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는 5월에 오는가?
(마가복음 15:33~41)
그날 광주는 숭고한 투쟁의 자리였습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자리였습니다.
계엄령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소리 높여 외친 자리였습니다. 몽둥이에 부서지고 대검에 찔리고 총에 오장육부가 쏟아지고 사지가 잘려나간 죽임의 광기 앞에서도 민주주의 피워낸 자리였습니다.
그날 저 폭력배들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폭도라 하고 국가 전복 세력이라 하고 북의 사주를 받은 난동 분자라 겁박 주는 자리였지요. 봉쇄하고 학살하고 왜곡하고 광란의 총질 난사한 자리였지요. 지금도 여전히 광주를 능멸하고 있잖습니까? 얼마 전 살인마 전두환이 자연사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어떠셨는지요? 한 인간의 죽음처럼 안타까우셨나요? 애도와 조문을 하고 싶으셨습니까? 사죄하지 않았기에 용서할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화해를 이루지 못한 죽음에 인간의 도리와 예의를 갖출 수 없었던 해괴한 감정으로 응고된 채 며칠을 보내야 했고 지금도 풀어지지 못한 상태 아닌가요?
저는 5월 수백 수천 사연들 가운데 두 가지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은 지난번에도 헌혈을 했잖아. 위험하니 어서 집으로 가.” “아니에요. 헌혈할게요.” 자신의 피를 내준 여학생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계엄군이 쏜 총에 시신이 되어 영안실로 들어왔다는 사연이요, 또 하나는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헌혈이 안 돼요.” “왜? 내가 나이를 먹었지, 피가 늙었어?”라며 소매를 걷어 올린 사연입니다. 이렇듯 그날 광주 사람들은 저항과 연대로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그동안 광주는 민주주의 정신이 되어 폭력의 총을 녹여 버렸고 불의한 벽을 허물어 왔습니다. 민주의 나무를 심고 숲이 되도록 일궈 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민주주의와 권태기에 빠졌는지, 광주를 전국화하고 세계화하는데 분주하느라 세계 곳곳의 5월과 연대하는 데는 소극적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갚진 유산인 이성과 합리성이 비겁함을 숨기는 장치로 활용하기도 하고 지금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린 5월 정신이 진화하고 역사의 진보를 뿌리박는데 허약했는지도 모릅니다. 때론 그것조차 뽑아내 옛것으로 남겨두고 살림의 정신, 평화의 질서로 떼를 지어 나아가야 하는데 더디었는지 모릅니다. 나라의 주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일에 더디었는지 모릅니다. 한반도 평화를 확고히 진척시켜 가는 일에 소홀했는지 모릅니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고, 통일된 땅 또한 평화로운 삶이 되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부족했는지 모릅니다. 국민 대다수가 육체노동, 정신노동, 감정 노동자로 살아가는데도 노동에 관한 교과서 한 권 없는 현실에 무감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허술했고 짱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역사는 ‘만약’이 없고, ‘설마’가 없죠. 정신과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지 않습니까? 한심스럽고 기가 막힌 꼴을 매일 매일 보고 있잖아요? 모진 세월 살아가고 있잖습니까?
여러분! 이미 낡은 이념이라고 대다수사람들이 인식했고 사망 선고가 내려진 정치세력이 힘을 잃었는데도 곧바로 곧바로 새로운 정신과 질서가 등장해서 시대를 책임져 가지 못하는 그사이, 그 간격, 그 기간을 일컬어 인터레그넘(interregnum), 권력 공백기라 합니다. 이 공백기에 의인들이 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로운 정신들이 꽃을 피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낡은 이념과 사망 선고가 내려진 정치세력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 공백기를 장악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그 공백기를 틈타 썩다 만 흉측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것들이 출현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좀비라고 합니다. 외모나 생김새는 비록 우아하고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 같지만 존재를 결정짓는 본질은 좀비라는 것입니다.
옛 정신과 새 정신, 죽은 권력과 새 권력의 공백기에 좀비가 출현합니다.
