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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1 편
공생애의 시작
. 중도자 위원회
. 활동시기 : 서기 27년 1월 19일~ 4월 6일
. 활동지역 : 갈릴리 ~ 예루살렘
141:0.1 서기 27년 1월 19일, 그 주의 첫날, 예수와 열두 사도들은 벳세다에 있는 그들의 본부에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12명은 4월 유월절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과, 요르단 계곡을 따라 길을 가려는 것 외에는, 주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도들의 가족과 다른 제자들이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러 모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오가 되기까지 세베대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141:0.2 출발 직전, 사도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자, 안드레가 그를 찾으러 나섰다. 잠시 뒤 안드레는 해변을 따라 내려간 배 안에 앉아 있는 예수를 발견했고,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열두 사도들은 주가 슬퍼하는 때를 종종 보았고, 때때로 깊은 생각에 몰두한 순간들을 보았지만, 주가 눈물 흘리는 모습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기 전에 주가 이렇게 슬픔에 잠긴 것을 보고 안드레는 다소 놀랐고, 예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려는 이 중요한 날에, 왜 당신은 우시나요? 우리중 누가 당신께 무례하였습니까?” 안드레와 함께, 열두 사도에게 합류하러 가면서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 중 누구도 나를 슬프게 한 적은 없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 아버지 요셉의 집안에서 아무도 기억하여 성공을 빌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룻은 나사렛에 있는 오빠 요셉을 방문중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자존심, 실망, 오해, 상처로 인한 작은 원망으로 그를 멀리하였다.
1. 갈릴리를 떠나다
141:1.1 가버나움은 티베리아스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예수의 명성은 갈릴리 전역은 물론 그 너머에까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예수는 헤롯이 곧 자기 일에 주목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도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유대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100명 이상의 신도들이 그들과 함께 가기 원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요단강을 내려가는 길에 사도단과 동행하지 말 것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뒤에 남기로 동의했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며칠 안에 주의 뒤를 쫓아왔다.
141:1.2 첫날 예수와 사도들은 타리케아까지만 여행했고, 거기서 밤을 쉬었다. 이튿날 펠라 가까이 요단강의 한 지점, 요한이 1년 전쯤에 전도하고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까지 이어갔다. 여기서 2주가 넘게 머물며 가르치고 설교했다. 첫째 주가 끝날 무렵,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수와 열 두명이 머무는 진영 근처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갈릴리, 페니키아, 시리아, 데카폴리스, 페레아, 그리고 유대에서 왔다.
141:1.3 예수는 대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군중을 나누고, 오전과 오후의 집회에 설교자들을 배정했다; 저녁 식사 후에 예수는 열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지 않았지만, 이전의 가르침을 복습하고 그들의 많은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게 어느 날 저녁에, 그는 열둘에게 자신이 이곳 근처의 언덕에서 보낸 40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141:1.4 페레아와 유대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관심이 있었다. 사도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큰 진전을 이루었는데, 그들이 요한의 설교를 결코 훼손하지 않고, 이때 새로운 제자들에게 세례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에게 항상 걸림돌이 된 것은, 예수가 만약 요한이 말한 대로라면, 왜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하지 않았냐는 점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사랑하는 지도자가 겪은 잔인한 죽음을 막지 않은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41:1.5 안드레는 밤마다 동료 사도들에게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과 잘 지내야 하는 섬세하고 어려운 일을 조심스럽게 지도하였다. 예수의 공적 사역의 첫해 동안, 예수의 추종자들 중 3/4 이상이 요한을 따르며 그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이었다. 서기 27년의 해는 페레아와 유대에서 요한의 일을 조용히 이어받으며 보냈다.
