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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명주 / 김명인
고치 짓느라 하루 종일 주름 접고 앉았던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애비야, 시골집 내 장롱에
명주 한필 있으니 풀 뽑으러 내려가거든
그걸 가져다 다오
망초를 솎다 말고 문득 어머니 평생을 가둔 장롱 속에서
몇십 년 보자기에 싸여 누렇게 빛바랜 비단 한필
끌러낸다, 중국 어디라던가
황하가 범람할 때 물에 잠긴 뽕나무밭 우듬지 위로
허벅지 적시며 처녀애들 뛰어다닌다. 뽕잎
갉고 아직도 애벌잠인 어머니가 기어오르고
퉁퉁 분 젖어미들 쥐어짜면 거기 물안개인 주검들!
피륙에 내려앉은 뽀얀 누에들은 어디서 캄캄한
실꾸러밀 자아오는 것일까
펼쳐보니 물레를 돌리던 메마른 손금들이
갈피마다 헝클려 있다, 삭은 명주필로
활옷을 지어입고서
어머니는 또 어디론가 날아가시겠지, 이곳은 뽕밭 둘레라서
나는 아직 몇잠은 더 자야 한다
누에 / 김명인
당뇨로 시력을 잃었다는 여자가
어머니와 병실을 나눠 쓰고 있었다
시렁인듯 침상위에
뽕잎 대신 담요를 뒤집어쓴 누에가 간간히 뒤척거렸다
이쪽의 말소리 때문일까 저도 무어라 환한 추억을
숨가쁘게 뱉어낸다
비단길 거쳐 온 힘겨운 실낱이
여자의 입에서 꾸역 꾸역 흘러나와 흩어져갔다
고치를 풀어내는 물레
누가 잣는 것일까
그래, 그럼, 어머니가 맞장구를 칠 때마다 말들이
팽팽해졌다 느슨해졌다 한다
어머니의 연줄을 감는 얼레는 또 누가 들고 섰는지
까마득해 안 보이고 안 보이는 연을 보려고 두 누에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허공을 더듬거린다
병실 밖으로
거지반 태엽 풀린 늦가을 단풍잎
그 연줄에 걸렸다 천천히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다.
2007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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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거운 노을 / 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자전거를 방죽 위에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忘年)의, 카드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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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미사 / 김명인
홀로 바치는 노을은 왜 황홀한가
울음이라면 절량(絶糧)의 울음만큼이나 사무치게
불의 허기로 긋는 성호(聖號)!
저녁거리 구하러 나간 아내가
생시에 적어둔 비망록이 다 젖어버려
어떤 경계도 정작 읽을 수가 없을 때
나 한 척 배로
속내 감춘 컨테이너 같은 하고많은 권태 적재하고서
저 수평선을 넘나들었지만
불이 시든 뒷자리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부질없다 노을이 쪼개고 간 항적(航跡)마저 지우고
어제처럼 단단한 어둠으로
밤의 널판자들 갈아 끼워야 하지
그러면 어스름이 와서 내 해안선을 입질하리라.
주둥이를 들이밀 때마다 조금씩
마음의 항구가 떠밀리고 마침내 지워지면
뼛속까지 부서져 파도로 떠돌리
어떤 상처도 스스로 아물게 하는
신유(神癒)가 있는가 딱지처럼
천천히 시간의 블라인드 내리면 풍경과도 차단되어
비로소 손끝으로도 만져지는 죽음의 속살
해도 예전의 그 해가 아니라서
오늘은 한 치쯤 더 짧게
고동 소리가 수평선을 잡아당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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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반고등어 / 김명인
산촌이라 상갓집 저녁은 어느새 썰렁한데
마루에 차린 빈소며 마당의 차일조차
억지로 갖춘 구색인지 벗겨놓고 싶은가
바람은 내처 치달아 먹구름 근처까지 두덩한다
언젠가 잠자릴 보느라 갓방 낡은 비닐 장판을 들추자
한 뼘이나 되는 초록 지네가 붉은 지네발 접은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밀폐를 하고 병풍을 둘렀어도
시취(屍臭)란 퀴퀴한 젓갈내 절여내는 법
치산이 내일이라며 문상객 앞에 내놓은
밥 김치 절편 벌건 국사발로 차린 개다리소반
파전에 곁들어 숭숭 막 써리기로 낸 돼지비계 몇 점
웬일인지 군 자반고등어 한 도막이 상에 올랐네
한손이라지만 빈 말의 짝이 되어
서로들 염장 지르면서 여기까지 흘러왔다가
겹쳤던 몸을 떼내니 함께 절었던
세월조차 쓰리고 쓰린 살들에겐 소금사태다
빈소는 오늘 저녁에도 늙은 여상주
혼자서 지켜야 하나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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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김명인
