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정신,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탱고는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에 속해 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의 밀롱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하바네라다.” 플라타는 대서양이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랫도리를 찢고 들어오는 형상을 한 거대한 강이다. 음악이자 춤인 탱고는 이 흙탕물투성이의 강에서 태어났다. 탱고가 플라타 강의 아이라는 말의 다른 의미는 오직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 녀석을 만들어낸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의 건너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는 또 다른 탱고의 거점이며, 완고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받아들이지 못한 실험적 탱고의 산실이기도 했다.
파스텔 색의 거리에서 걸음마하다 - 보카의 카미니토
탱고의 탄생은 동시다발적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의 보카(La Boca)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옛 항구였던 이 지역은 유럽의 이민자들,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들이 향수에 젖어 시름하고 그것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던 동네였다.
보카의 카미니토(Caminito) 거리는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탈리아계 항구 노동자들이 알루미늄 벽에 칠해놓은 파스텔 조의 건물들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거친 환락가에서 태어난 탱고가 우아한 격식을 갖춘 예술로 변모했듯이, 카미니토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탱고의 황금기에는 자유분방한 연주자들의 터전이 되었고, 군사 독재의 시기에는 어둡게 침잠했고,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찾는 번잡한 관광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길거리 연주자와 댄서, 오래된 밀롱가와 카페 등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보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탱고의 왕 가르델, 체 게바라의 아버지에게 일격을 당하다 - 글라스 궁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이 달콤한 바리톤 가수는 루돌프 발렌티노와 더불어 세계의 여성들은 탱고의 마수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세계 투어를 통해 항구의 밑바닥 문화에 불과했던 탱고를 아르헨티나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보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카리브 해로 떠나던 도중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최전성기에 사라진 존재이니, 그로 인해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말한다. "가르델은 지금도 날마다 점점 더 노래를 잘한다." 당연하게도 이 도시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바스토(Abasto) 시장에는 동상이 서 있고, 곳곳의 벽화에서 중절모를 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장소는 글라스 궁(Palais de Glace). 원래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개장했다가 연주장 겸 댄스홀로 바뀐 곳인데, 가르델은 이 곳에서 일어난 난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부상을 입힌 장본인은 체 게바라의 아버지라고 한다.
코르토 말테제, 밀롱가의 마초들을 응징하다 - 콘피테리아 이데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랫동안 '남반구의 파리'로 불려왔다. 영감을 찾아 북반구에서 날아온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만화가 휴고 플라트(Hugo Platt)도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유랑해온 이 청년은 1940년대 이 도시로 건너와 만화가로서 눈을 떴고, 유럽으로 돌아간 뒤 방랑의 영웅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 중 하나인 [탱고]는 이 음악이 태어나던 시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특히 이 도시의 여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1923년 6월, 코르토는 아름다운 여인 루이제를 찾아 보카의 항구로 들어온다. 그는 사창가의 범죄 조직 바르사비아의 뒤를 캐더니 친구의 복수를 위해 부패한 경찰을 쏘아 죽이고 이 도시를 떠난다. 그 시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자라고는 거의 없는 극심한 남초(男超)의 도시였고, 탱고는 마초(macho)들의 춤이었다.
고된 일을 마친 부두의 하급 노동자들은 사창가로 향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춤을 연마해 겨루었다. 길거리의 여자들을 춤추는 척 껴안기 위해 거칠고 빠르지만 또한 유연한 동작을 익혔고, 이는 탱고 특유의 악센트를 만들어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 도시와 멱살잡이하다
"나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라났고 파리에서 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무대에 오를 때, 사람들은 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연주하리라는 걸." 우리가 '탱고'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 가장 유명한 작곡자이며 탁월한 반도네온 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는 만날 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바닷가의 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처음 '반도네온'을 손에 잡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의 꼬마 통역 겸 반주자가 되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가르델이 카리브 해 순회에 그를 데려가려던 걸 아버지가 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반도네온 연주자로 크게 주목받지만,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팬클럽을 위한 카니발에 자신의 편곡을 선보였다가 "여기가 콜론 극장이냐"며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낙담한 그는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나디아 블랑제의 가르침을 받다, 자신의 진짜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그 '탱고'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탄생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는 이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다. 탱고를 빼놓고." 그는 맞섰다.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식 식당 겸 갤러리가 있다(Piazolla Tango). 그가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던 콜론 극장에도 그 숨결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홈베이스였다 사라진 클럽 '676' 근처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아졸라는 부유하는 존재였고, 하나의 장소로 그를 기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날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스토르 피아졸라 국제공항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의 할아버지들 - 콜론 극장
'남반구의 파리'는 일 년에 몇 달씩 실제로 '북반구의 파리'를 대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연주자들의 겨울 휴양지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이 도시엔 고급스러운 공연 예술이 넘쳐흘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콜론 극장이다. 피아졸라는 일이 없는 낮 시간에 콜론 극장에서 연주되는 바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에 매료되었고, 이는 탱고 음악을 변모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어 변신한 탱고는 콜론 극장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2007년, 이 극장에 백발과 주름을 훈장처럼 단 연주자와 가수들이 모여들었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Café de los Maestros)]로 기록된 역사적인 공연을 위해서였다. [브로크백 마운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는 1940~50년대 황금기의 탱고를 재현하기 위해 그 시절의 스타들을 불러모았고, 호라시오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등의 마에스트로들이 열정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군사 독재를 이겨낸 스트리트 탱고 - 산 텔모
페론과 에비타의 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그러나 1955년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탱고의 황금기는 처절하게 끝난다. 30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는 3명 이상의 모임조차 금지시켰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더욱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탱고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동네 산 텔모(San Telmo)에서였다. 이 동네는 그 어두운 시절에도 독특한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문을 연 현대 미술관(Buenos Aires Museum of Modern Art)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탱고 뮤지션들과 댄서들도 거점을 마련했다. 1969년 탱고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는 식민지 시절의 식료품점을 개조한 뮤직홀 '엘 비에요 알마센(El Viejo Almacén)'을 열어 이 지역 탱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지금 산 텔모는 보카, 플로리다 스트리트와 더불어 길거리 탱고 댄서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디폴트 선언 이후 커다란 경제적 곤궁을 겪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탱고 세계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주머니가 궁한 사람들은 밀롱가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어차피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고, 매일 가는 사람들은 신참이나 직업 댄서들이라는 거다. 여행객들의 입장에서는 페소화의 몰락으로 유리한 점도 없지 않다. 미화 20달러로 괜찮은 탱고 슈즈를 구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 댄서들도 있다. 현지의 많은 댄서들은 '진짜 탱고'를 위해서는 관광객용의 대형 탱고 쇼보다는 골목길의 작은 밀롱가를 찾으라고 한다. 저녁의 댄스 타임 이전에 강습이 열리는 곳이 많다.
저술업자 겸 도시수집가. 인문학적인 테마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인문주의 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여행자의 로망백서],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이 있다. 미투데이(me2day.net/manamana)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이 코너는 박사와 격주로 연재한다.
첫댓글 좋은글 스크립해 갑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내용 고맙습니다. 미미샘님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