2. 하나님의 법과 아버지의 뜻
141:2.1 펠라를 떠나기 전날 밤, 예수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나라에 대해 추가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주는 말했다: “너희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이제 나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렸다. 모든 나라에는 왕위에 앉아서 나라의 법을 선포하는 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유대 민족은 땅의 모든 민족을 영화롭게 다스린다는 개념,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이 기적의 힘을 가진 자리에서 온 세상의 법을 선포한다는 하늘나라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내 자녀들아, 너희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영의 이해로 듣지 않는다. 하늘나라는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인정되는 것임을 나는 선언한다. 맞다, 이 나라에는 왕이 있고, 그 왕은 내 아버지이자 너희 아버지이다. 우리는 그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이지만, 그 사실을 넘어서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라는 변화된 진리가 있다. 내 삶에서 이 진리는 모든 이에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 아버지 또한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손으로 만든 보좌가 아니다. 무한자의 보좌는 하늘의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영원한 거처이며, 그는 모든 것을 채우고 우주들 위에 그의 법을 선포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그가 보낸 영을 통해 땅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혼 속에서 다스리신다.”
141:2.2 “너희가 이 나라의 백성일 때, 너희는 정말로 우주 통치자의 법을 듣게 된다; 그러나 내가 선포하게 된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너희들은 아들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너희는 스스로를 모든 전능한 왕의 법에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신성한 아버지의 특권을 가진 아들로 보게 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의 뜻이 너희의 법이 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진실로 너희의 뜻이 될 때에 너희는 참으로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니,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서 확고한 체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너희의 율법일 때, 너희는 고귀한 노예 백성이다; 그러나 신성한 아들 신분이라는 이 새로운 복음을 믿을 때, 내 아버지의 뜻은 너희의 뜻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 하늘나라의 해방된 아들들의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된다.”
141:2.3 몇몇 사도들은 이 가르침의 일부를 이해했지만, 야고보 외에 이 엄청난 선언의 전체적인 의미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고, 이후 봉사하는 여러 해 동안 그들의 사역을 기쁘게 하는 힘이 되었다.
3.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다
141:3.1 주(Master)와 사도들은 아마투스 근처에서 거의 3주 동안 머물렀다. 사도들은 매일 두 번씩 군중에게 설교를 계속하였고, 예수는 안식일 오후마다 설교했다. 수요일의 여가 시간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드레는 안식일 예배 동안에는 모든 사도가 함께 봉사하고, 주 6일 중 매일 두 사도들이 쉬도록 하였다.
141:3.2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대중 설교의 대부분을 맡았다. 빌립과 나다니엘, 토마스와 시몬은 개인을 상대로 상당히 일했고, 특별히 질문자들을 위한 학급을 운영했다; 쌍둥이는 일반적인 치안 감독을 계속하였고, 한편 안드레, 마태, 유다는 비록 각각 상당한 종교적 일을 했어도, 세 명의 일반적인 관리 위원회로 발전하였다.
141:3.3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새로운 제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오해와 불화를 조정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이 며칠에 한번 꼴로 벌어지곤 했지만, 안드레는 동료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분쟁 당사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합의에 이르도록 가까스로 유도했다. 예수는 이 모든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 난관들을 적절히 조정하는데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들이 이런 난감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도 제안을 한 적이 없었다. 안드레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예수에게 올 때, 그는 항상 "주인이 손님들의 집안 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현명한 부모는 결코 자기 자식들의 사소한 싸움에 편을 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141:3.4 주는 사도들, 그리고 모든 제자를 다루는 온갖 일에 큰 지혜를 보이고 완전한 공정성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들을 통달한 분이었다; 그의 personality 포스와 결합된 매력 때문에 그는 동료 인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소박하고, 방랑하며, 집 없이 사는 그의 일생에는 존경심을 일으키는 미묘한 힘이 있었다. 그의 권위있는 교육 방식에는 지적 매력과 영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명쾌한 논리, 추리의 힘, 영리한 통찰력, 빈틈없는 정신력, 비할 데 없는 침착함, 숭고한 관용 등이 있었다. 그는 순수하고, 강인하고, 정직하고, 겁이 없었다. 이 모든 신체적, 지적 영향들과 함께, 또한 그 안에 있었던 personality-인내심, 부드러움, 온순함, 온화함, 겸손함과 연관된 모든 존재의 영적 매력들이 주의 존재 가운데서 나타났다.