한 두레박씩 물을 퍼내어도
우물 속을 드려다보면
덜어낸 흔적이 없다
목숨은 우주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한 두레박의 물
한 모금씩 아껴가며 갈증을 축이지만
저 우물 속으로는
두 번 다시 두레박을 내릴 수는 없다
넋을 비운 몸통만
마침내 밧줄도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할뿐,
깊이 모를 그 우물 속으로
어제 그가 빈 두레박에 담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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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김명인
유월 하면 골목길로 밤비 자욱이 돌아간다
제 마음의 부채를 지고 내리는 담장 위의
덩굴 장미는 어떻게 유월이 온 것을 알고
가로등 아래서도 꽃피운 것일까, 피워서 비에
꽃잎을 죄 떨구는 걸까
열흘 내도록 그대의 마음 밖에 서성댔으나
마침내 문 열지 못하고 돌아서는
젖은 사랑처럼
불빛에 떠는 꽃잎을 본다
비는 어디쯤 제 진창을 만들어 낙화
소용돌이 지우는 걸까
한 잎씩 어둠의 길로 내려서서
골목길 따라 사라지는 그대의 등
오래 바라보고 있다
(김명인 시집-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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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1)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2)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3)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4)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5)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6)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7)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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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김명인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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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김명인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도 저도 어쩔 수 없이
단벌의 교복 차림이었지만
대학 다닐 때도 그는 늘 검게 물들인 군용 잠바였었다
여벌 옷도 없던 지지리 가난이
우리 모두의 형편이었으므로 그가 유난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 시절이 한결같은 차림새로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칠팔 년 뒤 월부 책을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을 때
옛 모습을 벗어버린 산뜻한 양복쟁이여서
안색의 피곤기와는 달리 신수가 한결 퍼진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는, 보험에 들라며 부동산에 투자하라며 한 달이 멀다하고
화려한 말솜씨에 때로는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나
변신 거듭하는 그 처지가 부럽기조차 했었다
평생의 단짝으로 그는 내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단벌 정신이 있었다면 나와의 변치 않았던 우정뿐이었을까
오늘 국화꽃 틀로 짜 맞춘 정장 갖춰 입고
마침내 바꾸지 못할 여벌 웃음 하늘거리는 걸 보니
그의 단벌 누가 기억할 것인가 천지가 환하게
목련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이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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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라는 사막/김명인
야간훈련 중인가 비행기가 끊어놓은
파도소리 언제부턴가 다시 이어져 있다
한 시에 돋고 새벽 세 시에 되감기는
밤새 울음, 전화를 걸어 누군가의 잠결에 쏟아 붓고 싶다
나는 왜 어둠 속에 홀로 깨어
밖이 안이 되는 흐느끼는 기호들에 귀 기울이는가
속내를 삼켜서 영원히 들키지 않을
항아리들, 웅웅거리는 꿈들!
