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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스님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법호는 청허(淸虛)이며 서산(西山)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시조(始祖)는 완산(完山) 최씨(崔氏, 지금은 전주최씨)이고 어머니의 시조는 한남(漢南) 김씨(金氏)이다. 태종(太宗)때에 이르러 친가와 외가의 현고조(玄高祖)들이 각각 용호방(龍虎榜)에 올라 창화(昌化)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부모들은 모두 창화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뒤 현윤(縣尹)으로 있던 외할아버지 김우(金禹)가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지어 안릉(安陵)에 귀양가서 살게 되자 스님의 부모들도 이에 연루되어 집안식구 모두 관리[館吏]가 된다. 8년이 지난 뒤 외할아버지에 대한 지가 다시 논의되어 특별히 조정으로부터 사면(赦免)을 받고 복직(復職)이 허용됐으나 그러나 마침내 관서(關西)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은 세창(世昌)이다. 나이 30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기자묘(箕子廟)의 조그만 관직[參奉]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관리가 와서 떠나자고 하며 부임 날짜를 말해주자 세창은 웃으면서 한마디로 이를 거절한다.
“정든 산, 희뿌연 달과 한 병의 막걸리, 아내의 즐거운 마음이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리고는 허리띠를 풀고 남녘으로 머리 향한 채 누워 큰 소리로 휘파람을 몇 번 불자 관리는 이내 물러갔다. 세창은 무릇 고을에서 의문 나는 것을 갖고 와서 물으면 티워주고(決) 다투는 자들이 찾아오면 그치도록 했으므로 고을 관리[鄕官]로 일한 13년 동안 그 지역 주민들에게 ‘덕로’(德老)라는 별호로 불리었다.
조선 중종 14년(正德14, 1519) 기묘(己卯) 여름, 어머니 김씨는 며칠간 계속 몸이 불편하더니 하루는 창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이때 어느결에 나타났는지 한 노파가 찾아와 예를 올리고,
“놀라지 마십시오, 장부(丈夫)를 잉태하겠기에 제가 와서 축하드리는 것입니다.”라 하고는 또 예를 베푼 뒤 홀연 사라졌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상도 해라. 우리 부부는 동갑(同甲)으로 나이 오십에 가까운데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김씨 부인은 민망히 여기는 한편 의아해 했다.
이듬해(庚辰, 1520) 3월, 김 부인은 과연 기골이 훤칠한 사내 아이를 낳았다. 노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늙은 조개에서 진주(眞珠)가 나오니 하늘의 뜻이로다”라 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아기가 세 살 되던 해 4월 초파일, 세창은 낮술에 취하여 마루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때 괴상하게 생긴 한 노인이 나타나 “아기 스님[小沙門]을 뵈러 왔습니다”라 말하고는 두 손으로 아기를 받쳐 들고 주문(呪文)을 몇 번 외운다. 그 소리는 고대 인도어[梵語]같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주문 외우기를 끝낸 뒤 아기를 내려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이 아기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고 소중히 기르시기 바랍니다.”
세창이 ‘운학’이란 이름의 뜻을 물었다.
“이 아기의 평생 행지(行止)가 마치 정처없는 구름, 고고(孤高)한 학(鶴)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홀연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노부부는 아기를 부를 때 ‘아기 스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운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색다른 장난을 했다. 모래를 모아 탑을 쌓고 혹은 기와를 가져다가 절을 세우기도 하는 등 늘 이러한 놀이를 일삼았다. 그런데 아이에게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홀연 먼저 돌아가시더니 이듬해 아버지마저 뒤이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백 년의 살림살이[生計]가 하루아침에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와 있던 이사증(李思曾)이 슬픔에 잠긴 고아의 소문을 듣고 소년을 자기 처소로 부른다. 때는 마침 겨울이었다. 목사는 멀리 눈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면서 소년에게 말한다.
“운(韻)을 부를 테니 시(詩)한 수 지어보겠니”
“제가 어찌 감히…”하고 겸양하는 소년에게 목사는 비낄 사(斜)자 운을 불렀다.
소년은 운을 듣자 즉석에서,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비끼니(香유高閣日初斜)”라고 응대했다. 연이어 꽃 화(花)자를 부르자 소년은 또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온누리를 덮은 눈이 꽃처럼 곱구나(千里江山雪若花)”라고 읊었다.