뱀의 자유가 개구리에겐 죽음일 수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적이 된 세력과 마땅히 싸우지 않으니 정신과 말이 오염되고 타락하고 있습니다. 거역하지도 가로막지도 못할 도도한 민주주의가 좀비들 더미에 깔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입니다.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좀비에게 물리면 다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동류가 되어 버립니다. 감염되면 빠른 시간에 좀비가 되어 버립니다. 물린 피해자건만 가해를 일삼는 기괴한 존재가 됩니다. 저주입니다. 가혹한 비극입니다.
권력자 좀비, 정신 좀비, 역사관 좀비, 신앙 좀비에 물리지 마십시오.
검찰을 장악한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기레기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감염된 경찰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행안부, 금감원, 국정원, 기재부, 외교부, 교육부 “악의 평범성”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50억 클럽에 물리지 마십시오.
미국 패권과 일본 재무장에 부역하는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자유를 오염시키는 정신 좀비에게 물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내로남불을 일삼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내로남불은 자신을 성찰해 거듭나야 할 삶의 태도이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고 자신의 불리한 처지를 옹호할 방편으로 삼을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내로남불을 왜 할까요? 바로 목적이 같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이윤을 독차지하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이 같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여기 개발할 땅이 있습니다. 차지하고 싶은 목적이 같은 두 파벌이 있습니다. 파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상대파의 실수, 잘못, 불법을 과장해 공격하는 짓입니다. 이 나라의 불행은 두 파벌 중 한 파벌에 서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가혹한 불행은 자신이 한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선택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파가 있다고 칩시다. 그 땅에 집을 지어 집 없는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풍성한 문화 활동으로 삶의 품격을 높여가며 공동체의 꿈을 실현해 가고픈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하는 말도 접근하는 방식도, 추진해 가는 형식도 다르겠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을 없애가야 할까요?
뱀이 죽어야 개구리 죽음도 그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죽음의 장면에 대한 마가, 마가공동체의 기록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의 부르짖음은 5월 주검을 어루만지며 울부짖는 가족들의 처지에서 듣고 기억할 때 온전히 이해될 말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양가적 의미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그 시각 누군가가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동영상으로 찍어 실시간 공유한 사건이라기보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임을 의미하고 전제할 때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라는 표현일 것이며 동시에 예수를 음해하고 모략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성전권력에 사망 선고를 내린 심판의 상징일 것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말한 백부장은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로서 비밀스럽게 숨겨둔 사람이었다거나 로마인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기록을 남겨둬야 할 필요가 생겨 등장시킨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폭력적인 사형집행관의 입을 통해 폭력을 넘어서는 예수를 선포하고자 함이요, 로마는 생명을 죽이고 진리를 억압하는 폭력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랑인 것을 폭력을 행한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 뒷 구절들은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여성들입니다. 굳이 여성들을 더 나아가 실명까지 기록한 것은 해방 정신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의 평등, 평등한 정의를 간직한 이들만이 가능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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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어김없이 맑은 눈망울로 찾아와 타버린 상처에도 위태 위태 날개짓 하는 파랑새가 말합니다.
중단하지 말라고. 가만있지 말라고. 거센 비바람은 물방울을 역방향으로 튀길 순 있지만, 유유히 흐르는 물길 돌려놓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5월에 오는 파랑새가 하는 말이 성령강림의 자리처럼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증오하고 낙인찍고 혐오하는 곳에서는 평화의 꽃은 피지 않습니다. 불신의 늪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자포자기하고 싶을 때 갈릴리로 먼저 오신 예수님이 우릴 불러주시길 원합니다. 부활의 땅에서만 정의와 공평의 꽃이 피어납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이 5월 파랑새가 되어 공감해 주고 서로 기대며 일어납시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분명합니다.
파랑새는 5월에 오는군요
파랑새는 5월에 오십니다.
(이 설교문은 광주노회 넘치는 교회 김희용 목사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