 이해하고(표상하여) 설명하는 것이 제각기 다르듯이 동일한 대상물을 경험하거나 기억을 하더라도 그것을 표상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습이나 색깔, 크기를 중심으로 시각적 표상체계를 사용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기준으로 하는 청각적 표상체계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느낌과 생리적 반응을 기준으로 하는 신체감각적 표상체계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상체계를 안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이 표상체계는 NLP의 여러 가지 기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개념이자 기법이다.
NLP Practitioner p127 중에서
내부표상체계는 일반적으로는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마음에서 이미지로 떠올릴 때 5감 중 특히 어떤 감각을 선호하여 떠올리는지가 사람마다 다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라는 특정 단어에 시각적 표상체계가 강한 사람은 선생님의 얼굴이나 모습을 떠올리고, 청각적 표상체계가 강한 사람은 선생님의 강의할 때의 음성으로 선생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신체감각적 표상체계가 강한 사람은 선생님에 대한 따뜻함이나 엄격함 등의 신체적 느낌으로 떠올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5감을 넘어선 더 깊은 부분에서의 느낌들이 떠오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자신의 힘들고 괴롭던 학창시절을 따뜻함과 인자함으로 달래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던 선생님과의 기억이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가슴 뭉클한 따뜻함으로 선생님이 기억되겠지만, 차별대우와 촌지의 희생양의 경험이 있던 사람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분노의 기억이 되살아 날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 각인되어 똑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천차만별의 내부이미지가 그려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에 얼마나 많은 심리적 배경의 차이가 존재할 것인가?
외부세계의 정보가 내면화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외부세계의 정보가 삭제,왜곡,일반화라는 필터링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면 자신의 마음에 나름대로의 내부이미지를 그리게 되고 이 내부이미지가 정서상태에 영향을 미쳐 우리의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내거나 행동하도록 만든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과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필터링이라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이미 내 안에 존재하던 내부표상체계, 다른 말로 정보분석시스템(혹은 성격적 패턴, 성향)이 필터링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쳐 정보를 취향에 맞게 해석한 후에 정서상태로 반응하여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거나 행동에 이르게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똑같은 전쟁영화를 본 후 영화의 내용을 각자 설명한다고 했을 때, 단지 오감적 차원에서만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던 정보분석시스템(성격적 패턴, 성향)의 차이에 따라 전쟁영화를 두려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 전쟁영화의 액션부분에 집중하는 사람, 인간애로 접근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의 새로운 경험은 기존의 경험들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던 정보분석시스템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외국의 속담 중에 “똑같은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젖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체험의 내용보다는 체험자가 누구냐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정보의 삭제,왜곡,일반화라는, 즉 필터링의 ‘주체’는 기존에 형성된 정보분석시스템이다.
기존의 정보분석시스템이 정보의 어떤 부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여 편집을 하고 5감 중의 특정 감각형태로 받아들이도록 영향을 미친다.
선생님에게 분노라는 감정으로 정보분석이 끝난 사람은 앞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선생님이건 부정적인 의미로 정보를 처리하기가 쉽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세상은 아는만큼 보인다고도 하고,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기존에 형성된 정보분석시스템”이란 넓은 의미에서의 내부표상체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격”과도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성격은 다양성이라는 의미와 계층성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다양성이란 내성적 성격, 외향적 성격과 같이 각기 다름을 나타낸다. 사상의학에서는 사람의 성격적 패턴을 4가지로 구분하고 에니어그램에서는 9가지로 구분한다. 관점에 따라 성격은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성격의 좋고 나쁨의 구분은 없다.
각각의 성향은 비교했을 때 각각의 고유한 특성이 있을 뿐이다. 짜장면과 짬뽕의 차이처럼...
