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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부문 1위, 李東元목사와 지구촌교회의 성공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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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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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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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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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보기]
보도매체 월간조선 5월호(1) 보도기자 李 根 美
설교부문 1위」李東元 목사와 지구촌 교회의 성공비결 無소유의 정신으로 일군 山中교회
車도 없이 전세집에 살면서 著書수입을 교회에 바친다
● 120억원의 교회 재산을 전부 高校설립에 넣기로 결정 ● 7년 만엔 출석교인 1萬, 재적교인 2 萬 ● 大卒 이상교인이 60% ● 「한국에서 설교를 가장 잘 하는 목사」로 꼽혀 ● 65세에 조기 정년 퇴직 예고 ● 유료세미나 文化 정착
산 속에 숨어 있는 교회
한국 교회는 묘하게도 한국의 경제부흥과 비슷한 성장궤도를 보 이고 있다. 고도 성장시기인 1970년대에 한국 개신교도 숫자는 400%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를 거치면 서 성장세가 점차 둔화되더니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침체기 를 겪고 이다. 한국 교회가 1200만 성도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이 이미 수년이 지났다. 이런 가운데 1994년에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에 위치한 지구촌교 회가 7년 만에 출석인원 1만여 명으로 불어나는 경이적인 성장세 를 보여 이목을 끌고 있다. 1만명 가운데 장년 출석만 매주 7000여 명에 이른다. 현재 재적인원은 2만여 명이다.
근년 들어 교인이 매년 1000명씩 늘어나는 일은 全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지구촌교회에 가본 사람이라면 1000 명이 얼마나 경이로운 숫자인지 실감할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 1-l번지라는 주소가 말해 주듯 지구촌교회는 산 속에 숨어 있다. 도로 옆에 「지구촌교회」라는 작은 팻말이 있고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입간판이 서 있을 뿐이다. 지구촌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좁은 산길을 택시를 타고 올라갈 때 「얼마나 자신 있으면 이런데다 교회를 세웠을 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교회로 올라가는 길 건너편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지구촌 교회가 현재 건물을 매입해 이사온 1998년만 해도 수지2지구 는 허허벌판이었다. 수지읍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현재 수지 1, 2지구를 합쳐 인구가 12만명으로 늘어났고 수지 지구에만 교회가 150여 개에 이른다. 지구촌교회는 수지 지구를 비롯한 용인시와 인근 분당 신도시를 합쳐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30∼40대가 60%
지구촌교회 청년부 趙尙勳(조상훈) 목사는 지구촌교회를 「원하 는 사람들만 오는 교회」라고 말한다. 『위치가 이런데다 주차장이 좁아서 무작정 데려올 수도 없습니 다. 자발적으로 출석을 원하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죠. 李東元 (이동원) 목사님께서도 개인적으로 전도는 하되 교회를 대내외적 으로 홍보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어요. 다른 교회를 보호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하자는 거지요. 1993년 11월 李목사님께서 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 수지로 왔는데 예배를 드리고 보니까 주변에 작은 교회가 몇 군데 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어떤 사람들이 지구촌교회에 출석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촌교회 비전위원회는 1999년 1월부터 3월까지 「지구촌교회 예배 참석자들의 교회활동 및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라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교인 가운데 경기도 성남·분당에서 출석하는 교인이 54.4%, 서울에서 출석하는 교인이 16.8%, 수지 지역에서 출석하는 교인이 20%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분당선 미금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을 때 市 경계선을 넘어 선다는 이유로 15분 거리인데도 7000원을 받았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다니기 힘든 곳이어서 지하철역과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교회에서 운행하고 있었다.
