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난로를 발명했으나 특허권을 거절하다
시간 순서로만 보면 진즉에 나왔어야 할 얘기가 있다. 1742년에 나는 방을 더 따뜻하게 덥히면서도 찬 공기가 유입되면서 열을 내기 때문에 연료 절약도 되는 열린 난로를 발명했다. 나는 오랜 친구인 로버트 그레이스에게 견본을 보여주었다. 그때 로버트는 용광로를 가지고 있었는데 판금을 주조해서 난로를 만들면 찾는 사람이 많아 큰 돈벌이가 될 거라고 했다.
판매를 늘리기 위해 나는 ‘새롭게 발명된 펜실베니아 난로 설명서’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만들었다. 이 소책자에서 난로의 구조와 사용법 그리고 다른 난방 기구들보다 우수한 점을 설명하고 이 난롸 이전 난로들의 모든 결점을 해결하고 없앴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책자는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토머스 주지사는 소책자에 설명되어 있는 난로의 구조가 마음에 든다며 몇 년 동안 이 이 난로를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허를 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에 지켜왔던 원칙에 따라 제의를 거절했다. 그 원칙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발명품으로 큰 도움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 또한 우리의 발명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어야 하며 그것도 보수를 받지 않고 아낌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런던의 어떤 철물 장수가 내 소책자의 내용 대부분을 가져다가 자기 식으로 난로를 만들었다. 원래의 설명에서 몇 가지를 바꾸는 바람에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긴 했어요 그것으로 특허를 얻었고 들리는 얘기로는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발명품으로 특허를 따는 일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특허권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았고 시비가 붙는 것도 싫어서 그냥 모른 척했다. 아무튼 이 난로를 필라델피아와 주변 지역의 수많은 가정에서 들여놓았고 그 덕에 땔감용 나무를 꽤 많이 절약할 수있었다.
필라델피아 대학이 설립되기까지
드디어 전쟁이 끝났고 시민군의 임무도 끝났다. 나는 다시 대학 설립에 관련된 일을 추진했다. 우선 전토 클럽 회원들을 중심으로 활동적인 친구들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음에 <펜실베이니아 주 청년 교육에 관한 제안>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지역의 유지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책자를 읽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거라 생각될 즈음 재빨리 대학 설립과 유지를 위한 기부금 모금을 시작했다. 기부금은 5년에 걸쳐 매년 분납하도록 했다. 분납을 하면 기부금 액수가 더 클 거라고 판단했다. 내 판단은 적중했다. 정확히 기억하는 거라면, 그때 걷힌 기부금 액수는 5천 파운드가 넘었다.
이 계획안을 소개할 때 나는 나 개인이 아닌 ‘공공복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발표하는 것으로 했다. 평소의 내 원칙에 따라, 다수의 이익을 위한 일에 내가 주인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
기부자들은 이 계획을 한시라도 빨리 실행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스물네 명의 재단 이사를 선출했고, 당시 법무장관이던 프랜시스 씨와 나에게 대학 운영 법규 작성을 맡겼다. 법규가 만들어져 승인을 받았고, 이 법규에 따라 교실로 쓸 건물 임대와 교수 채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1749년이었을 것이다.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 기존의 교실만으로는 다 수용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고 적당한 땅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교실로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건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앞서 얘기했던 화이트필드 목사의 청중들이 세운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경위로 우리 차지가 되었다.
이 건문은 여러 종파의 기부금으로 지어졌고 임명된 이사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파에 관계없이 건물과 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을 지은 원래의 의도와 달리 하나의 종파가 모든 걸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들이 성공회에서 한 사람, 장로교에서 한 사람, 침례교에서 한 사람, 모라비아교에서 한 사람, 이런 식으로 각 종파에서 한 사람씩 임명되었다. 이 이사 중 한 사람이 사망해 공석이 생기면 기부금을 낸 사람들이 투표로 새 이사를 선출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모라비아교 이사는 다른 이사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 이유로 그가 사망하자 나머지 이사들은 모라비아교에서는 대표를 뽑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종파에서 두 사람의 이사가 나오는 걸 어떻게 피할 것인가가 또 문제였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나를 추천했다. 정직하고 어느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모두들 동의했고 나는 이사로 선출되었다. 건물을 처음 세울 당시의 열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사들은 기부금이 더는 걷히지 않는 탓에 토지세와 건물 유지 비용에 들어간 빚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이 건물과 대학 모두의 이사였으므로 양쪽 관계자들과 좀 더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합의를 이끌어냈다. 건물 관리 위원회는 건물을 대학 측에 양도하고, 대신 대학 측은 건물의 빚을 떠맡으며, 대강당은 본래 취지대로 설교가 있을 때에는 개방하고 그 외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학교로 사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합의서가 작성되었고 대학 측에서는 빚을 갚아주고 건물을 소유했다. 천장이 높고 면적이 넓은 강당은 2층으로 나눠 각 층에 여러 개의 교실을 만들었으며 땅도 조금 더 사들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학생들도 교실로 돌아왔다. 나는 인부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자재를 구입하고 공사 전체를 감독하는 힘들고 번거로운 일들을 도맡아시피 했다. 하지만 그즈음에는 인쇄소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우리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해 그 사람 됨됨이를 훤히 알게 된 데이비드 홀이 그 전해부터 내 동업자로 일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홀은 유능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대신 인쇄소의 모든 일을 맡아 하면서 내 몫의 수익금을 정확하게 보내왔다. 우리의 동업 관계는 18년간 계속되었고 두 사람 다 만족했다.
얼마 뒤에 대학의 재단 이사회는 지사의 허가를 얻어 법인이 되었다. 영국 정부의 기부금과 영주들의 토지 기증, 여기에 주의회의 상당한 원조까지 더해져 대학 기금은 크게 불어났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필라델피아 대학이 설립되었다. 나는 창립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이사 자리를 지켜왔다. 그 세월 동안 우리 대학에서 교육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능력을 지닌 뛰어난 인재가 되어 공직에서 봉사하고 나라의 자랑스러운 일꾼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