목사는 소년의 비상한 재주에 탄복하면서 “너는 나의 아들이로다”라며 양아들로 삼았다. 이때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목사는 얼마 뒤 내직(內職)으로 들게 되자 소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취학(就學)시킨다. 그래서 소년은 12살에 성균관 선비들의 명단 끝부분에 이름이 올랐다. 하루는 한 노학사(老學士)가 소년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고향은 이 곳에서 멀지 않다. 네 선친(先親)은 나와 친한 사이였으니 내 너를 멀리할 수 없구나.” 그리고는 소년을 이끌고 흥인문(興仁門:동대문)밖으로 나가 묵은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사천(沙川)의 언덕을 가리키며 “여기가 바로 네 선친의 옛 집터이다”라 했다.
노학사는 몇 간의 서당(書堂)을 건립, 자제(子弟) 5~6명을 모아 모두에게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서로 의형제를 맺고 여기서 공부하되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하고는 스승을 초빙하여 3년 동안 배우도록 했다. 소년 운학(雲鶴)은 15세 되던 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했으나 낙제의 쓴 잔을 마시자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욱 발분한다. 마침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있는 스승 박상(朴祥)을 찾아가기 위해 몇몇 동학(同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스승은 예기치 못한 우환[不天之憂:親喪]을 만나 이미 서울로 돌아간 뒤였다. 소년들은 울적하고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이들 가운데 한 소년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천리 길 멀다 않고 스승을 찾아나섰다가 일은 비록 어긋났지만 이런 명승지에 와KT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느니 삼남(三南)의 산천이라도 유람하는 것이 좋겠다.”
소년들은 두류산(頭流山:智異山) 화엄동(華嚴洞)연곡동(燕谷洞)칠불암(七佛庵)의신동(義神洞)청학동(靑鶴洞)의 크고 작은 절들을 찾아 다니며 6개월여를 마냥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조그만 암자에서 한 노숙((老宿:도덕 높은 스님, 崇仁을 이름)을 만났다. 운학을 본 숭인 노숙은 첫눈에 그가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다.
“그대의 용모를 보아하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마음을 돌려 심공급제(心空及第)하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名利)를 끊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의 소득(所得)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뿐이니 참으로 슬프지 않으냐”며 여쭙는다. “어떤 것을 심공급제(心空及第)라 합니까” 숭인 노숙은 그 순간 눈을 꿈뻑[瞬目]하며 “알겠느냐”한다. “모르겠습니다.”이에 노숙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야”라 하고는 《전등록(傳燈錄)》《선문염송(禪門염)》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법화경(法華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 등 수십 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면서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면 점차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운학이 지금까지 배워온 것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종지(宗旨)로 하는 유학의 경서(經書)들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운학 소년은 처음 접하는 불교의 심원(深遠)한 세계에 마음이 이끌려 공부를 시작했다. 뒷 날 숭인 노숙은 운학을 부용영관(芙蓉靈觀) 대사에게 소개한다.
영관은 이때 벽송지엄(碧松智嚴)의 법을 이어받아 지리산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운학을 한 번 보매 큰 그릇[法器]이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 들인다. 운학의 행자(行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운학은 3년여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부지런히 경전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는 한편 참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 영관은 운학 행자의 막힘을 소통시켜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내렸다.
함께 떠났던 벗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운학만 홀로 선방(禪房)에 머물며 뭇 경전들을 섭렵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이름과 형상]名相]에 속박되어 대자유를 누리는 해탈의 경지[解脫地]는 요원하기만 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운학 행자의 마음은 침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자 이면에 숨겨진 오묘한 가르침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시 한 수를 읊는다.
홀연 들려온 소쩍새 소리에 창밖을 보니 봄 빛 물든 온 산이 모두 고향이고녀
忽聞杜宇啼窓外 滿眼春山盡故鄕
며칠 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읊는다.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수많은 청산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운학은 이튿날 아침, 은도(銀刀)로 손수 머리를 깎고 서원(誓願)한다.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문자나 외우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일선(一禪) 대사를 수계사(授戒師), 석희(釋熙) 법사와 육공장로(六工長老), 각원상좌(覺圓上座)를 증계사(證戒師), 영관(靈觀)대사를 전법사(傳法師),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스님이 되는 의식(儀式:得度式)을 올려UT다. 이때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받으니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스님이 된 휴정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 스님 회상에 참예, 인가를 받고 두류산9頭流山:智異山)으로 들어가 삼철굴(三鐵窟)에서 세 철[夏]을 나고 대승암(大乘庵)에서 두 철을 보냈다. 그리고 의신(義神)원통(圓通)원적(圓寂)은신(隱神)등 여러 암자에서 몇 년을 보내며 더욱 정진했다.