지구촌교회 전체 교인 가운데 30∼40대 비율이 60%에 이르며 남녀의 비율은 5대5, 大卒·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60%이다. 박사학위 소지자가 300여 명에 이르며 의사, 변호사 등 전문성 을 가진 직업의 종사자가 30%에 이른다. 교인의 97%가 高卒 이상으로 한국인 평균 교육수준이나 한국 갤럽이 조사한 대도시 교 인의 교육수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다.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자 교파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지구촌교회를 순방하러 오는 인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찾아오는 이가 너무 많아 방문객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비용을 따로 책정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개척 성공률은 10% 미만이라고 한다. 보통 1년 안에 재정적으로 자립하면 성공한 개척교회로 본다고 하는데 1년에 100명이 모이면 대단한 성공이며 60명만 넘어도 일단 자립 가능성이 있는 교회라고 한다. 지구촌교회는 개척 첫해에 1000명이 넘은 뒤 매년 1000여 명씩 늘어났다. 지역적인 여건과 침례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1만명 출석은 대단한 것이라고 한다. 1200만명의 개신교도 가운데 침례교인은 100 만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는 지구촌교회가 서울 강남에 자리잡았다면 매년 1만명씩 늘어나 6만명쯤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해(講解)설교를 한국 교회에 선보여
창립된지 7년밖에 안 되었으나 지구촌교회 담임 李東元 목사는 저술가이면서 강사, 독특한 교회운영 방식으로 인해 기독교계에서 오래 전부터 유명인사였다. 서른 살이던 1975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수원중앙침례 교회 부목사와 수원십대선교회 대표를 3년간 지냈다. 그후 수원 유신고 교목실장을 거쳐 서울침례교회에서 4년 간 담임목사로 일했다.
서울침례교회는 침례교에서 어머니 교회로 불릴 정도로 전통이 오래된 교회다. 34세에 유서깊은 교회의 담임목사로 간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후 다시 미국유학을 떠나 공부하면서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 10년간 일했다. 지구촌교회 창립 이전에 도합 18년의 목회 경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울침례교회에서 500명의 성도를 2000명으로, 워싱턴 제일 한인침례교회에서 500명의 신도를 3000명으로 늘린 이력이 있다.
李東元 목사의 목회 성공 비결 1순위로 거론되는 것은 설교이다. 그는 강해설교라는 낯선 형태의 설교를 한국교회에 최초로 선보인 인물이다. 講解(강해)설교란 성경 본문에 충실하면서 설교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다. 2000년에 국민일보에서 펴낸 「마스터 처치」라는 책자에 전국 13개 신학대학원생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가 실려 있는데, 설문 항목 가운데 }귀하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말씀의 선포」즉 설교말씀에 관심이 가는 목회자는 누구입니까?~라는 것이 있었다. 이 항목에서 李東元 목사는 1위에 선정되었다. 「지구촌교회 예배 참석자들의 교회활동및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에 나타난 교인들의 예배 참석 이유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담임 목사의 말씀능력」(71%)이었다.
강의 같은 설교 속의 웅변
지구촌교회 金亨駿(김형준) 수석 부목사는 李東元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언어구사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현대적 감각의 언어로 설교를 하지요. 설교를 그대로 옮겨놓으면 정리할 필요없이 그대로 책이 될 정도로 정확한 단어와 고급스런 문장을 구사합니다. 언어는 고급스럽지만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李목사님 의 설교를 좋아하지만 신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습니다. 최초로 講解설교를 선보인 李목사님은 성경 본문을 설교화시키죠.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끝내면서 삶을 얘기합니다. 성서의 언어를 생활언어로 변화시키는데 귀재입니다. 知的(지 적)인 면을 감성으로 연결시키는 독특한 실력이 있습니다. 또 설교 소재가 다양합니다. 같은 목회자 입장에서 봤을 때 한 세기에 한 분 태어날까말까 한 설교가라고 생각됩니다.
金亨駿 목사는 李東元 목사를 「천부적으로 설교능력을 타고났지만 노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고 부연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하루 이상 안 걸릴 정도의 독서광에다 도서 폭이 상당 히 넓다고 소개했다.
지구촌교회 목회자문위원장 千錠均(천정 균 · ㈜텍스글로벌 대표) 장로는 李東元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말했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님께서「자다가 일어나 메시지를 전해도 주옥 같은 말씀이 나오는 목사」라고 평했듯이 李東元 목사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감동과 감격을 줍니다.
목사님은 소년시절부터 인생의 처절한 역경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절박한 현실을 겪으면서 주님과 교제한 체험을 고백하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월 4일 예배에 참석했을 때 그의 강해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3.1절 기념예배 여서인지 예배시간에 애국가 제창이 있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에서 27절을 근거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십 시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李東元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청중과 함께 적절한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핵심을 짚어 나가는 설교 를 했다.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듯 설교해 교과서적인 성경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었다. 그는 중요한 구절과 단어를 꼭꼭 집어 주었는데 특히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설교를 이어가는 것이 독특했다.