계층성이라는 의미는 성격을 긍정성과 부정성으로 구분하는 경우이다. 마음이 개방적으로 열려 상대를 인정할 줄 알고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의식이 강하고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의식혁명”이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인간의 의식수준을 10에서 1000까지 구분하였는데 이것이 성격의 계층성을 의미한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사람을 건강한 범위, 평균 범위, 불건강한 범위로 크게 나누고 각 범위를 다시 세단계씩으로 나누어 결국 9단계로 계층을 구분한다. 결국 에니어그램에서는 사람은 9가지 성격의 유형 중에 하나에 속하면서 계층적으로 9개의 범위에 한군데에 위치하게 된다.
우리가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 종교나 철학, 처세술, 마인드컨트롤이란 성격의 계층성, 즉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NLP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 하나의 방법론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때 세심하게 고민했다는 증거가 우리에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성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면 얼마나 따분할까?
마치 한가지 음식만 평생 먹어야 하는 고통과 같지 않을까싶다.
다양성 측면에서의 성격은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변하지 않지만 계층성 측면에서의 성향이 부정적일수록 자신의 욕구를 외부로 드러내는 방법이 부정적, 간접적, 이기적, 파괴적, 제한적이다.
부정적 성향이 강할수록 필터링에 의한 정보의 왜곡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성격은 크게 지성적인 부분과 감성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좌뇌에서는 논리적으로 분석,판단하여 받아들이고, 우뇌에서는 감성적인 느낌으로 여과한 후 받아들인다.
우리가 닭고기를 먹는다고 했을 때 닭을 산채로 잡아 그냥 씹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닭을 잡은 후에는 튀길지, 삶을지, 구울지 등등의 자신만의 방법으로 변형을 주어야만 우리는 닭을 먹을 수 있다.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도 기존에 내재한 정보분석시스템인 지성과 감성이 자신의 입맛대로 필터링을 한 후 흡수한다.
지성은 정보를 논리적으로 따지려 하며 정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감성은 정보를 느낌으로 받아들이려 하며 좋고 싫음의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좌뇌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논리적으로 분석가능한 정보덩어리로 보인다. 논리적 분석을 통해 세상의 물질문명은 놀라운 진보를 이룩하였고 특히 과학과 의학이라는 부분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강하게 드러났다.
과학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결정적인 과학의 오류는 자신의 논리가 펼쳐지는 특정한 장(場 Field)이 존재하며 그 장 안에서만이 자신의 논리가 성립하고 그 장을 벗어나면 그 장을 설명하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는 전제조건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전기의 힘에 관련된 논리는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자기장 안에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성립한다. 중력의 힘에 관련된 논리는 자신이 보는 세상이 중력장 안에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성립한다. 이 장을 벗어나면 벗어난 장에 해당하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세상은 장과 장이 각각의 경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장이 한 영역에 중첩되어 존재하기도 한다.
이 세상은 크게 세가지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 세계, 둘째는 마음의 세계, 셋째는 영적인 세계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세상을 눈에 보이는 세계나 기존의 과학장비로 측정가능한 세계로 축소시켜 본다면 아주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만다.
일례로 인체를 볼 때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몸만이 인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한의학적인 기(氣)의 세계는 무시되어 버리고, 영혼과 관련된 심령이나 빙의와 같은 세계는 미신의 세계로 전락하고 만다.
심령현상을 신경정신과의 특정 질병으로 환원되었을 때의 황당한 체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신경정신과나 한의학적 관점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을 심령현상으로 오해하였을 때의 피해 또한 당연히 존재한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논리가 대상을 관찰하는 전부, 혹은 가장 적절하다고 여기는 편협함에 있다.
이 편협함의 결과 내 관점이 옳고, 상대 관점이 그르다는 결론을 내려 세상을 자신의 장만으로 축소시켜 해석하려 한다.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이 설명가능하다 싶으면 자신의 관점이 옳음을 증명하는 훌륭한 증거물이라고 여기지만, 자신의 관점으로 설명이 힘든 부분은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 혹은 두려움으로 반응을 한다.
이와 같이 좌뇌가 한가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자신이 원하는데로 필터링을 해버린다.
하지만 특정한 관점이 없이는 좌뇌는 정보를 처리할 수 없다.