141:3.5 나사렛 예수는 정말 강하고 힘찬 personality를 지녔다; 그는 지적 힘이자 영적인 요새였다. 그의 personality는 추종자들 중 신앙이 깊은 여인들 뿐 아니라, 교육받은 지식인 니고데모, 힘센 로마 군인에게도 마음을 끌었는데, 십자가에서 경계를 섰던 그 군인, 주가 돌아가시는 것을 다 지켜본 후,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거친 갈릴리의 어부들이 그분을 주(Master)라고 불렀다.
141:3.6 예수의 그림들은 매우 불행한 경우를 묘사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그림들은 청년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예수가 너희 미술가들이 보통 묘사해 왔던 그런 사람이라면, 성전의 상인들은 그 앞에서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위엄 있는 남성이었다; 선했지만 자연스러웠다. 예수는 온화하고, 다정한, 부드럽고 친절한 신비주의자를 취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역동적이고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선한 의도뿐 아니라 실제로 선을 행하며 다녔다.
141:3.7 주는 결코 “게으르고 꿈꾸는 자들아, 나에게 오라”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 오라. 너희에게―영적 힘―을 주리라.”고 말했다. 주의 멍에는 정말로 가볍지만, 그럼에도 주는 결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각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 멍에를 지고 가야만 한다.
141:3.8 예수는 자만심과 이기심을 희생한, 희생을 통한 승리를 나타냈다. 자비를 보임으로, 모든 원한, 불만, 분노, 이기적 권력과 복수에 대한 욕망에서 영적 구원을 나타내려 했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후에 그는 죄를 용인하거나, 불의를 가까이 하라 조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가 용서를 가르치려고 더 의도한 것은 "자신의 personality에 대한 악한 대우, 개인의 존엄성 대한 상처에 저항하지 말라" 것이었다.
4.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141:4.1 아마투스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개념을 가르치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 아버지는 땅에서 그의 실수하는 자녀들에게 손해되는 기록에 주력하는 크고 높은 기록자가 아니며, 이후에 그들이 온 창조물의 공정한 심판자 앞에 서게 될 때 그들에게 사용될 죄와 악을 기록하는 분이 아님을 사도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든 사람 위에 있는 왕으로, 심지어 민족의 아버지로 생각해 왔지만, 이전에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인간 개개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다.
141:4.2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는 토마스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이시며, 종교―나의 복음―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고 인정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이 두 개념을 내 삶과 가르침에서 분명히 하려고 육체로 너희들 가운데 있다.”
141:4.3 예수는 또한 사도들에게 종교적 의무로서 동물 희생제라는 개념을 해방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희생 제사의 종교에 익숙한 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느렸다. 그렇기는 해도, 주는 가르치는 데 지치지 않았다. 한 예로 모든 사도들의 mind에 미치지 못할 때, 그는 교훈을 다시 말씀하고, 계몽의 목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비유를 이용하곤 했다.
141:4.4 이때 예수는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고 병자를 돌보는” 임무에 관하여 더 자세히 열둘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는 온전한 인간―남자나 여자 개인을 구성하는 육체, mind, 영의 연합―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다. 예수는 동료들에게 그들이 마주칠 세 가지 형태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인간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도 설명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식하도록 가르쳤다.
1. 육체의 병―일반적으로 신체적 질병으로 여겨지는 고통.
2. 불안한 mind―육체적인 고통이 아닌 감정적, 정신적 어려움과 불안으로 여겨지는 고통.
3. 악한 귀신에 들리는 것.
141:4.8 예수는 그 시절에 흔히 더러운 귀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 악한 영들의 본질, 그리고 그 기원에 관하여 몇 번 사도들에게 얼마큼 설명했다. 주는 악한 귀신에 들린 것과 미친 것의 차이를 잘 알았지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초기 역사에 관한 그들의 제한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이 문제를 그들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악한 영들을 언급하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라가고 나면, 그들은 사람들을 더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하늘나라가 큰 능력과 영적 영광을 누리게 될 그 때에 나는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쏟아 부을 것이다.”
