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충순(蔡忠順)은 사서에 세계(世系)가 남아있지 않다.
목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되었는데, 왕이 병석에 누워서 채충순은 유진(劉瑨)·최항(崔沆)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숙직하였다.
하루는 왕이 채충순을 불러 침실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에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과인의 병은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소. 듣건대 바깥에서 〈왕위를〉 엿보는[窺窬]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경은 이를 알고 있소?”라고 물었다. 〈채충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도 이 소문을 언뜻 들은 적이 있으나, 그 실상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베개 옆에 있던 편지를 집어 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것은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글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김치양(金致陽)은 외람되게 분수에 넘치는 바람으로 〈왕위를〉 넘보고서, 사람을 시켜 물건을 보내며, 심복들을 널리 심어놓고 있는데, 저에게도 거듭 가만히 도우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타일러 깨우치고 이를 거절하였지만, 이 일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다른 편지 한 통을 그에게 주었는데,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올린 글이었다. 거기서 이르기를,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 포위하여 협박하고 있습니다. 술과 음식을 보냈지만 신은 독약을 의심하여 먹지 않았고, 까마귀와 참새들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술책이 이 같이 위험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채충순이 편지를 보고 나서, 아뢰어 이르기를, “형세가 급박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아침이나 저녁에 세상을 뜰 것[朝夕入地] 같은데,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 남아 있소.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품었으므로,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그를〉 바로잡고 도와서 사직이 다른 성(姓)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채충순이 나와서 최항에게 의논하자, 최항도 말하기를, “신도 항상 근심하였는데, 지금 임금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사직의 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충정이 감찰어사(監察御史)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채충순과 최항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임금께서 병석에 누워 계시고, 간악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므로, 사직이 다른 성씨에게 넘어갈까 우려스럽습니다. 〈전하의〉 병세가 매우 위독하시다면, 마땅히 태조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채충순 등이 거짓 놀란 체하며 말하기를, “태조의 후손이 어디 계시오?”라고 하였다. 〈고영기가〉 말하기를, “대량원군이 바로 그 분이시니, 후계자[主鬯]가 되실 만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채충순 등도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 소문을 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당연히 하늘이 내린 명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충정이 다시 고영기를 보내어 말하기를, “제가 직접 가서 이 일을 의논하고 싶으나, 수행원[騶從]이 많아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을까 염려되니, 두 분께서 왕림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충순이 최항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진실로 종묘사직과 관련된 것이므로, 가서 그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를〉 찾아가 논의를 정하였다.
당시 대량원군은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에 있었다. 채충순이 대궐에 들어가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마땅히 문반과 무반 각 1인씩을 뽑아 군교(軍校)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채충순은 최항 및 고영기 등과 의논하여, 드디어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천거하여 아뢰었다. 채충순 등이 다시 의논하여 아뢰기를, “군교들이 많아 곧 행군이 더디게 되면, 간악한 무리들이 먼저 손을 쓸까 걱정됩니다. 마땅히 십여 명만 보내, 지름길로 가서 영접해 와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기고 이르기를, “내가 친히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보내 늦지 않도록 하오. 만약 〈나의〉 병이 나아서 성종께서 짐을 책봉하였던 전례와 같이 일찌감치 명분(名分)을 정하면, 〈왕위를〉 넘겨다보는 자들이 없을 것이오. 짐에게 아들이 없어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니, 이는 나의 허물이오. 종묘사직의 원대한 계획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으니, 경 등은 각자 진심을 다하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니, 채충순도 울었다.
왕이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대량원군에게 주는 글을 초안하도록 하고 몸소 먹을 갈아주자, 채충순이 이르기를, “제가 갈아서 쓰겠으니, 청컨대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마음이 너무 바빠서 힘든 것도 알지 못하겠소.”라고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대사는 평소 미리 결정해야 인심이 안정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병석에 눕자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몰래 엿보고 있으니, 이는 과인이 미리 대비하지 못해 명분(名分)이 될 만한 이를 정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은 태조의 적손이므로 마땅히 속히 출발[上道]하도록 하라. 과인이 죽음[大期]에 이르기 전에, 얼굴을 마주해 종묘사직을 부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더 살게 되면, 경을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또 그 끝에 쓰라고 명령하여 이르기를, “도로가 험하니 간악한 놈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까 두렵다. 부디 조심하여 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 합문사인(閤門舍人) 유행간(庾行簡)이 〈대량원군을〉 맞아들이려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왕은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채충순에게 조심시키고, 유행간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서신을 황보유의 등에게 주어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하여 드디어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이가 현종(顯宗)이다.
현종(顯宗)은 채충순(蔡忠順)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고, 얼마 후에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兼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 채충순이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왕이 광주(廣州)에 머무르니, 수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두려워 흩어져 도망하였으나, 오직 채충순은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전임되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
채충순(蔡忠順)이 아뢰기를, “군사(軍士) 중에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이 있으면,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부모 곁에서 봉양하게 하고, 문무 관원으로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되 다른 형제가 없는 사람은 지방관[外職]에 임명하지 말고, 그의 부모가 병이 나면 200일 휴가를 주어 돌보게 하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현종(顯宗)〉 12년(1021)에 〈채충순은〉 검교태위 제양현개국자(檢校太尉 濟陽縣開國子)로 책봉되고, 식읍 500호를 받았으며, 보국공신(輔國功臣) 칭호를 더 받았다.
얼마 후에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유수(內史侍郞平章事 兼西京留守)로 임명되었고, 태자소사(太子少師)를 더 받았다.
현종 18년(1027)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고,
21년(1030)에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가 되었는데,
병 때문에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였지만 허락 받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치사(致仕)하였다.
정종 2년(1036)에 죽으니,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