지성이 성숙할수록 지성이 취하는 입장은 현재 내가 지닌 관점은 현재를 설명하는 훌륭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장이 달라지거나 상황이 바뀐다면 이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이 더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경계를 나누다가 지성이 성숙할수록 세상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으로 이해된다.
우리 모두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체험을 위해 필요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관점이란 옷과 같아서 현재 아무리 편하다하더라도 우리 몸이 커지거나 날씨가 변하면 기존의 관점을 버리고 다른 관점으로 갈아입어야한다.
나의 관점에서 상대가 지닌 관점이 부적절하고 제한적으로 보일지라도 상대가 그 관점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현재 상대는 그 관점으로 세상을 체험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체험을 통해서만이 성장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관점이 자신의 삶을 괴롭게 하고 불편함이 극에 달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관점을 반성해볼 마음이 생기고 좀 더 적절할 관점으로 옮길 준비를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좀 더 넓은 관점을 지닌 사람이 보기에 제한적 관점을 지닌 사람이 아니겠는가?
관점이란 그릇과 같다.
그릇의 용도는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았다가 적절할 때 적절한 방법으로 꺼내 쓰는 것이다.
담겨지는 내용물은 정보를 의미한다.
그릇은 간장을 담을만한 작은 그릇도 있고, 마실 물을 저장할만한 큰 탱크도 있고, 입구가 넓적한 그릇도 있으며, 주둥이가 작은 그릇도 있다.
그릇은 그것의 크기와 형태에 의해 담겨지는 정보를 재단한다.
우리는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그릇으로 정보를 퍼담은 채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그릇은 소중하다.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있다면 필요한 때 필요한 방법으로 정보를 자유자재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그릇만 있다면 간장종지로 바닷물을 퍼나르려는 것과 같을 것이요, 큰 그릇만 있다면 미세한 정보의 조절은 힘이 들 것이다.
이것이 다양한 관점이 각각 존중받아야할 이유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후레쉬를 키면 후레쉬는 일정영역의 부분을 밝혀준다. 후레쉬의 중앙부분은 제일 밝고 주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다 결국 어둠에 묻혀버린다.
관점은 한편으로는 후레쉬와 같아서 일정한 영역을 밝게 해준다. 이 관점을 통해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지만 주변으로 갈수록 이 관점의 경계가 드러나며 경계 바깥은 이 관점을 벗어난 영역이 된다.
진보란 일정 영역 안을 전보다 더 밝혀볼 수 있거나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후레쉬를 소유하는 것과 같다.
관점의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관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
결국 지성의 본질은 정보를 해석하는 관점들의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좀 더 정교한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관점, 지도를 만든다 해도 그것은 지도일 뿐 영토는 아니다.
그러면 지성의 끝은 어디일까?
일체를 포괄할만한 가장 큰 그릇은 무엇일까?
지성이 상승하다보면 언젠가는 궁극의 앎의 상태. 무극(無極)의 상태, 무경계상태, 스스로의 지혜가 드러나져 세상을 창조하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속성상 지성은 대개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기존의 관점에 의해 옳고 그름으로 구분하려 한다.
지성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보 자체의 신선함에 매료되고 이 정보를 해석할 새로운 관점에 흥미를 느끼며 세상이라는 영토를 바라볼 새로운 지도 한 장을 기존의 정보분석시스템에 기꺼이 추가한다.
나이들수록 어떤 이는 완고한 고집쟁이가 되지만 어떤 이는 타인의 세계관을 존중할 줄 아는 유연함을 지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정보는 우뇌를 통해서는 느낌이라는 측면으로 해석되어진다.
감성의 기준에서 좋은 정보란 즐거움, 쾌락, 기쁨, 만족감, 따뜻함, 소통되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정보이며 좋지 않은 정보란 고통, 이별, 소외감, 두려움, 통증으로 느껴지는 정보이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가장 큰 원칙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원칙이라고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
과거의 괴로움과 연관된 사건이나 인물, 물건은 무의식적으로 정보분석시스템에 의해 거부,회피,반발이라는 필터링과정으로 처리되기 쉽다.
