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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2:15-29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신명기1장에서 30장까지 모세의 설교에 대한 기록을 마치고 32장에서는 모세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 노래는 시적인 형식과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32장 전반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 족속을 징계하시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 노래는 모세가 이스라엘과 함께한 40년 간의 경험을 통한 경고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31장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15)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부릅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성경에서 총 4번 나오는데 신명기에서만 3번 사용됩니다. 그 뜻은 ‘옳은 자’라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별명의 고유명사입니다. 이 여수룬이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쓰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만 불리는 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 별명이 쓰인 다는 것은 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합니다. 이 별명의 뜻만으로 봤을 때는 긍정적인 의미이지만,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기에 반어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게 됩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무시하고 경솔하게 함부로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살찐 소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 기름기가 흐를 정도로 비대해진 살찐 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소는 먹을 것을 충분히 먹었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자기를 치는 목자를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로 차버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누리는 풍요와 그로 인한 태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삶이 부족함이 없이 윤택해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가 되는 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삶에 부족함이 있고 힘이 들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이 채워지면 자신만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패턴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고입니다. 8장 12-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31장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노골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실제로 이 말씀과 같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 부분이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은 신약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명이 됩니다. 윤택하고 형통한 삶을 살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면 오히려 불행한 삶이 됩니다. 반대로 궁핍하고 불행하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 되는 역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를 지은 여자가 올바르게 사는 바리세인들 보다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한 윤택하며 부족함이 없게 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16-21)
(16-20)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부족함이 없어진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가증한 것과 귀신에게 제사하고 그것들을 섬깁니다. 가증한 것은 우상을 의미하고, 귀신들 또한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의미합니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알게 된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족속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을 지내면서도 애굽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또한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우상숭배에 물들지 말라고 수없이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삶이 형통하고 부족함이 없어질 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족속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의 ‘인간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단계의 욕구가 나타나고 그것이 충족되면 또 그 위의 단계의 욕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사회적 욕구가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나타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이 사람의 본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아니지만, 일정부분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단계적인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우상들과 동일선상에 놓여서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섬김을 받는 신이 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안정을 누리게 된 이스라엘 족속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과 성품이 있는 신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와 언약을 맺은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질투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질투한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과 언약을 맺었고, 이 관계를 혼인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며 이스라엘은 신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를 간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면 그 관계는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미약하고 작은 족속이지만,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고 진노하십니다. 이 진노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진노가 아니라, 질투에 따르는 진노입니다. 그래서 이 진노는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게 하여 회복시키려는 진노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질투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길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방법을 내십니다.
백성이 아닌 자로 시기나게 하며(22-29)
(22-26)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족속을 시기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어려움을 주고, 다른 민족에게는 형통함을 주어서 그들이 다른 민족을 시기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 중에 하나가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욥은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욥21:6)고 하며, 시편 73편에 시인은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박국도 왜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냐고 하나님께 묻기도 했습니다(합1: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난을 주시고 그들의 원수에게 형통함을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다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시고 악인에게 형통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은혜만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을 이루시는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증언하십니다.
또한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상관하지 않으시고 내버려주시는 것은 아니며, 그들에 대해서는 심판의 진로를 하십니다.
(27-29)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사용해 이스라엘 족속을 징계 하셨습니다. 이 때 이방 민족들의 죄와 방종을 경계하시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또한 내리 십니다. 세상에는 어떤 누구도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높이거나,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모세로 하여금 부르도록 한 이 노래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족속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와 바벨론도 타 민족에 의해 멸망됐습니다.
오늘 모세의 노래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모든 산당과 우상을 깨뜨린다 하여도, 자신의 마음에 자라나는 우상은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돼 갈수록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자신을 위한 우상들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다시는 우상이 자라지 못하게 하시려고, 오히려 그들의 원수들에게 형통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의로워서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는, 의롭다고 여기기는커녕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죄가 크다고 여겼기에 복된 사람입니다. 그 여자의 죄가 정말 다른 누구보다 큰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는 자신의 죄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탕감 받은 죄인으로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하루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족속은 자신 밖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면서도 그들 안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하는 그 우상으로 부터 돌아오게 하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오직 그 은혜로만 구원을 베푸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하루도 용서받은 그 사랑에 힘입어,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모세는 왜 모든 설교를 마치고 이 노래를 기록하여 부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에 들어가 무엇때문에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는지 생각해보고, 우리에게는 그런 부분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진노하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질투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질투를 하시는지 묵상해봅시다.
4.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다른 이방족속을 시기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우상으로 부터 돌이키도록 하시는데, 왜 그러한 방법을 쓰시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