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 오전 한국노동연구원 회의실에서는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과 이상룡 노동부장관, 한광옥 국민회의 노동특위위원장이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주요 정책문제와 노동현안에 대하여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한국노총이 지난 4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선언하고 지난 5월 11일 총파업 투쟁을 선포한 이후 전개한 40여일간의 투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한국노총이 올 6월 총파업 투쟁을 통해서 과연 얻은 성과는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투쟁이 마무리되고 아직 어느 조직에서도 공식적인 평가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노총의 총파업에 대한 언급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이 글은 개인 처지에서 본 평가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 투쟁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평가가 제시되는 것 또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 총파업 결정의 과정
2월 26일 영등포구민회관에서 열린 한국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노사정위원회 탈퇴여부와 관련하여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더이상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계가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주장과 참여하여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토론 끝에 '노사정위 탈퇴 조건부 유보' 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1개월을 더 기다려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과 고용안정, 노사정위원회 법제화등 한국노총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이후 중앙위원회에서 탈퇴여부를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민주노총은 2월 24일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상태였다.
당장 노사정위원회 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노사정위원회 복원을 위하여 다양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후 3월 내내 정부와 협상에 주력하던 노총은 정부측의 안이 여전히 미흡하다며 3월 27일 노정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5월말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이는 2월 대의원대회에서 '한달 동안'으로 시한을 못박은 약속 기한이 임박한 상태에서 정부측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고, 정부를 마지막으로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어 28일 서울 용산역에서 조합원 5천명이 모인 가운데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 및 생존권 사수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노총은 4월 9일 개최된 회원조합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노사정위원회 참여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한 결과 정부 안이 불충분하지만 이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임시국회에서 노사정위원회법 제정을 약속했고 노조전임자 문제는 연말까지 법개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정부 안이 여전히 미흡하지만 이후 투쟁을 조직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같은 날 오후에 개최된 중앙위원회에 뒤집어졌다. 중앙위원들은 더이상 노사정위원회의 참여는 무의미하다며 즉각 탈퇴를 주장하고 총력투쟁 할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절차의 민주성확보와 제도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한달 뒤 한국노총은 5월 11일 제225차 회원조합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전격적으로 6대 정책요구 관철과 '99 임ㆍ단투 승리를 위한 투쟁지침이 결정됐다. 즉 단체협약을 무시한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불법 지침으로 정부산하기관 노동조합 조합원의 대량해고와 무분별한 근로조건 하향에 대응하고 노총이 요구한 6대 정책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6대 요구는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인력감축, 불법지침 철회) ▲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및 처벌조항 삭제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 ▲ 산업현장의 불법행위 근절 및 단체협약 실효성 확보 ▲노동조합 경영참가 보장 ▲ 노사정위 합의 사항 이행 및 법제화이다. 산하조직은 임ㆍ단협과 병행하여 합법적인 총파업을 전개하고 6월 1일까지 산하조직의 조정신청을 마무리하며 6월 10일 파업 찬반투표를 거쳐 6월 16일 1차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총파업 투쟁일정이 발표되었다.
