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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의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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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사랭채 이며 오른쪽은 안채를 들어가기 위한 중간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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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자형의 안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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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는 조선 중기 연당 박동식이 처음 세웠으며, 현재 8대손인 박인기 교도(강남교당, 박장식 종사 조카)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몽심재는 교단사적으로도 중요 의미가 있다. 죽산 박씨(竹山朴氏) 문중은 박장식 종사, 박효진 종사, 박제권 종사, 박제현 종사, 오희원 종사 등 다섯 종사와 많은 대봉도·대호법, 그리고 40여명의 전무출신이 배출된 곳이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조형미를 보여주는 이 주택은 1700년대 초에 건축된 조선시대 전북지방 상류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로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구조는 자형안채(6칸), 오방채(3칸), 사랑채(9칸), 마판채(3칸), 문간채(5칸)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설계가 독특해서 건축학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풍수지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양택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건평 700여평, 몽심재의 앞 뒷산이 4,300여평이다.
몽심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박장식 종사는 몽심재란 “마음공부로 세계교화 꿈을 이룬다”고 설명하며, 몽심재 앞에 걸린 “잠심이거, 표리교정, 동정무리 (潛心移居, 表裏交正, 動靜無理) 등의 부친 말씀과 대종사님 법문이 일치함을 깨닫고 일찍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전라도 남원에 가면 죽산박씨(竹山朴氏)의 고택인 몽심재(夢心齋)가 유명하다. 남원의 죽산박씨들이 500년 동안 세거(世居)하고 있는 동네가 남원시 수지면 호음실(虎音室, 보통 ‘홈-실’이라고 부른다)에 있고, 그 홈실 중심에 몽심재가 자리잡고 있다.
몽심재가 남원 인근에서 회자된 것은 과객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유명했던 몽심재는 당연히 조선 후기 지리산 로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남원은 구례,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보니 몽심재는 자연 구례, 순천 쪽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들르는 단골 사랑채가 되었다. 전라도뿐 아니라 함양 쪽에서 넘어오는 영남 선비들도 남원을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별일 없는 한 몽심재에 머물렀다. 대접이 후해서 선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만석꾼 집안의 적선
조선시대 대갓집에서 중요시했던 일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충실히 지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특히 후자의 접빈객(接賓客) 풍습은 타인에 대한 적선(積善)의 의미와 함께 그 행위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효과도 있었다.
인품과 지성을 갖춘 식자층은 다른 지방에 대한 소식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더불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토론하면서 기인, 달사들과의 인맥을 형성시켜 주는 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엮어지는 공간은 그 집안의 사랑채다. 명문가의 사랑채는 접빈객이 이루어지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 후기 전라도 남원지역에서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났던 몽심재는 죽산박씨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63∼1830년) 고택의 사랑채다.
지리산 자락인 견두산(犬頭山) 아래에 자리잡은 이 고택의 사랑채 당호가 몽심재인 것엔 까닭이 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개성 근처 만수산(萬壽山) 남쪽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賢)의 영수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시호는 忠顯)의 시에서 유래한다. 몽심재를 건립한 연당의 14대조인 송암은 도연명과 백이, 숙제의 고결함과 지조를 흠모해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란 시구를 남겼는데, 이 시의 첫줄 끝자인 몽(夢) 자와 둘째 줄 끝자인 심(心) 자를 따서 몽심재라고 지은 것이다.
몽심재의 풍수는 어떤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지맥 중의 하나는 만복대를 거쳐 해발 775m의 견(호)두산에서 일단 숨을 멈춘다. 그런 다음 견두산에서 다시 5km를 내려와 호음실에서 기운이 맺히면서 자리를 하나 만들어 놓는다. 그 자리가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택이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몽심재는 옆으로 누워 있는 호랑이 머리 부분에 터를 잡은 셈이다. 바로 호두혈(虎頭穴)이다. 몽심재 터는 호랑이 턱 아랫부분에 해당한다. 앞의 안산은 호랑이 꼬리로 본다. 이렇게 호두산의 호랑이 정기가 호곡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뭉친 터가 이 지점이기 때문에 홈실이 남원 4대 양택지에 든다.
인물 내는 사랑채 마당 앞 큰 바위
몽심재의 풍수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사랑채 앞마당 중간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다. 가로 3m 높이 1.5m 크기의 이 바위는 원래부터 이 터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집 안에 이처럼 큰 바위가 있으면 범상치 않다. 바위 자체가 강력한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어서,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상서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이러한 집안에서 인물이 날 경우 바위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났다고 하는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바위를 함부로 옮기거나 훼손하는 일은 꺼린다.
바위 모양이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편평하면 그 위에서 바둑을 두거나 좌선을 하거나 낮잠을 자는 것도 좋다. 지기(地氣)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몽심재 마당의 바위에는 ‘주일암(主一岩)’, ‘존심대(存心臺)’, ‘청와(淸窩)’와 같은 글자들이 암각돼 있다. 역대 집주인들이 새겨놓은 글씨로, 이 집 선조들도 바위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식하였다는 증거다.
첫댓글 제일 아래쪽 사진이 입구를 안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사진의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가 설명에서 이야기는 사랑채 마당 큰바위을 나타내는 사진임. 사진이 일부만 보이지만...
교당답사기의 수지교당을 참조하여 함께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원불교 문화유산 답사 코스로 한번 가볼만한 곳이라고 강추 합니다...
1대를 약35~ 40년으로 보면 8대째 내려오는 것이니 1700년대 초 건축으로 전축양식으로도 귀한 자료로 볼 수 있지요. 몽심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시간의 향기 맡으러 꼭 한 번 다녀와야 겠습니다. 미리 이렇게 사진으로 보여주심 크게 고맙습니다.
마음거울(덕순)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열심히 댓글달아주고 관심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몽심재에 대하여 자세히 올려주셨네요 어제 유익한 시간이었죠?여성회장님 완벽합니다 애쓰셨어요
닉네임을 누릉지로 바꾸셨네요!~재미있는 닉네임이네요~ 함께해서 더 즐겁고 귀한 시간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