그래도 틈새가 벌어지는지
이따금씩 날벌레들이 유리창에 와서 툭툭 불거진다
무엇인가 생이 밀고 가 닿는 막장처럼
온몸을 바쳐 불빛을 채집하는
저 모눈들의 편집증
유리의 표면에서 파닥거리는 금속성 파열음들이
절벽에 부딪혀 파도의 날개 꺾인다
안이었으나 어느새 밖이 되어
나도 그대의 모래밭에 수도 없이 철썩거렸으리
젖을 수도 없는 소리의 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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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毒瘡) / 김명인
치명(致命)에 들려서라도 돌파하고 싶었던
연애가 있었다 하자, 그 찌꺼기까지
기꺼이 받아 마실 어떤 비굴함도
뱃바닥으로 끌고 가면서
할 수 있으면 나. 독배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아편에 저린 듯 자욱한 몽롱을 헤쳐 나왔지만
문제는 난파한 뒤에도 오랫동안 거기 계류되어 있었다는 것
이명처럼 흔들어서 나를 깨운 것은
누구의 부름도 아니었다
한 구덩이에서 엉켜들었던 뱀들
봄이오자 서로를 풀고 구덩이를 벗어났지만
혈거 깊디 깊게 세월을 포박했으니
이 독창을 내가 내 몸을 후벼 파서 만든 암거(暗渠)
서로에게 흘려 보낸 저의 독으로
마침내 지우지 못할 흉터 새겼으니
허물 벗은 뱀은 제 허물이더라도
벗은 허물 다시 껴안을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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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바다로 가다/김명인-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水車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바다를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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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함박눈 /김명인
앙상한 가지보다 초록 방석이 더 아늑해 보여
눈송이는 친구들을 불러모았을 뿐인데
사근거리는 눈송이송이 너무 살가워서
소나무는 가지를 펼쳐 받고 또 받았을 것인데
철없는 함박눈 밤새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가지에게도 눈송이게도 어느새 버거운
눈더미 되어버렸다
한밤 내 팔 그러안았던 눈송이송이
살며시 부려놓으려는 순간
우지끈 그만 제 팔뚝을 꺽어버린 조선 소나무 한 그루
솔가지와 눈덩이가 눈 바닥에 범벅되었다
폭설 지나간 이 아침
솔잎으로 꽃아둔 빼곡한 하늘이
서슬 푸른 허공으로 새파랗게 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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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 / 김명인
통발을 심으러 가는지
작은 어선 한 척 파도가 들썩일 때마다
이물을 한껏 높였다가 물이랑 속으로 구겨 박는다
하루 종일 마늘쪽 놓느라
늦가을 햇살 수그릴 줄도 모르고
바다로 쓸리는 비탈 밭고랑에서
이따금씩 고개 내미는 저 할매
파도 기슭이라 파뿌리마저 다 심어버렸나
뭍에서 보면 수평선은 한 줄 긴 금이지만
수만 고랑을 겹친 그 너머의 땅 분명히 있다
끝내 너울을 타고 넘어가는 저 할매처럼 노을처럼
처녀비행에 나서는 어떤 새들이 빠져 죽기도 하는 곳
배를 몰고 섬 사이를 지나갈 때 어디서 흘러오는 수수께끼인가
물이랑 흔드는 흰 부표들
빈 병처럼 넘실대면서
통발 달아 내린 자리를 표시하지만
모든 무덤들도 부표를 띄워
거기가 파도 고랑임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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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미끼 /김명인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시대로 건져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생각했다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어신魚信은
저도 외톨인 한 바다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덥석 미끼부터 물어준 탓일까
낚싯대 쳐드는 순간
한참이나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수담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걸려온 것은 한 가닥 잘린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일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에 이마 닿도록
나도 한 마리 마음 물고기 따라나서지만
드넓은 바다 들끓는 파도로도
더는 제 속내 펼쳐 보이지 말라고
헝클림 없이 자옥하게 저물고 있는, 저무는 바다
그 어둠 속속들이 헤매고 온 물고기 한 마리
덥석, 한입에 나를 물어줄 때까지
나. 아직도 바닷가에 낚시 드리우고 서 있다
어느새 바다만큼 아뜩하게 자라
내 앞에서 맴도는
태어나지 않은 저 물고기.
마침내 나를 물어 바다 한가운데
풀어놓아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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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푸레나무 곁으로 / 김명인
그 나무가 거기 있었다
숱한 매미들이 겉옷을 걸어두고
물관부를 따라가 우듬지 개울에서 멱을 감는지
한여름 내내 그 나무에서는
물긷는 소리가 너무 환했다
물푸레나무 그늘 쪽으로 누군가 걸어간다
한낮을 내려놓고 저녁 나무가
어스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머리를 빗질하려고 문밖으로 나와 앉은
그윽한 바람의 여자와 나는 본다
밤의 거울을 꺼내들면
비취를 퍼올리는 별 몇 개의 약속,
못 지킨 세월 너무 아득했지만