141:4.9 사도들은 주마다, 달마다, 이 해 전체를 통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갈수록 더 관심을 기울였다.
5. 영적 일치
141:5.1 아마투스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모든 저녁 회의 중 하나는 영적 일치에 관한 토론이었다. 야고보 세베대가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같은 관점으로 보고 서로 더 조화를 이루며 지낼 수 있을까요?” 예수는 이 질문을 듣고 정신이 동요되었다. 너무 흥분하여 대답했다. “야고보, 야고보, 내가 언제 너희에게 같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느냐? 나는 세상에 영적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개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사회에서 조화되고 형제 사이의 평화를 얻는 대가로 자유로운 personality와 영적 독창성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사도들아,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적인 일치이다―그리고 그것은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전심으로 헌신하는 기쁨에서 체험할 수 있다. 영적으로 같아지기 위하여 같은 눈으로 보거나 같은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영적인 일치란 너희 각자에게 하늘 아버지의 영 선물이 깃들고, 그 영에 점점 더 지배되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너희 사도들의 조화는 각자가 가진 영적 희망의 기원, 본질, 운명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자라날 것이다.
141:5.2 “이런 방법으로 너희 각자에게 깃들어 있는 파라다이스 영이 서로 동일함을 인식하는 상호의식에서 자라나 영적 목적과 영적 이해의 완전한 일치를 체험할 수 있다; 너희의 지적 사고, 기질의 감정, 사회적 행동에서 개인의 태도가 극적으로 다양해도, 너희는 이 모든 깊은 영적 일치를 누릴 수 있다. 너희의 personality는 신선하게 다양하고 뚜렷이 다를 수 있지만, 너희의 영적 본성과 신성한 예배와 형제애의 영적 열매는 그렇게 일치되어, 너희의 삶을 보는 모든 사람은 이 영적 동일성과 혼의 일치를 확실히 인식할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했고,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행할지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네 자신의 원래 mind, 몸, 혼 자질의 방식에 따라 그러한 봉사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하나님(God)의 봉사에 대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141:5.3 “너희의 영적 일치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항상 개별 신자들의 삶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첫째, 너희는 삶의 봉사를 위한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너희는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 둘째, 너희 모두는 공통된 존재 목표를 가지고 있다; 너희 모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고자 하며,이를 통해 너희가 그와 같이 되었음을 온 우주에 증명하게 될 것이다.”
141:5.4 예수가 열두 명을 훈련시키는 동안 여러 번 이 주제로 되돌아갔다. 선한 사람들의 종교적 해석이라도, 주를 믿는 자들이 그런 해석에 따라서 독단화 되고 표준화 되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신조를 공식화하고 전통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사도들에게 거듭 경고했다.
6. 아마투스에서 보낸 마지막 주
141:6.1 아마투스에서 마지막 주의 끝 무렵,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에게 한 페르시아인 테헤르마를 데려왔다.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가버나움에 왔다. 예수와 사도들이 요단강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주(主)를 찾으러 출발했던 것이다. 안드레는 테헤르마를 시몬에게 교육 받도록 소개했다. 시몬은 테헤르마를 '불 숭배자'로 여겼지만, 테헤르마는 불이 단지 순수하고 거룩한 분의 가시적인 상징일 뿐이라고 힘들여 설명했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후, 그 페르시아인은 며칠 동안 머물며 가르침을 듣고 설교를 듣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141:6.2 열심당원 시몬과 예수만 따로 있을 때, 시몬은 주에게 물었다: “왜 나는 그를 설득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는 나에게 그렇게 저항하고, 당신의 말씀은 그렇게 쉽게 귀를 기울일까요?” 예수는 대답했다: “시몬, 시몬, 내가 몇 번이나 너에게 구원의 길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갈급한 그들의 혼에 무엇인가를 넣으려 수고해야 한다고 내가 얼마나 자주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라. 그러면 위대하고 살아있는 진리가 곧 모든 심각한 오류를 없앨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는 기쁜 소식을 들으면,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쉽게 설득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다 준 것이다. 시몬, 인자(人子)가 처음 너희에게 왔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을 비난하며 새롭고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선포했느냐? 나는 너희가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라, 너희 조상이 부분적으로만 본 것을 완성된 비전으로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러니 시몬, 가서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전하라. 네가 하늘나라 안에 한 사람을 안전히, 확실히 들여보냈을 때, 그런 사람이 질문을 가지고 오면 그때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 혼이 차츰 앞으로 나아가는 데 관련된 가르침을 전할 때이다.”