최면을 통해 과거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치료한다 함은 그 당시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앞으로 정보분석시스템이 긍정적으로 필터링하도록 하는 일련의 작업니다.
과학에서 대상으로 삼는 세상은 수량으로 계산이 가능한 세상이다. 느낌의 세계에서는 양으로 계산되어 질 수 없는 질(質)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로 따지기 힘든 세계이고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와 과정이 사람마다 제각기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고통으로 느껴지는 정보가 누군가에게는 쾌락의 대상이기도 하다.
격투기 경기를 보면서 누군가는 즐겁게 식사를 하고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채널을 돌려버리기도 하지 않는가?
즐거움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우리는 즐거움을 육체와 정신, 영혼이라는 통로를 통해 얻게 된다.
육체를 통해 식욕,성욕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정신을 통해서는 상대와의 교감, 사랑, 성취감을 만끽한다.
영혼을 통해 존재 자체의 기쁨을 만끽한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올바르거나 더 나은 기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 영혼이 있음은 이 세가지 모두를 통해 충분한 기쁨을 느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거움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이기적이고 파괴적이며 자신의 에고가 지닌 한계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즐거움은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에고가 지닌 한계성이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생은 고(苦)다”라는 말과 같다. 아무리 즐거움을 느끼더라도 그 즐거움은 영속적이지 못한, 일시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즐거움은 우리의 강력한 행동의 동기가 된다.
당신은 왜 그 일을 하는가? 그 일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 자체에서 오는 직접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채 이차적인 즐거움을 얻으려하면 삶은 괴로워진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 자체가 자신에게 즐거움의 원천이 되면 참으로 행복하겠지만, 직업 자체는 나에게 괴로움이면서 직업을 통해 얻는 재화를 통해 2차적으로 즐거움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삶은 행복하지가 않다.
운동을 통해 건강해지려는 사람은 결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다.
운동 자체는 참아내야 할 괴로움이고 이것의 결과로서 건강이라는 달콤함을 맛보려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의 특징은 운동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즐거움의 본질은 소통이 아닌가 싶다.
그것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일과 하나가 되었을 때, 상대와 하나가 되었을 때,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즐거움이 드러난다. 소통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다.
즐거움은 초기에는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Doing) 기쁨을 얻지만 이 과정을 충분히 체험한 성숙한 영혼은 행함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냥 존재함으로써(Being) 기쁨이 스스로 드러남을 느끼게 된다.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소통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충분히 체험하게 되면 어느덧 존재 자체로서 소통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자체의 속성이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기존의 정보분석시스템은 과거의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상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무의식상태에 저장된 과거의 정보를 다시 끄집어내어 재처리함으로써 일정부분 시스템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최면이나 NLP의 기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감성의 측면에서 즐거움을 얻으려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전략은 즐거울만한 일은 추구하려하고 괴로울만한 일은 회피하려 함이다.
이 관점은 결국 하나의 세상을 두가지 영역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낳는다.
각각 즐거울만한 것을 모아놓은 세상과 괴로울만한 것을 모아놓은 세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것의 최고 연장선상이 바로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다.
우리 모두는 지옥이 아닌 천국을 지향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고득락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세상은 오히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더욱 짙어지게 됨을 알 수 있다.
물질문명을 추구하면 할수록 자연은 황폐화되고 계층간의 빈부격차는 심해지며 황금의자를 차지하려는 제로섬게임은 대부분의 사람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지향할수록 지옥은 더욱 어두운 모습으로 세상에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에 대안이 되는 관점의 시작은 ‘과연 고통이 고통인가?’라는 의문에서부터이다.
고통을 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일단 회피하려하고 회피할 수 없다면 가급적 빨리 끝마치기를 원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삶을 통해 다가오는 다양한 정보를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체험’은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감성의 측면에서 사람은 이 정보를 좋고 싫은 관점에서 편가르기를 하고 좋은 것만 체험하고 싫은 것은 회피하려하는데 정보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 좋고 싫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는 정보일 뿐이다.