하루는 용성(龍城:전북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별마을[星村]을 지나다가 한낮 닭 우는 소리[午鷄聲]에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깨달아 연거푸 두 수의 시를 읊는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네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廳一聲鷄 仗夫能事畢
휴정은 이어서 또 이렇게 읊는다.
홀연 제 집을 발견하니
온갖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그리고는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명종 1년 (丙午,1546)가을, 갑자기 제방을 유력(遊歷)하고 싶은 생각이 일자 간편한 행장으로 길을 떠난다.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 풍악산(楓嶽山:가을의 금강산 이름) 미륵봉에 들어가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철[夏], 향로봉에서 한 철, 성불암(成佛庵)영은암(靈隱庵)영대암(靈臺庵)등 여러 암자에서 각각 한 철을 나고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를 머물렀다. 이때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연산군 때 폐지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일으키고 승려들을 등용하는 승과(僧科)제도를 부활시켜 명종 6년(辛亥,1551) 11월 19일 첫 시험을 실시한다. 휴정은 주위 사람들의 권청(勸請)에 못이겨 응시, 합격자 4백 6명 가운데 수석으로 급제하여 대선(大選)이 된다. 서른네 살 되던 명종 8년(1553) 1월 19일 나라에서 내린 도첩(度牒)을 받고 주지명(住持名:中德)에 오른다. 그는 이해 여름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 고향을 다녀온다.
36세 되던 명정 10면, 전법(傳法)이 되고 석 달 뒤에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되며 다시 석 달 뒤 그해 가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된다. 이로써 승직(僧職)의 최고 지위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된 휴정은 이듬해 보우(普雨)의 후임으로 봉은사(奉恩寺)주지에 취임한다. 그는 여기서 1년 남짓 머물다가 어느날 주지나 판사 등의 명리(名利)가 출가의 본뜻이 아니라 여겨 눈병을 핑계로 모든 승직(僧職)을 버리고 38세 되던 해 다시 지팡이 하나와 바리대 하나, 단벌의 옷만을 챙겨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천석간(泉石間)에서 반년을 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내은적암(內隱寂庵)에서 3년을 지낸 뒤 황령암(黃嶺庵)능인암(能仁庵)칠불암(七佛庵)등의 암자에서 3년을 머문다. 그리고 나서 관동지역의 태백산오대산풍악산을 거쳐 멀리 관서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관음전(觀音殿)과 내원(內院)영운(靈雲)백운(白雲)심경(心鏡금선(金仙)법왕(法王)의 여러 대(臺)와 아득히 너른 천지의 수많은 산천을 두루 편력하는 휴정의 몸은 마치 기러기털[鴻毛]처럼, 풍운(風雲)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휴정은 이렇게 명산대찰을 편력하는 동안 여러 편의 시를 읊었는데 금강산에서 지은 삼몽사(三夢詞)와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가 유명하다.
주인은 손에게 꿈을 얘기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지금 꿈을 얘기하는 두 사람
그 모도 꿈 속의 사람일레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이렇게 삼몽사를 읊조린 휴정은 향로봉으로 올라가 세상의 온갖 명리(名利)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시 한 수를 짓는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맑고 그윽한 달빛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은 묘음(妙音)을 연주하네
萬國都城如蟻 千家豪傑若醯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
향로봉 사는 뒷날 역모(逆謀)의 혐의를 사게 된다. 휴정은 일체의 승직(僧職)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뒤 자신의 빛을 갈무리하여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도(道)를 물으러 찾는 이는 날로 늘어났다. 이 무렵 이른바 ‘기축(己丑)의 옥(獄)’이라 불리는 역모사건(逆謀事件)이 발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기도가 조정에 알려져 그 일당은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했으나 역모에 가담한 무리 중에 승려 출신이 많은데다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절이라는 점이 불교계를 난처하게 했다.