3. 총파업 결정의 배경
이러한 총파업 투쟁이라는 초 강수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총은 4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예상치 못하게 노사정위원회 탈퇴가 결의되자 이후 5월 11일이 되도록 투쟁도 협상도 아닌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한다. 그 와중에서 5월 3일 임시국회에서 노사정위원회 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노사정위원회 참여는 시간의 문제일 뿐 이미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보였다. 4월 19일부터 정부의 강경 탄압 방침에 따라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으며 투쟁을 전개하던 4월 26일 파업 8일째를 맞은 지하철 노조는 전격적으로 파업중단 결정을 내렸다. 투쟁의 일선에 있는 민주노총과 지하철 노조에 대한 정부의 강경 탄압은 오히려 많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총은 5월 1일 99노동절 기념대회를 야외에서 치루는 것을 검토한 바 있지만 시일의 촉박함 때문에 예정대로 실내에서 진행하였다. 대회에서는 2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음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아울러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활동을 적극 전개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이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강조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면한 투쟁에 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은채 장기적 전략만을 강조한 결과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서울역 광장에서 메이데이 기념식을 갖고 지하철노조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을 규탄하는 동시에 12일부터 제2차 총파업에 돌입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같은 상반된 모습은 현장 조합원들의 불만을 자아냈고 이는 적극적 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국노총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었다. '지하철 노동조합이 전노동자의 이해가 걸린 구조조정 중단을 걸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노총은 지지 성명서하나 발표했을 뿐'(조흥은행노보)이라는 의견과 '한국노총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라며 '현 정세를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라는 주장이 노총 CUG에 실리기도 하였다. 결국 노총은 5월 11일 개최된 제225차 회원조합 대표자 대회에서 임ㆍ단협과 결부된 총파업을 진행한다는 '6대 요구 관철과 99임단투 승리를 위한 투쟁지침'을 결정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2000년 총선 전략이라는 총선 방침도 아울러 논의되었다. 이날의 결정은 노총의 총파업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돌출적인 결정이었다.
4. 투쟁의 경과
1) 준비기
노총은 6월 16일 총파업 실천대회를 비롯하여 6월 투쟁기간을 전후로 중앙차원에서 모두 13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각 지역본부별 규탄 집회와 항의 방문이 수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러한 집회에 참석에는 모두 약 10만여명 이상의 조합원이 참여하였다.
중앙위원회개최와 임시대의원대회의 개최 그리고 전국노조대표자대회의 개최는 노총이 총파업 투쟁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5월 21일 노총 시도 지역본부 의장회의를 개최하여 노총의 투쟁방침을 전달하였으며, 25일 투쟁상황실을 설치하고 다음날 충남지역본부에서 전국 지부장회의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투쟁지침을 시달하였는데 노총은 투쟁지침에서 각 산별연맹, 지역본부, 지부, 단위노조 차원에서 투쟁상황실을 설치할것등과 홍보선전활동 강화, 현수막 부착등 투쟁분위기 고조를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따라 도시철도노련은 일방적 구조조정 중지를 요구하는 대자보 500부를 제작하여 지하철에 부착하였다. 노총, 금융노련, 정투노련, 화학노련등에서 투쟁속보를 발간했고 금속노련등에서 포스터를 제작하여 배포하는등 홍보 활동을 강화하였다.
이어 5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4차례에 걸쳐 회원조합 긴급노사대책 담당자회의를 소집하여 산하조직의 투쟁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체신노조는 5월 30일 현업 공무원 7천여명에 대한 일방적인 정리해고 방침에 대한 규탄대회를 조합원 2만여명이 모인가운데 여의도에서 개최하였다. 이날 집회는 체신노조 역사상 최초의 장외집회로 기록되었다. 6월 2일 회원조합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총파업 투쟁 방침을 재차 확인하였으며, 6월 3일에는 국민회의 앞에서 5백여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임단투 승리 및 6대 정책 관철을 위한 노동자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까지 집계된 조정신청 사업장은 모두 313개 노조에 달했다. 6월 7일에는 기획예산처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동시에 규탄집회를 개최하였다.
2) 고양기
노총의 투쟁동력에 힘을 실어준 것은 내부적 동력 못지않게 외부적 요인이 컷다. 6월 8일치 한겨레신문에는 '검찰이 조폐공사 파업유도'라는 엄청난 소식이 게재되었다. 진형구 공안부장과 김태정 법무장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파업유도 발언은 폭탄주처럼 현 정권의 도덕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이는 단순한 파업공작을 넘어서 현정권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단면이었으며, 전 노동계의 공분을 자아냈다. 노총은 즉각 6월 9일 대검찰청 앞에서 규탄집회를 갖고 정문에 폭탄주를 선물했고 언론은 노총의 총파업 일정에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의 관심과 지지가 높아졌다. 6월 11일 개최된 긴급 임시전국대의원대회에서는 파업결정 과정의 문제점이 지적되리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만장일치로 총파업 투쟁이 결정되었고 손도장으로 마무리된 대회장은 비장함마져 감돌았다.