그날 설교의 요지는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지만 또 다른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고통의 건너편에 예비한 축복이 있다며 민족적 고통도 위대한 축복의 증거라고 말했다. 또한 치료자인 하나님이 민족의 고통과 남북의 고통을 치료한다고 강조했다.
강의하듯 설교하다가도 강조해야 할 때는 웅변가가 되어 청중에 게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설교 가운데 빠지지않는 것이 조크와 例話(예화)이다. 몇 차례의 조크로 웃음을 유발하고 또 토마스 아퀴나스의 어록, 베스트셀러에 나오는 예화 등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했다.
교회성장연구소 명성훈 소장(여의도순복음교회 부목사)은 자신의 저서 「부흥뱅크」에서 「뭐니뭐니해도 지구촌교회는 李東元 목사의 설교 때문에 부흥한 교회」라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기술 했다. <본문이 본문을 해설하게 하는 강해설교는 최근 들어 많은 설교자들에게 상식이 되고 있지만 李목사가 처음 사용할 때만 해도 그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그의 이른바 「귀납법적 강해설교」는 본문해석에만 집착하여 지루하고 非 실제적이던 기존 강해설교의 약점을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극복하게 하 는 비법으로 통하고 있다. 그는 설교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연결하는 접촉점을 주제로 삼기 위해 고심하며 세속화된 청중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탁월한 서론을 도입함으로써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 같은 설교
총신대 신학대학원 朴溶圭(박용규.역사신학) 교수는 「한국 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책에서 李東元 목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1920년대 미국 교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설교자 해리 포스딕을 방불할 정도로 뛰어난 언어구사력을 가진 데다 뜨거운 복음주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있어 그의 설교는 힘이 있고 강동적이었다. 심지어 그가 미국에서 목회하는 동안에도 그의 설교 테이프와 설교집이 한국 평신도들에게 널리 보급될 정도로 그의 설교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주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설교를 잘한다거나 언어적인 기교가 뛰어난다거나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메시지에 복음주의 사상이 깊이 배어 있고 그런 복음주의 정신이 그의 설교 전체와 사역 전체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열악한 가운데서 교인이 늘어난 비결에 대해 李東元목사 스스로도 설교를 들고 있다. 「처음 신앙생활할 때 수원 YFC(십대선교회) 에서 제임스 월슨 선교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었어요. 잘 구비된 메시지를 감상적으로 전달해 주셨죠. 통역을 통해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그러고보니 디트로이트 성서 신학대학 (現 월리암 틴데일 대학)을 졸업할 때 「그해의 설교자상」을 수상한 일이 있군요. 설교 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성도들의 현실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찾지요. 성경의 옛날 얘기를 오늘의 얘기로 바꾸는 것이 설교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지친 삶을 희망으로 이끌기 위해 힘쓰죠」
지구촌교회 성장의 또 하나 중요한 비결은 비전제시가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비전(Vision)은 지구 촌교회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처럼 보였다.
교파 초월하여 목회자 기용
지구촌교회는 기존 교회와는 다른 독특한 제도를 많이 실시하고 있다. 현재 李東元 목사는 안식년 휴가 중이다.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그는 金亨俊 목사를 수석 부목사로 선임해 교회를 맡겼다.
金亨俊 목사는 마산 창신대학 교수(장로교) 출신이다. 金목사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교단 목회자를 받아들이는 목사님들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수석 부목사로 他교단 목사를 선임하는 일은 유례가 없죠. 지구촌교회에는 저 말고도 장로교 출신 목사님이 두 분이 더 있습 니다.
워싱턴 지구촌교회 김만풍 목사님도 장로교 출신입니다. 李목사님은 열린 사고를 가진 분입니다. 李東元 목사는 他교단 목회자를 영입하는데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교단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구촌교회는 출발부터가 독특하다. 1985년 李東元 목사는 석사 과정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0년간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담임을 맡았다.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부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사학위를 받자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李東元 목사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諸職(제직. 개신교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들은 한국 교회를 개척하면서 동시에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사역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나온 건이 공동 목회이다. 당시 부목사였던 김만풍 목사와 李東元 목사가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사역을 하다가 주기적으로 자리를 바꾸는 교차사역을 하자는 것이었다. 李東元 목사는 교차사역 문제의 결정권을 교인들 손에 맡겼다. 1993년 9월5일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諸職會에서 질의 응답시간이 있었다. 교인들은 일년 가운데 얼마나 미국에 있을 것인가 물었고 李東元 목사는 첫해에 3개월 정도 미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李東元 목사는 「인질로 잡혀 놓고 가겠다」고 답해 교인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에 장소는 정해 놓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확실한 장소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왜 꼭 한국을 택하느냐는 질문에 李東元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구원 받았을 때 학생운동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살겠다는 誓願(서원)기도를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에서 목회하기를 원합니다」 92% 제직의 동의로 공동 목회안이 통과되었다.
