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선과 악을 초월할려는 것으로 부터..”
학과: 사학과
성명: 류시영
헤세의 작품은 개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이란 그에 의하면 자기 목적이며, 자기전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자연의 맹아로서 각자에게 내재하고 있는바, 이것이 바로 자아 보존 본능이며, 자아 주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대중화>는 이러한 개인의 가치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헤세는 이런 현대의 인간들이 규격화된 인간 타입으로 국가나 대집단의 지침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개인을 제한하는 것으로 지적한다. 헤세의 주인공들은 이런 의미에서 자아를 사는 사람들이며 외적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는 일종의 이방인 혹은 기인으로서 나타난다. 그들은 인간을 규제 내지 순화, 복종하게 만드는 외부적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유일한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어떻게 보면 <별처럼 고고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아의 전개 요구야말로 진실한 인간 현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기 내면의 세계에 빠져 그 어느 것에도 물들기 쉬운 인물인 싱클레어와 아이지만 어른 같고 외모나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한 데미안은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은닉되어 있는 자아 보존의 태고적 본능을 발견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소설에서 내부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는 인식이 가능한 의식 세계로 전환된다. 주인공은 이상이라든가 책에서처럼 비현실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피가 용솟음치는 대로 그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내면세계로 안내된다. 데미안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표지가 붙은 사람들, 카인의 후예, 성격인물>등으로 칭하고 있다. 반면 사회와 타협을 하는 정상인들을 공동 사회의 이상에 물들어 인간탈피화로서의 길을 걷는 <가축무리>로 본다. 헤세가 “데미안”을 쓴 것은 세계 1차 대전의 혼란기를 격의면서 이다. 그는 이때까지 미심쩍게 여겼던 국가의 의도, 문명의 이기가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길로 인간을 인도하는가를 보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헤세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자기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고자 했다.
‘나는 완전히 내 자신과 내 운명에 침잠해 있었으며 무엇보다 여기에 마치 온 인류의 운명이 좌우되는 듯 느꼈다. 나는 모든 전쟁과 세계의 모든 살인욕, 또 그 경박함과 야만스러운 탐욕, 그들의 비겁함 들을 고스란히 내 내부에서 다시 발견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에 대한 경의를 다시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 자신 밑바닥까지 던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 카오스 너머로 다시금 자연과 순수함이 발견되리라는 반신반의의 희망을 품고서... ’
이렇게 해서 헤세의 <내면에 이르는 길>이 시작 되었다. 내향화를 통해 헤세는 ‘자아’와 ‘영원한 질서’와의 연관성을 발견한다. 이때 그를 인도한 것이 융의 정신분석학인 것이다. 융은 “무의식”을 집단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구분하는데 개별적 무의식이란 개별적 본성이며 그 내용은 개인의 영적 생애에 있어서 사적인 것을 규정짓게 하는 모든 감정을 수반하는 관념 복합체를 그 내용으로 하며, 집단적 무의식은 일반적 초개별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인간성의 근본 상징이며 원형을 내용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헤세가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프로이트의 이론보다 영적 세계에 여지를 남기는 융의 이론에 심취된 것을 보면 그가 말하는 내면세계가 사실적 근거로서의 무의식 세계이상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건주의 집안에서 기독교적 경건주의를 배웠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서 접할 수 있었던 동양세계로 인해서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 종교관을 가질 수 있었다. 헤세에게 있어서 신은 교회에서 추구하는 신이 아니라 <나>의 느낌 속에서 발현 가능한 존재이다. 그의 신비주의적 경건성은 신성과의 혼연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데 있으며 이것은 모든 개체가 신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그의 비이성적이며 동적인 성격을 띤 신관은 신비주의자들의 그것과 공통성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객관적 실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영적 정신적인 과정으로써 주관적으로 전개된다. 헤세는 외부세계를 신비주의적인 체험으로서 무의식의 세계, 내면세계에 몰입시킨다. 내면세계와 신을 동일시하는 믿음은 “데미안”에서 태고적 종교인 아브락사스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광신의 의미를 끔에서처럼 신비하게 체험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깊은 사념에서 깨어나 방금 아브락사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선생의 목소리를 인지한다. 싱클레어는 깊은 사념에서 깨어나 방금 아브락사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선생의 목소리를 인지한다. 선생은 그에게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신의 이름이라고 설명하였다. 싱클레어는 이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단일성을 듣고, 자신이 유년기부터 품었던 반쪽 세계(어둠과 밝음으로 갈라진 세계)에 대한 갈등과 세계의 전면성에 대한 막연한 예감을 기억해 낸다. 싱클레어의 절망은 나뉘어진 세계를 의식하고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죄를 통해서 어두운 세계를 알았고 결국은 타협할 수 없는 밝은 세계와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선생의 설명을 듣는 순간 반쪽 세계를 위한 자기의 투쟁이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는다. 마치히(B. richard Matzig)는 아브락사스 신관이 그노스틱파에서 유래하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괄하는 이 신은 끊임없는 변화와 영원한 자연의 반향 속에서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세계 원칙으로서 군림하는 전 우주적 존재하고 설명한다. 원래 그노스틱파의 근본사상은 최초의 기독교에 위험물로서 간주되었던바 그 내용은 신과 악마를 하나의 형태로, 본능과 정신을 동시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종교적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가장 오랜 그노스틱파 중의 하나인 시모니안들은 야훼를 선신에 대한 반역자이며 세계에 차가운 계율을 가져온 악의 정령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싱클레어에게 전달하는 생각은 이러한 그노시틱파의 주장을 근본으로 기독교 문화와 현대 문화에 반한 불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선악까지도 초월한 모든 것을 용인하는 세계, 즉 전체성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에서는 <카인의 모티브> 즉 카인의 행동과 “야곱의 투쟁”장에 나오는 싱클레어의 야곱과 천사와의 투쟁을 설명하면서 선과 악의 경계를 긍정함으로써 창조적인 근원에 가까워지고자 한 그노스틱파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서 어떤 신앙의 경외감이나 절대적인 존재의 우월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선과 악을 초월한 인간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서구의 위기에 대한 기존사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