일요일인 13일에 서울역에서 개최된 '봉급자 보험료 과잉부담 저지 및 사회보험 개혁을 위한 노동자ㆍ시민대회'에는 1만여명이 참석하였다. 14일에는 국회앞에서 '파업공작 규탄 및 일방적 구조조정 무효선언 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날 오후부터 노총을 비롯한 각급 조직은 철야 농성에 돌입하며 파업준비에 돌입했다. 15일에는 쟁의권 행사를 막고 있는 중앙노동위원회 항의 방문이 전개되었다.
3) 6.16 파업
6월 16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역에서는 '총파업 실천 전국노동자대회'가 2만여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파업공작규탄 및 책임자 처벌, 특검제 도입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 및 예산편성지침 철회 ▲노동탄압 원흉 공안대책협의회 해체 ▲ 노동정책 및 국가정책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촉구하였다. 대회 이후 명동성당까지 가두 행진이 진행되었다. 서해에서 발생한 총격전도 노동자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총은 이번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실시한 시한부 총파업에 모두 26개 노조 24,441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중 전면파업이 4개 노조, 부분파업을 벌인 조직은 21개 노조라고 밝혔다.
4) 2차 파업 철회와 마무리
16일 시한부 파업을 통해 나름대로 자신감을 회복한 노총은 예정대로 18일과 22일 국민회의 앞에서 다시 규탄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전국노조대표자대회와 총파업 준비를 다져나갔다. 이과정에서도 6월 26일 총파업과, 24일 '정책연합 파기'라는 카드로 정부를 압박하며 노총은 물밑 협상을 지속하였다. 23일에는 정투노련 조합원이 중심이 되어 기획예산처 앞에서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파업공작 규탄 및 일방적 구조조정 무효선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불법지침 생산공장'이라는 이름을 바꾸어 달았다. 24일 전국노조대표자 대회는 겉으로는 '총파업 투쟁승리를위한 전국노조대표자대회'였지만 내용상으로는 '보고대회'형식으로 치루어졌다. 대회에서는 정책연합 파기 선언도 없었음은 물론 이미 상당부분 노정합의가 진척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다음날 아침 8시 회원조합대표자 회의를 거쳐 노정합의안을 최종 확인하고 같은날 낮 기자회견형식으로 합의안이 발표되었으며, 6월 총력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정부가 노정합의를 수용한 배경은 고급옷 로비 의혹과 파업유도 발언으로 민심 이반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나마 노동계가 완전히 정권에 등을 돌릴 경우 초래될 더 큰 악재를 막기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총파업 투쟁의 성과와 문제점
1) 성 과
① 노동정책 기조의 변환
국정운영 기조 전환 관련등 8개 부분 35개항에 달하는 노정 합의문은 대단히 포괄적이며, 표면상 일단 정부의 국정 운영 기조를 바꾸겠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지난해 기획예산위원회가 마련해 공공부문 전 사업장에 시달하여 단체협약조차 파기하던 잘못을 시인하고 일단 단협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진일보한 것이다. 또한 금융ㆍ공공부문등의 구조조정때 노사정위원회에서 원칙과 방향에 대하여 사전 협의하기로 하고 노조전임자 임금과 노동시간 단체문제에 대해서는 '노사관계제도개선 위원회'를 설치해 99년말까지 관련법률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로서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참여 요구가 좀더 힘을 얻게 되었다. 단체협약 실효성 확보 문제는 99년말까지 법을 개정하여 보장하고, 부당노동행위 근절을 위해 월별로 사법처리 결과를 발표하며 연봉제 도입시 근로자대표의 동의를 받도록한 것은 미흡하지만 성과라할 것이다. 좀더 지켜두고 볼일이지만 노정합의 의의는 현 정부가 그동안 일방적으로 추진해온 노동정책에 대하여 국민과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태도 변화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합의사항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하도록 결정된 것은 이후 또다른 질곡으로 작용될 소지가 다분이 있다하겠다.