내 몸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 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도 얼비치던 그 여자의 푸른 모습,
나무가 거기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
나무를 걸어놓았던
흔적이 있던 그 자리에
나무 허공이 떠다닌다, 나는
아파트를 짓느라고 산 한 채가 온통 절개된
개활지 저 너머로 본다
유난한 거울이 거기 드리웠다
금세 흐리면서 지워진다
('현대시'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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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옥수수 /김명인
평해 오일장 끄트머리
방금 집에서 쪄 내온 듯 찰옥수수 몇 묶음
양은솥 뚜껑째 젖혀놓고
바싹 다가앉은
저 쭈그렁 노파 앞
둘러서서 입맛 흥정하는
처녀애들 날종아리 눈부시다
가지런한 치열 네 자루가 삼천 원씩이라지만
할머니는 틀니조차 없어
예전 입맛만 계산하지
우수수 빠져나갈 상앗빛 속살일망정
지금은 꽉 차서 더 찰진
뽀얀 옥수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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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정거장 / 김명인
디쯤 정거장에 멈춰 서서
뭉게구름 한 장 문득 머리에 이면
나도 구름버스 갈아타는 승객일 때가 있다
기다리는 차편은 오지 않고
종일 내닫던 하루 새삼 되새김될 때
푸른 물빛 펼쳤어도 배가 없어 막막해지는 바다와 같아서
마음은 구름이라도 한 조각
하늘 깊숙이 들이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뭉게구름이라 불러주면 구름버스는 왜 저렇게
느릿느릿 산보로 더딘 굼벵일까
어떤 구름은 산속에 들어 여태 목탄을 구웠는지
어느새 눈썹까지 태우고
승객에겐 노을 비낄 잠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 정거장에 서 있노라면 물러 터진 구름도
때로는 무거운 갑옷 껴입는지
우레 때리거나 번개 앞장세워
예고 없이 소낙비로 쏟아져 내리곤 한다
하여 구름을 벌주려고 어느 법정이 세워진다 해도
낮달의 행로나 이끌다 끌려나오는
저기 저 어리둥절한 오늘 저녁의 뭉게구름은
변덕 심한 이 법정의 피고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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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김명인
마침내 이루지 못한 꿈은 무엇인가
불붙는 가을산
저무는 나무등걸에 기대서면
내 사람아, 때로는 사슬이 되던 젊은 날의 사랑도
눈물에 스척이는 몇 장 채색의 낙엽들
더불어 살아갈 것 이제 하나 둘씩 사라진 뒤에
여름날의 배반은 새삼 가슴 아플까
저토록 많은 그리움으로 쫓기듯
비워지는 노을, 구름도 가고
이 한때의 광휘마저 서둘러 바람이 지우면
어디로 가고 있나
제 길에서 멀어진 철새 한 마리
울음 소리 허전하게 산자락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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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 / 김명인
철썩이는 파도를 밀고 들어가면
방 안을 차지한 수많은 눈들이 일제히
낯선 방문자를 쏘아보리라
산소통을 맨 스킨 스쿠버가 되어 나도 한때
저 집의 불청객으로
무시로 문지방을 넘나든 적이 있다
풍랑 이는 날 바다는 천 개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만 채 이불을 내다 말리지만
오늘은 바람도 없는데 온 집이 덜컹거리도록
천만 개 거울 와장창 문밖으로 내팽개치고 있다
수평선조차 햇살 문고리 잡고 벌벌 떠는 날
두고 나온 낙지 창을 꺼내오려는지
문을 열고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이든 통째로 휘감아버린다는 거대한 문어가
방 안에 떡 버티고 있는가, 몇 시간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2005년 <미당문학상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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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 /김명인
더 이상 시들 것 없는 벌판속으로
바람이 몰려간다
풍찬노숙의 쓸쓸한 풀꽃 몇 포기
아직도 지지 못해서
허옇게 갈대꽃 함께 흔들리는 강가
오늘은 우주의 끝으로
귀뚜르르 귀뚜라미 교신하는
가을의 끝머리에 선다
또 우리가 눌릴 수 없어도
날들은 이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리라
이마에 물결치는 강굽이 바라보며
눈썹 젖으면 캄캄했던 세월만
저희끼리 추억되고 아픔이 되고 한다
그러므로 소리 죽여 흐느끼는 여울이여
억새 가슴에 저며 서걱이는 빈 들판에 서서
이제 우리가 새삼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인가
저기 위안없이 가야 할
남은 길들이 마저 보인다
그러니 여기 잠시 멈춰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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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명인 시인의 약력 2. 1979년 <동두천> - 문학과 지성사 - 작품 <동두천> 감상 3. 1982년 <문 건너는 사람> 세계사 - 작품 <너와 집 한 채> 4. 1988년 <머나먼 곳 스와니> - 문학과 지성사. 5. 1994년 <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 지성사 6. 1999년 <길의 침묵> 문학과 지성사 - 작품 <저 등나무 꽃 그늘 아래> 7. 2002년 <바다의 아코디언> 문학과 지성사 작품감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