정보 자체는 모두가 소중하다.
그것을 체험하려 우리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는가?
고통스러울 때 그것을 체험하는 다양한 단계의 방법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첫째단계, 고통을 고통스러워하면서 회피하려 하는 방법
둘째단계, 고통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고통의 체험을 통해 긍정적 교훈을 얻으려는 방법
셋째단계, 고통 자체를 관점없이 그냥 체험하는 방법
이 세가지 관점은 감성을 통해 성숙해가는 단계별 과정이다.
첫단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신경증과 스트레스, 인생의 고난이 드러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통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대하는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꾸려는 시각이다. 실패의 체험을 통해 실패한 타인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앞으로 성공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태도로써 이 단계로 진입한 영혼은 삶을 긍정적으로 조망하는 성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관점도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며 고통을 당할 때는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포함되어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운동을 할 때 운동하는 동안에는 괴롭지만 이것을 견뎌내면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세 번째 단계는 고통을 필터링하지 않고 고통을 고통 자체로 체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운동을 하는 도중에 근육이 아프고 숨이 가쁘고 땀을 흘리는 등, 운동하면서 나타나는 괴로움을 감정의 여과없이 그냥 바라보는 방법이다. 괴로움이 느껴지면 ‘괴로움을 내가 느끼고 있구나’하고 알아채고 그냥 그 괴로움을 지켜보는 방법이다.
괴로움을 인내하려는 마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괴로움을 긍정으로 바꿔보고 싶은 마음 등등이 일어났다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바라보기’라는 명상법인데 이렇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숨김없이, 회피함 없이 바라보기를 지속하게 되면 고통이라는 감정이 실체가 없음을 알아채게 된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좋음을 넘어선 지극한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나에게 다가오는 일체의 다양한 감정들, 기쁨이나 괴로움 등을 더 얻으려하거나 회피함 없이 그냥 그대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감정이란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처럼 실체가 없음을 알게된다. 감정이란 나의 어깨에 잠시 와서 머무르는 새와 같다. 그것에 반응하면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면 사라져버린다. 이 사라져버린 자리에서 지극한 희열이 나온다.
감성은 대개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기존의 관점에 의해 좋고 싫음으로 구분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감성이 성숙될수록 싫음을 통해 긍정을 발견하게 되고, 궁극의 과정에서는 좋다, 싫다라는 감정을 넘어선 절대평화의 경지에 올라가게 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이제는 사라진 그 지점, 천국과 지옥이 경계를 허물어버린 그 지점이 감성이 도달하는 궁극의 자리이다.
지성과 감성의 정수는 지혜와 사랑으로 대별된다.
지성의 속성인 정보를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려는 경향과 감성의 속성인 정보를 좋고 싫음으로 재단하려는 경향을 바르게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는 정보처리시스템, 즉 내부표상체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보처리시스템이 어떻게 필터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다양한 가능성으로 펼쳐질 것이다.
2006년 9월 9일 유태원
첫댓글 오~~ 대단하시군요. 논문을 보는 듯 했습니다. 예전 nlp수업 복습도 되는 것 같고, 인생의 철학이 상당히 배어나온듯 하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움의 본질은 소통이 아닌가 싶다. 그것과 내가 하나 되었을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여유만만 원장님, 그냥 차분하게 한 편의 철학적 수필을 읽은 듯 합니다. 오래 마음에 담그어 울궈 낸 듯한 글이 마음에 오래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행복한 가을 되세요.
짝짝짝~ "내부표상체계"에 대한 훌륭한 내부표상체계를 가지고 계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출력하여 강의시간에 회원들과 공유 하도록 하겠습니다. 행복 가득한 가을 밤 되시길 바라며...
여유 만만하게 잘 읽었습니다. 닉네임이 왜 '여유만만'이신지 알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