워싱턴 제일한인 침례교회 교인들은 눈물과 박수로 李東元 목사의 한국 파송에 동의했다. 한국 교회 이름을 지구촌교회로 정한 뒤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의 명칭도 워싱턴 지구촌교회로 바꾸었다. 영어로는 「GLOBAL MISS10N CHURCH」로 표기한다.
허허벌판 공장 강당에서 교회 시작
워싱턴 지구촌교회가 李東元 목사에게 지원한 선교비는 2만 달러 였다. 이민자들에게 2만 달러는 매우 큰 액수라고 한다. 李東元 목사는 45세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3년 11월,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귀국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몇 명의 사람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가 돌아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며 수시로 미국으로 전화해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묻던 사람들이었다. 李東元 목사의 설교를 테이프를 통해 꼬박꼬박 듣는 한국 교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당시 李목사의 설교 테이프는 기독교 서점에서 인기리에 판매되었으며 극동방송 에서도 李목사의 설교가 방송되었다. 李목사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서울 강남에 건물을 얻자고 제의했지만 李東元 목사가 목회지로 선택한 장소는 뜻밖에도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이었다. 선경 마그네틱주식회사 공장의 복지관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공장 주변은 그야말로 허허 벌판이었다. 11월 첫 주일에 예배드릴 때 모여든 사람은 모두 65명이었다. 그 첫 예배에 참석한 李奎嬉(이규희) 권사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예배를 드리는데 화공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어요. 정신여교 강당이나 횃불회관을 빌려서 서울에서 목회를 시작하시는게 어떠냐고 모두들 권했지만 서울에 교회가 많으니 여기서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대중교통 수단도 변변히 없었으니 사람들에게 오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나중에 목사님이 돌아오신 것을 알고 왜 자기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두 달 간의 준비를 거쳐 1994년 1월9일 정식으로 지구촌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창립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모두 344명이었다. 창립하자마자 자립이 가능해 워싱턴으로부터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해 10월에 1000명을 돌파하면서 강당이 좁아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1년 반 만에 분당에 있는 빌딩의 지하층과 4층을 빌려 이사를 갔다. 그곳은 25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었는데, 3년 만에 그 자리도 꽉 차 또다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현재 교회 건물이다. 신학교를 짓다가 자금사정으로 중단한 건물을 발견하고 1998년 4월에 이사를 온 것이다. 교회가 입주할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아파트는 한 동도 없었다. 李東元 목사는 위치는 둘째치고 교실이 100개나 된다는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2년이 지나지 않아 일요일에 일곱 차례 예배를 드리는데도 포화상태가 되어 버렸다. 요즘도 매주 30∼50명의 새신자가 등록하고 있는데 6월30일 李東元 목사의 안식년이 끝난 뒤 교인들이 더 많이 몰려올까 봐 걱정이라며 교회 관계자들은 행복한 고민을 토로했다. 워싱턴 지구촌교회와의 교차사역은 1999년으로 끝내고 지금은 동역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 지구촌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독립한 교회들과 협력교회 관계를 통해 교류를 하고 있으며 특히 장로교인 목동지구촌교회와도 자매교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지구촌교회와 모든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함께 발전을 모색한다.
