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마천 지리산 자락길] 길에서 삶을 묻다 -- 자락길 19.7㎞에 둘레길 300㎞ 품다
국제신문 김용호 기자 kyh73@kookje.co.kr 2012-08-23 19:34
■길에서 사람을 만나다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청하).몇 년 전 유쾌하게 읽었던 책입니다. 출판사 직원과 만화가 등 셋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동행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엮은 이야기책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가 예수의 탄생과 십자기의 고난, 부활 등을 목격한 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스페인 서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었다는 순례의 길을 말합니다. 물론 지금은 종교와 상관없이 걷기를 좋아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길이 됐습니다. 장장 800㎞ 가까운 순례의 길에 해마다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해마다 조금씩 구간별로 또는 전체를 몇 번씩 걸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책에는 큰돈을 포기하고 인생의 자유를 얻었다는 네덜란드 출신의 괴짜 노인을 비롯해 독일 출신의 깍쟁이 청년과 주인공이 코골이를 둘러싸고 벌이는 신경전 등등 길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거실의 책꽂이를 훑어보니 독일 출신의 유명 개그맨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나의 야고보 길 여행'(은행나무)도 꽂혀 있습니다. 한때 산티아고 가는 길을 동경하면서 읽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독일에서 2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자칭 '카우치 포테이토'(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인 하페 키르켈링은 안개가 자욱한 2006년 6월 어느날, 프랑스 국경마을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6주 동안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 역시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이야기하다가 신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이 길은 당신에게서 모든 힘을 가져가고 그 힘을 3배로 돌려준다. 당신은 이 길을 홀로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그 비밀을 보여주지 않는다'.■길에서 삶을 느끼다
|
|
|
임천강에서 도마마을로 들어가는 소나무길. | 우리나라에서도 걷기 열풍은 여전합니다. 걷기 코스 한두 개는 만들어야 자치단체장이 일 잘했다고 대접받는 세상입니다. 둘레길 올레길 옛길 나들길 해안길 매화길 갈맷길 강변길 숲길…. 길이름도 다양합니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땀 꽤나 흘리며 걸어 볼 만한 곳을 찾아봤습니다. 23일은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입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터이니 가을향을 흠씬 맡을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지요.
경남 함양군 마천면이 어떨까요. 마천에는 지난봄에 지리산 자락길이 개통됐습니다. 아직 둘레길에 눌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리산에서 내려온 개울이 모여 만든 임천강을 끼고 걷기도 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길도 코스에 포함됐습니다. 마천면의 11개 마을을 지나가게 됩니다. 논두렁과 돌담길을 걷습니다. 동네 한가운데로 지나면서 땀냄새 짙게 밴 농부들의 삶을 봅니다.
사실 마천면은 적어도 '걷기'에서 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네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의 인월~금계, 금계~동강 등 두 코스가 마천면을 통과합니다. 두 코스 모두 둘레길 최고의 코스 가운데 하나로 통합니다. 둘레길 개통 이전에도 마천은 지리산 등산코스로 유명했습니다. 지리산 계곡 가운데 가장 깊고 험하다는, 그래서 가장 자연이 잘 보존된 칠선계곡이 바로 마천에 있습니다. 한신계곡(백무동)에서는 장터목이나 세석산장까지 길이 이어집니다. 지리산자연휴양림(마천면 삼정리)에서는 벽소령대피소까지 3~4시간이면 오를 수 있습니다.