이때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無業)이라는 이가 휴정의 ‘향로봉시’를 들어 마치 모반(謀反)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도 끌어들여 관련이 있는 듯이 무고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은 휴정은 묘향산에서, 유정은 강릉에서 각각 붇잡혀 옥에 갇히게 된다. 휴정은 비록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잡히긴 했으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으며 말은 분명하고 조리 있었다. 선조는 휴정의 억울함을 간파, 즉시 석방하게 한 뒤 그의 시집(詩集)을 열람하고는 뛰어난 문장과 충정(忠情)에 감탄하며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수 [一絶]를 지어 하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葉自毫端出 根非地面生
月來難見影 風動未聞聲
휴정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산승의 향불 사르는 곳에서
잎마다 가을 바람에 서걱거리네
瀟湘一枝竹 聖主筆頭生
山僧香處 葉葉帶秋聲
선조는 또 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내린다.
동해변 금강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걸이 나왔던가
태산 북두처럼 높은 이름
오늘의 여래이어라
東海有金剛 雄賢幾種胎
高名山斗仰 今世是如來
휴정은 임금의 시에 대해 답시를 짓는다.
세상 일 잊고 존재의 실상을 조견하나니
허령한 진면목 어찌 윤회(輪廻)에 들랴
금강산의 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여래이어라
寂照非千世 虛靈豈入胎
金剛山下石 大小自如來
선조는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한 뒤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 14일 상륙한 왜군(倭軍)은 삽시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맹렬한 기세로 북상(北上)했다. 사세가 위급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해 마침내 압록강 근처[龍彎]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휴정이 생각나 좌우에 그의 소재를 묻고 시급히 찾아오도록 명한다[彦幾行狀]. 이때 휴정은 묘향산에서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했다. 선조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나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경은 부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주오….”
휴정은 울면서 다짐한다.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보살(佛菩薩)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휴정의 충성에 감동한 선조는 즉석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을 물러나온 그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모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줄곧 억압 받아온 승려들이었으나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나라과 백성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는 의승병(義僧兵)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강원도 관동(關東)지역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權慄) 장군을 도와 행주(幸州)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휴정은 직접 문도를 1천5백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援兵)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선조 26년(1593) 10월, 의승병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의 복구작업을 폈다. 의승병들의 전공(戰功)을 시기한 유신(儒臣)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나라 조정과 명군진중 및 적진에까지 휴정의 이름은 떨쳤다.
명나라군의 총지휘자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을 비롯, 삼협총병(三協總兵)이하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글월을 보내 휴정의 전공(戰功)을 치하했다. 어떤 이(이여송)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송은 또 송시(頌詩)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보냈다.
공리에 관심 없이
불도만 닦더니
나라일 위급하매
산을 내려왔네
無意圖功利 全心學道仙
今聞王事忽 摠攝下山嶺
선조 27년, 휴정은 사직할 뜻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나이 팔십, 이제 근력이 쇠하였아오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 및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인장(印章)을 반납하고 신이 본래 머물던 묘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이에 임금은 그의 뜻을 아름다이 여기고 늙음을 민망히 여겨 떠나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號)를 내렸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휴정은 또다시 유유자적한 본래의 한도인(閑道人)이 되었다. 선조 37년(甲辰, 1604) 1월 23일, 휴정은 원적암(圓寂庵)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 따라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휴정은 눈발 속에 견여(肩輿)를 타고 가까운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절한 뒤 방장실(方丈室:주지실)로 돌아와KT다.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한 뒤 부처님전에 향을 사른 다음 그는 법상9法床)에 올라 마지막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 그는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影幀)에 시 한 수를 쓴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고녀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그리고는 유정과 처영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5세, 수행 나이[禪臘] 67세였다. 기이한 향내가 방 안에 가득하여 사라지지 않더니 삼칠일(21일) 뒤에 비로소 그쳤다. 제자 원준(圓俊)인영(印英)등이 다비한 뒤 영골(靈骨)한 쪽과 사리 2과를 습득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봉안했다.
또 정골(頂骨) 한 조각은 제자 유정(惟政)자휴(自休) 등이 봉산(蓬山:蓬萊山)으로 받들고 가 그에서 사리 몇 과를 수습하여유점사 북편언덕에 봉안했다. 제자들은 1천여 명에 달했고 그중 당대에 이름을 떨친 스님만도 70여 명이었으며 특히 두각을 나타내 많은 후학(後學)들을 양성한 대종사급(大宗師級:一方宗主) 인물들도 4~5명이었으니 가풍(家風)의 융성함을 알겠다.
저서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 《청허당집》8권, 《회심곡(回心曲)》1편이 세상에 유통되고 Dlt다. 문인 언기(彦機)의경(儀)쌍흘(雙)등의 우러사(月沙) 이정귀(李廷龜)에게 비석글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1630).