세미나 문화의 창시자
李東元 목사는 한국 敎界에 세미나 문화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가 가정세미나로 돌풍을 일으켰던 것이 오늘날 그의 목회성공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디트로이트 코보흘에서 빌 가더드가 인도하는 크리스천 생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2만여 명이 모여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에 3시간씩,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강의를 들었어요. 가정 생활에 관한 세미나였습니다. 삶에 관한 것으로 그렇게 풍성한 얘기를 할 수 있다는게 놀라웠지요. 거기서 꿈을 얻었습니다. 실제적인 삶을 가르치는 운동을 해야겠다,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 주는 게 좋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미국 유학 시절 게리 콜린스, 핸리 브란트 같은 심리학자들의 가정세미나에도 자주 참석해 자료를 모았다. 1970년대 중반은 심리학이 대학에서 대중적으로 퍼져나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가 가정생활 세미나에 특별히 관심을 보인것은 불우한 성장기에 기인한다. 李목사가 쓴 수필 「나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의 첫 대목은 「나의 틴에이저의 계절은 잔인한 계절이었다」로 시작된다. 경복중학교에 입학하던해 도청공무원이면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하고 실직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갈 곳이 없어 수원 팔달산에 한 달 동안 굴을 파고 지낸 적도 있다. 낙심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여섯 동생과 어머니, 할머니까지 책임졌다. 그런 형편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대학교에 응시했으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방황하다가 선교사들이 성경과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얘기에 수원YFC(십대선교회)에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 YFC 이사장이던 수원중앙침례교회 金章煥(김장환) 목사를 만났고 金목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1975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수원중앙침례교회 부목사와 수원십대선교회 대표로 3년간 지냈다. 그 기간에 교회내에서 특별세미나를 개최했다.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세미나 문화가 없을 때였다. 李東元 목사의 세미나는 여기저기 소문이 났고 영락교회와 충현교회 같은 큰 교회에서도 초청이 왔다. 서울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일할 때 전국에서 세미나 요청이 밀려 들었다. 당시 서울침례교회 교육목사였던 나침반출판사 金龍鎬 (김용호) 대표가 산발적인 세미나보다는 한 자리에서 정기적인 세미나를 개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침반출판사의 주최로 1978년부터 국내 최초로 등록비를 받고 새생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金龍鎬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등록비를 받는다니까 무슨 돈을 받고 세미나를 하느냐며 말이 많았습니다. 참가비가 1만5000원이었는데도 첫해에 1500 명이 등록했어요. 서울침례교회에서 하다가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유관순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죠. 입석까지 해서 3000여 명 정도가 참석했습니다. 他敎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세미나라는 것이 없을 때입니다. 특히 유료 세미나는 처음이었죠. 세미나 테이프도 많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사람 들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독교 서적 100여 권 출간
요즘도 그의 세미나는 계속되고 있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한미준(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침미준(침례교 미래 를 준비한 모임)에서 세미나 강사로 나선다. 특히 침미준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세미나가 열린다. 李東元 목사의 세미나 때 사람을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2월26일부터 2월 28일 까지 안성 사랑의 교회 수양관에서 열린 침미준 수련회에 40대 이하 침례교 목사 600명이 모여 그의 세미나를 들었다.
지구촌교회 청년부 趙尙勳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세미나를 할 때 李東元 목사님 이름을 내세우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李목사님은 행사가 있을 때면 가급적 이름을 빼라고 하시지만 세미나는 강사가 누구냐에 따라 성패가 가늠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죠. 일반 성도가 아닌 목사님이, 그것도 침례교에서만 600명이나 모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李목사님은 교회 연합운동, 일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이름을 내지 않고 나서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세미나와 함께 李東元 목사를 알린 것은 그의 저서이다. 나침반 출판사 金龍鎬 대표가 책 출간을 제의했을 때 李東元 목사는 아직은 부족하다며 나중에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金龍鎬 대표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설교 테이프를 녹취해 1981년부터 책을 출간했다. 李東元 목사는 지금까지 10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그의 책은 발간과 동시에 대개 기독교 서적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현재 스테티셀러는 20여 권에 이른다. 나침반출판사 金龍鎬 대표는 李東元 목사의 서적은 일반인들에게도 인기 있지만 목회자들에게 특히 인기있다고 말했다. 새생활세미나 내용이 담긴 그의 서적은 「사랑과 믿음이 있는 곳에」(나침반), 「새 가정행전」(규장), 「양심 클린토피아」 (생명의말씀사) 등이다. 李東元 목사는 기독교 서적은 판매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세가 상상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고 말했다.