- 지리산 등산코스 중 으뜸인 마천 - 계곡물 만난 임천강 끼고 걷든, 울창한 소나무 숲길 거닐든 - 다랭이논·야산에 둘러싸여 옹기종기 사는 11개 마을 한눈에
- 봄엔 홍도화 1000그루 뽐내고 - 여름엔 계곡·산바람 시원 - 가을엔 노란 은행나무 멋져
- 옛 의탄분교 안내센터서 출발 - 금계~의평마을로 연결된 소문 덜 난 원점회귀형 트레킹길 - 지난 5월 개통… 표지판·쉼터 미진
■폐교에서 시작된 길
칠선계곡 입구에 있는 옛 의탄국민학교에서 지리산 자락길은 출발한다. 한때 전교생이 300명을 넘었다는 이 학교는 1991년 마천국민학교 의탄분교로 바뀌었다가 결국 폐교됐다.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자락길에 대한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금계마을은 둘레길 인월~금계 구간의 종착점이자 금계~동강 구간의 출발점이다. 둘레길의 유명세 때문인지 안내센터 앞에는 평일에도 10대 이상 택시가 줄지어 있다.
금계마을 뒤편으로 금대산을 향해 오른다. 마을을 빠져나가면 임도와 같은 옛길을 만난다. 이곳은 둘레길 안내센터 앞을 지나는 60번 지방도로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등구, 창원마을 주민들이 마천면 소재지인 가흥까지 5일장을 보러 또는 마천중학교 등하굣길에 걸어 다니던 지름길이다. 산허리를 타면서 금계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임천과 지리산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원래 험한 길이었던 데다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이 있다. 그러나 중간에 정자나무가 있는 전망대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 출발한 지 30~40분쯤 뒤 지방도로를 가로질러 임천강 쪽으로 내려간다. 이 때부터는 강을 따라서 걷는다. 이달 초 공사 중 무너져내린 '당흥세월교'를 지나면 마천 전통시장까지는 금방이다. 강변을 따라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살짝 지루할 수 있으나 시원한 강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벼가 벌써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마 뒤 추수할 때쯤이면 누런 황금들판을 걷는 기분을 낼 수 있다.
■삶을 따라 걷는다
|
|
|
가흥 마을 앞 구간. 근처에 목공예 체험장이 있다. | 마천정미소 옆의 전통시장은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공사가 끝나면 먹거리촌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이곳이 어쩌면 마천의 중심이자 지리산 자락길의 주요 분기점인 셈이다.
의탄분교에서 전통시장까지를 1코스로 분류한다면 이곳에서 강청마을까지를 2코스라고 부를 수 있다. 약 2시간 거리인데 가흥~도마~군자~외마~내마~실덕~도촌~고불사~강청까지 9개 마을을 통과한다. 더구나 가흥에서 도마마을에 닿기까지 강을 따라 걷는 구간은 가벼운 산책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길을 따라 여러가지 꽃을 심어 멋을 부렸고, 가흥마을에는 목공예 자락길체험장이 있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는 지점의 전통시장을 빠져나가면 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두 개가 보인다. 위에 있는 옛날 다리(가흥교)를 건너면 된다. SK 주유소에서 다리목여관을 찾아 마당을 지나면 길을 찾을 수 있다. 작은 목재 다리를 건너는데 이곳에서 도마마을까지는 약 2㎞다.
함양군은 이곳에 자락길의 특색을 살렸다. 봄이면 절경을 뽐낼 홍도화 1000그루를 심었다. 강 건너 맞은편 지방도로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다. 이현규 마천면장은 "추석을 전후로 은행나무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볼만한 풍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천강에서 도마마을로 올라서는 길은 소나무 숲이다. 계단식으로 정비했는데 숨을 고르며 걸어야 한다. 도마마을부터는 마천면 주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도마에서 군자마을까지는 때로 농로를, 또 논두렁을 따라 걷는다. 미국 CNN 방송이 한국에서 꼭 봐야 할 명소로 선정했다는 다랭이 논도 곳곳에 펼쳐진다. 주민들은 수확한 고추를 말리고, 동네 강아지들은 배낭을 멘 낯선 사람을 졸랑졸랑 따라온다.