141:6.3 시몬은 이 말씀들을 놀라워했고, 예수가 지도하신 대로 시몬은 그렇게 하였고, 페르시아인 테헤르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 이들 중 하나로 세어졌다.
141:6.4 그날 밤, 예수는 사도들에게 하늘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해 강론했다. 그가 부분적으로 말한 내용은 이러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너희는 다시 태어난다. 오직 육체로부터 난 자에게는 영의 깊은 일을 가르칠 수 없다. 영의 깊은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그들이 영에게서 태어났는지를 보라. 너희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하지 말고, 먼저 그들을 성전에 들어가게 하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아들 됨에 대한 교리를 강론하기 전에 사람들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개하라.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언제나 참으라. 그것은 너희의 나라가 아니며, 너희는 단지 대사일 뿐이다. 단지 이렇게 외치라: '이것이 하늘나라다―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그분의 아들이며, 전심으로 그것을 믿는다면, 이것이 기쁜 소식, 너희의 영원한 구원이다.'”
141:6.5 사도들은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아무 제안도 하려 하지 않아서 무척 실망했다. 중요한 세례 문제에서도 예수는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요한은 정말로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영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7. 요단 강 건너 베다니에서
141:7.1 2월 26일, 예수와 그의 사도들, 그리고 많은 추종자들이 요단강을 따라 베다니 근처 얕은 물가로 향했다. 이곳은 요한이 처음 다가올 하늘나라를 선포한 곳이었다. 예수와 사도들은 여기에서 4주간 머물며 가르치고 설교한 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41:7.2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머무르던 둘째 주에,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강 건너 여리고 남쪽 산으로 가서 3일간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서 주는 이 세 사람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많은 새롭고 심오한 진리를 가르쳤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이 가르침을 재구성하고 분류할 것이다:
141:7.3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선한 영적 실체를 맛본 후 세상에서 살 때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하늘나라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어, 결국 믿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길에 대해 묻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려 애썼다. 이처럼 진리를 찾는 모든 성실한 사람들은 영원하고 신성한 영적 실체가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보장해주는 믿음의 선물인 기쁜 소식을 들으며 항상 기뻐한다.
141:7.4 주(主)는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들에게 그들의 유일한 일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드러내는 것이며―각 사람이 아들임을 의식하도록 인도하고, 다음에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믿음의 아들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본질적인 계시는 예수 안에서 이뤄졌다. 그는 정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예수의 종교는 전적으로 그의 땅의 삶을 기반으로 둔다.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개인의 종교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책, 율법, 또는 다른 형태의 인간 조직을 남겨놓지 않고 떠났다.
141:7.5 예수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영원한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왔으며, 모든 다른 인간 관계보다 영원히 우선해야 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친밀한 영적 교제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회적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유일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는 영적인 기쁨과 신성한 교제였고, 다음 세상에서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영적 실체의 진보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141:7.6 예수는 하늘나라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진리를 크게 강조했다. 그 진리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의 성취와, 진리를 진지하게 인식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얻는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는 육신으로 나타난 진리였으며, 그가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신 후, 모든 그의 자녀들의 마음에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41:7.7 주는 사도들에게 땅에서 한 시대 전체를 위하여 진리의 본질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도들은 종종 그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그 말씀은 실제로 다른 세계들에게 영감을 주고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새롭운 원칙적 삶을 예시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는 정말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인간으로서 삶을 살았다.
141:7.8 예수는 하늘나라의 계획을 펼치면서 아버지를 반드시 인식하게 하려고 “지상의 위대한 사람들”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전의 대부분의 진화 종교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바로 그 계층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전 세계적이고 심지어 우주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선언을 매우 대담하고 강력하게 했기 때문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조차도 예수가 아마도 제 정신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유혹을 받았다.