세미나 중단 이후 1986년부터 그가 미국에서 벌인 것은 KOSTA (Korea Students Abroad) 운동이다. 1986년에 미국에서 시작한 코스타 운동은 현재 全세계 12개국에서 열리는데 매년 6000여명이 참가한다. 李東元 목사는 유학생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운동을 기획했다고 전한다. 「유학생활하다 보면 마음이 많이 약해지고 지치는 경우가 많습 니다. 유학생들을 영적으로 격려하고 조국관과 비전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유학생들이 네트워크를 이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했죠. 1986년에 워싱턴에서 첫모임을 가졌는데 250명이 모였어요. 제가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코스타 출신들이 연변 과기대와 포항 한동대, 대전 대덕단지에서 많이 일하고 있습니다」
남서울은혜교회 흥정길 목사와 함께 이일을 시작했는데 이 모임에 초청되는 강사들은 항공료부터 시작하여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게 했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코스타 모임에 참석 했던 명지대 수학과 金永基(김영기)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1992년도에 참석했는데 대단한 모임이었습니다. 마음이 해이 해질 때 정신무장을 하게 하는 시간이었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무 시간씩 자동차를 타고오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이 自費(자비)를 들여 젊은이들에 용기를 주기 위해 고국에서 달려온다는 것만 해도 감동적인 일이었지요. 유학시절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공부에 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삶의 좌표를 세우는 전환점들로 삼았지요」
교회 재산 120억원을 전부 高校건립에 투자키로
3월 4일 지구촌교회 제직회에서는 고등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창립 이후 지금까지 불어난 교회 자산은 총 120억원. 모든 자산을 학교건립에 투자하고 교회는 아무런 재산을 갖지 않기로 결의했다. 학교에 3000여 명이 동시에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을 마련한 뒤 앞으로 그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3∼ 4년 후면 학교를 완공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李東元 목사는 1999년 창립 5주년 비전축제 설교에서 자신은 70세 정년을 채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65세가 되는 2010년 12월 31일 11시59분에 새로 오는 목사에게 바톤을 넘기고 12시되기 전에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에 앞서 1998년 교회 입당 예배 때 李東元 목사는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 주지 않고 교회에 모두 내놓겠다는 것과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지구촌교회 행정원 장 羅元吉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은 사례비를 받으면 모두 헌금으로 내놓으십니다. 책 인세로 생활하시지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의 학비를 대는데 돈이 모자라서 종종 친척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현재 차도 없고 교회에서 제공한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계시죠. 교회 일로 손님을 만날 때 사용하라고 드린 신용카드도 쓰신 적이 없습니다. ㈜텍스글로벌 대표 千錠均(천정균) 장로는 워싱턴지구촌교회에 다녀온 후로 李東元 목사의 무소유 선언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3년 6개월에 걸쳐 완공한 800석의 본당과 3개의 소강당, 체육관, 아파트, 도서실, 책방, 친교관, 90개의 교실, 500대 수용가능한 주차장, 넓은 운동장등을 갖춘 웅장한 교회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교회를 두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무소유 선언이 더욱 빛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 지구촌교회에서 왔다니까 성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안부를 묻더군요. 그런 아름다운 교회와 교인들을 버리고 한국의 시골로 오신 것이 바로 무소유 정신이죠. 목사님의 그런 면을 존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구촌교회로 몰려든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 100년을 정리하고 21세기를 준비하며 기획된책 「마스터 처치」(국민일보 刊)에 2000명의 신학 대학원생 대상으로 실시 한 다섯 가지 항목의 설문결과가 나와 있다. 李東元 목사는 10년의 이민교회 목회라는 공백이 있었음에도 한국교회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 되었음이 설문결과에 잘 드러나 있다. 20세기 한국 교회에 영향을 끼친 목회자 부문에서 8위, 21세기를 이끌어갈 목회자 부문에서 3위 , 함께 신앙생활하고 싶은 목회자 부문에서 4위 , 설교부문에서 1위, 새로운 마인드를 가진 미래지향적 목회자 부문에서 4위에 랭크되었다. 한국에서의 본격 목회 7년 만에 거둔 성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목회자들이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사는 대략 5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3월 4일, 두 번째 인터뷰를 가던 날, 칼바람에 눈발까지 날렸다. 산 속의 교회는 마치 학교처럼 붐볐다. 막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처럼 잔뜩 기대감을 안고 사회 속에서 소금역할을 하겠다며 평신도 선교사를 갈망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한국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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