외마 내마 마을을 걸을 때는 지리산 한신계곡에서 내려온 개울 건너편으로 가채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랭이논에 둘러싸여 야트막한 야산을 방패삼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이 그림 같다. 더구나 지리산 천왕봉도 손에 잡을 듯 가까이 보인다. 내마에서 실덕까지는 포장도로를 걸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여긴 소나무 휴양림이네!!
|
|
|
지리산 자락길 가운데 임천강 구간. 백무동과 삼정리로 통하는 가흥교가 보이고 왼쪽으로 해발 900m가 넘는 창암산이 있다. | 강을 따라 걷는 2코스 초반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지만 마을을 연결해 통과하는 후반부는 포장도로를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지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강청에서 가채마을을 지나 가흥리 전통시장 맞은편까지는 대부분 숲길이요, 흙길이다. 해발 923m의 창암산을 끼고 돌아 약 1시간30분 걸린다.
특히 울창한 소나무 숲이 청량감을 준다. 나무의 키가 20~30m는 족히 될 소나무 숲을 걷다 보면 흡사 휴양림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소나무 울창한 길이 2㎞, 잡목이 우거진 길도 2㎞가량 된다.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걷는 재미를 줄 정도는 된다. 가채마을 부근에서 길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함양군은 도로 바닥에까지 붉은색 페인트로 '자락길↓↑' 표시를 해 뒀다.
지리산 자락길은 애초 마천면의 여러 마을을 연결하겠다는 콘셉트를 갖고 시작됐다. 지난해 서너 차례 코스를 답사하는 과정에서도 이 부분이 집중 점검됐다. 3코스를 걷다 보면 그동안 지나왔던 외마 내마 군자마을 등을 맞은편에서 감상하게 된다. 때문에 트레킹으로 치자면 3코스가 가장 추천할 만한 길이다. 마천면주민센터 관계자는 "3코스만 걷고 가흥마을에서 흙돼지 삼겹살이나 국밥을 한 그릇 먹으면 지리산 자락길 절반은 걸은 것이나 마찬가지인셈"이라고 말할 정도다.
■가볍게 등산하는 기분도
임천강 건너 마천 전통시장이 보이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자락길의 마지막 코스는 약간 경사가 있는 산길이다. 창암산 산중턱으로 올라 의평마을까지 이어진다. 임천강 맞은편의 가흥마을을 뒤로하면 제법 등산하는 기분이 난다. 일부 임도를 걸어야 하며, 15분 이상 오르막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체력이 바탕이 된다면 앞서 마을을 통과하는 코스나 강을 따라 걷는 길보다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더구나 창암산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단풍이 물든 가을이면 오히려 이 코스가 각광을 받을 수도 있다. 마지막 코스는 4㎞가 채 안돼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이면 종점에 닿을 수 있다.
자락길은 칠선계곡 입구인 의평마을에서 끝난다. 임천강과 칠선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는 합류지점이기도 하다. 출발점인 금계마을과 의평마을은 의탄교를 통해 연결된다. 19.7㎞ 순환형 도보길인 지리산 자락길을 단번에 걷는다면 약 6시간 걸린다.
■우리마을 녹색길 베스트 10 선정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지리산 자락길'을 포함해 '우리 마을 녹색길 베스트10'을 선정했다.
함양군이 개통한 지리산 자락길은 행정안전부의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 사업의 하나로 총 공사비 5억 원이 투입됐다. 자락길은 마천면 의탄리 옛 의탄분교(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를 출발, 금계~가흥~도마~군자를 거쳐 외마~내마~실덕~도촌~고불사~강청~가채~의평마을을 연결해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19.7㎞ 원점회귀형 트레킹 길이다.
지난 5월 개통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보인다. 우선 표지판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초행길에는 헤맬 수 있다. 주요 길목에는 이정표가 있지만 눈에 확 띄지 않는다. 쉼터와 화장실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단점이다. 마천면 관계자는 "내년에 추가 사업비를 확보해 편의시설을 늘릴 예정이고, 코스 안내도 등을 제작해 탐방객에게 나눠주려 한다"면서 "이미 많이 알려진 둘레길과의 차별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코스도 축소하거나 변경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
|
|
지리산 자락길 건너편의 60번 지방도 은행나무길(위 사진), 가채마을 들녘에서 본 외마 내마 마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