인조 9년(崇禎4, 1631년) 봄, 문인 태능(太能)원철(圓徹)해안(海眼)등이 계곡(谿谷)장유9張維)에게 비석글 짓기를 구걸하여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대둔사(大屯寺)에 비석을 세웠다. 그 이듬해(壬申, 1632) 가을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전남 해남의 두륜산 대둔사(大屯寺:大興寺)에 보관시켰다.
대둔사에는 의승대장 황금가사(黃錦袈裟) 한 벌, 홍금(紅錦)가사 한 벌, 백금(白金) 장삼 한 벌, 벽옥의 바리대[碧玉鉢] 3좌(座), 가죽신[唐鞋] 2켤레, 검은 거문고[烏瑟]와 염주 두가지, 옥사자(玉獅子) 모양의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의승과 합격증서[紅牌] 1장, 낙산사 주지 임명장 1장, 유점사 주지 임명장 1장 등의 휴정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제자 영잠(靈岑)대사가 휴정의 삼년상[三年服]을 마친 뒤 메고와 보관한 것으로 휴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휴정은 임종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적한 뒤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둔산에 보내어 보관케 하라고 당부했었다. 뒷날 나라에서는 임진란에 공이 큰 의승장(義僧將)들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념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때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사명당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의 표충사(表忠祠)다. 여기에는 휴정사명영규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대둔사에 있던 휴정의 법손(法孫)들은 크게 개탄했다. 휴정이 입적한 뒤 1백85년 되던 해 정조 12년(乾陵 戊申, 1788) 대둔사 스님 계홍(戒洪)과 천묵(天)은 글을 올려 임금께 탄원했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대둔사에 대사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릴 수 있게 사당을 세워달라는 요지였다. 이에 임금은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할 것을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는 한편 사명(四溟)과 뇌묵(雷)을 좌우에 배향(配享)토록 했다. 이듬해(己酉, 1789) 4월 위령제(慰靈祭)를 봉행함에 조정에서는 예조정랑(禮曺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향(祭享)에 참석하게 했다. 홍문관 수찬(修撰) 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祭文)은 휴정의 충의(忠義)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 옛날 임진년
왜구들 침략할 제
불교계의 충의는
휴정이 으뜸이라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인륜을 다했고녀
지혜의 칼 빼어들고 서편으로 달려가니
의로운 이들 그를 따랐네
명군(明軍)과 함께
난리를 평정하고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돌아오니
공훈(功勳)더욱 빛났어라
당시 임금 공로 기려
하사한 글 찬란커늘
어찌하여 표충사(表忠寺)는
유정(惟政)을 우선했나
머물던 옛 절[故境]
웅대한 새 사당(祠堂)지어
법풍을 세우고 공로를 권장하니
뭇 사람 청에 따른 임금의 윤허일세
편액과 제물(祭物) 내리신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에
외진 남녘 사람들 어깨 으쓱하니
비록 승려지만 존경스러워라.
승지(承旨) 정약용(丁若鏞)이 쓴 상용제문(常用祭文)에서도 그의 충의는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선정(定)과 지혜(慧) 모두 탁월하고
충성과 의리 다같이 융성하여라
큰스님 나라 위한 의거(義擧)
두 제자[二徒]가 가풍이었네
수많은 왜적(倭賊) 사로잡으니[獲醜孔阜]
임금은 그 공적(功績) 적게 했네
솥과 제기(祭器)에 기록 새겨지고
제물(祭物) 풍성하도다
봄빛 완연하매
사모의 정 더욱 간절하여라
영가(靈駕)들의 천도(薦度)를 위해
임금님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네.
삼가 홍제존자사명당선사(弘濟尊者泗溟堂禪師)와 우세존자뇌묵당선사(佑世尊者雷堂禪師)를 좌우에 모시고 배향(配享)한다. 홍문관 제학(提學) 서유린(徐有隣)이 <표충기적비(表忠記蹟碑)>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정조 18년(甲寅, 1794),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西山大師畵像堂)의 명문(銘文)을 지을 때 서공(徐公: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알려진 것이다.
다섯 집의 복호결(復戶結)과 보솔(保率) 30명으로 하여금 제향[公享]을 지내도록 했다. 고종 8년(同治10, 1871)그동안의 재정적 지원을 끊고 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私享]을 봉행토록 했다. 제문(祭文)은 구계각안(九階覺岸)이 지엇다. 대둔사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연화경(蓮華經)》 1권과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연화경》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손수 쓴 것이고 병풍은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