141:7.9 주는 이 사도들에게 이 수여 사명이, 땅에 있는 몇 사람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우주 전체에 걸쳐, 모든 세계의 모든 민족을 위해 삶의 기준을 세우고, 또 보이려고 왔다는 사실을 전하려 하였다. 이 기준은 가장 높은 완전, 아니 우주 아버지의 최종 선의 경지까지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141:7.10 그는 물질적 mind에게 영적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 파라다이스에서 파송된 선생으로서 활동하러 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렇게 했다. 그는 설교자가 아니라, 선생이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베드로는 예수보다 훨씬 더 유능한 설교자였다. 예수의 설교가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독특한 personality 때문이었으며, 강력한 웅변이나 감정적 호소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는 사람의 혼에게 직접 말했다. 그는 인간의 영적인 선생이었지만, mind를 다루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41:7.11 이 기회에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땅에서 그가 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하늘에 있는 동료”가 당부한 것에 제한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은 자신 수여에 앞서 파라다이스 형 임마누엘이 준 지침을 언급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러 왔다고 말했다. 전심으로 한 가지 목적에만 동기가 있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있는 악에 대해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141:7.12 사도들은 예수의 꾸밈없는 친절을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비록 그를 가까이하기 쉬웠어도, 주는 언제나 어떤 인간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인간보다 높이 살았다. 한순간이라도 순전히 어떤 인간적 영향에 지배를 받거나 허약한 인간적 판단에 지배된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의 의견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오해를 바로잡거나 잘못된 것에 불쾌감을 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141:7.13 예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것에 야고보는 놀랐다. 주는 좀처럼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결코 흥분하거나, 화가 나거나, 당황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슬픔에 잠겼지만,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141:7.14 모든 신성한 자질이 있었는데도, 결국은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요한은 더욱 분명히 인식했다. 예수는 사람들 중에서 인간으로 살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그의 개인적 삶에서 매우 인간적이었고,동시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이기심이 없었다.
141:7.15 비록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때 예수가 하신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은혜로운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그들은 그 말씀을 통해 이후의 사역을 풍성하고 기쁘게 했다. 예수가 새로운 시대의 계획을 그들에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 여리고에서 일하다
141:8.1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4주간의 체류 동안 매주 여러 번, 안드레는 사도들을 2명씩 짝지어, 하루나 이틀 동안 여리고로 가도록 했다. 세례 요한은 여리고에 많은 신도를 두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더욱 진보된 가르침을 환영하였다. 이 여리고 방문에서 사도들은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를 비로소 더 구체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들은 성읍의 모든 집을 방문하여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141:8.2 사도들은 여리고에서 일부 대중 사역을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주로 전보다 조용하고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이 병자에게 매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고통받는 자들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다. 여리고에서 열두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가 처음으로 충분히 수행되었다.
141:8.3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여리고에 들렀고, 그곳에서 예수와 회담하려고 온 메소포타미아 대표단과 마주쳤다. 사도들은 여기서 하루만 보낼 계획이었지만, 동부에서 온 이 진리 탐구자들이 도착하자 예수는 그들과 함께 3일을 보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새로운 진리를 알고서, 흐뭇한 마음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9.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다
141:9.1 3월의 마지막 날 월요일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파른 여행길에 올랐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를 만나려고 요단강에 두 번 내려온 적이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기를 바라는 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그 누이들의 집에서, 주(主)와 사도들이 본부를 만들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1:9.2 요한의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의 베다니에 남아서 대중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고, 예수가 나사로의 집에 다다랐을 때 오직 열두 사도가 그를 동반하였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여기서 예수와 사도들은 닷새 동안 머물며, 쉬고 원기를 회복했다. 그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봉사할 수 있는 곳, 주(主)와 사도들이 그들의 형제의 집에 있는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삶에서 큰 사건이었다.
141:9.3 4월 6일 일요일 아침,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주와 열두 사람이 모두 예루살렘에 함께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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