② 노총의 신뢰 회복에 기여
6월 16일 파업은 전국적 전산업에 걸쳐 위력적인 총파업이 조직화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노총이 계획된 총파업 투쟁을 결의함으로써 조직으로부터 신뢰회복의 계기가 되었으며, 서울역 집회의 성공으로 한국노총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예정된 계획을 실천함으로써 한국노총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했으며, 정부에 대한 압박 수단이 되었다. 아울러 노총 상근 간부들의 높은 결의 수준과 철야농성, 집회준비와 참여등 헌신적 투쟁 결의와 행동은 산하 조직의 모범이 되었으며, 신뢰를 회복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③ 조합원의 의식 향상
노총이 각종 집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였고 IMF의 그릇된 처방에 대하여 강도높게 비판하는 한편, 금융노련과 함께 IMF를 제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서명운동을 전개한 것등은 조합원들의 시야를 넓혀준 일이 되었다. 총17회에 걸친 각종집회, 임시대의원대회, 전국노조대표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10만여명 이상의 조합원을 교육한 효과가 있었고 조합원의 투쟁력과 조직력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노동법 개정,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개혁등 정치적 문제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투쟁함으로써 노동자의 연대 의식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사무직 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 그리고 제조업 및 운수업 노동자등이 함께 투쟁함으로써 6월 투쟁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연대 투쟁의 의식이 점차 고양되었다. 특히 새로 설립된 정투노련이나 공공서비스노련등의 활발한 활동과 투쟁은 큰 활력으로 작용하였다.
④ 전략 개발 능력 향상에 기여
96년 총파업에 이어 99년의 총파업 투쟁을 통한 경험 축적은 향후 노총의 전략과 전술 개발 능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투쟁본부를 중심으로 발빠르게 대응한 고급옷 로비의혹 규탄 집회, 파업공작 규탄집회, 사회보험 관련 홍보전략등은 언론에 반영되면서 조합원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국민들이 현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 의식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한국노총의 총파업 결행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게되었고 노총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전술과 전략은 이후 상황 대처능력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게될 것이다. 아울러 이번 총파업투쟁으로 인하여 악성분규가 예상되던 사업장에서의 타결과 광산노련, 제조업등에서 타결속도가 빨라진것등은 시기집중을 통한 공동임투의 효과로서 이는 향후 노총의 임단협 투쟁 방향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문제점
① 총파업 결정 과정의 문제점
총파업 전술의 결정은 충분한 사전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상급단체는 단순히 '선언'하고 단위노조는 이를 '이행'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풍부한 논의와 조합원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결정이 되어야만 그 결정을 책임지게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총파업 결정과정은 그동안 여러차례 지적된바 있는 회원조합 대표자회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이 불가피했다하더라도 총파업 선언 이후 한달이나 지난 후에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추인받았다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2월 26일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탈퇴유보를 결정한후 다시 4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조건부 탈퇴'를 결정하고 5월 11일 회원조합대표자회의에 이르기까지 노총은 정부와의 교섭 내지는 물밑 협상에만 주력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산별연맹이나 단위노조의 임ㆍ단협 일정과 진행과는 무관하게 '임ㆍ단투와 결부한 총파업'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대의원대회 이후 보다 명확한 투쟁 방침을 정하고 협상에 임했다면 최소한 시기를 집중한 조정신청이나 집중 파업은 가능했을 것이며, 총파업의 위력을 한차원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② 총파업 전술 채택의 문제점
공공부문이 중심이 되고 제조업은 임ㆍ단협과 결부하여 파업을 진행한다라는 전술은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임ㆍ단협과 맞물리지 않은 제조업과 여타의 노조로서는 사실 따를 수 없는 지침에 불과했다. 실제로 파업을 전개하지 못하는 조직에 대한 적절한 전술이 부재했다. 이는 총파업 투쟁의 장으로 다수의 조합원을 이끌어내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공공부문 노조가 위력적인 파업을 전개하지 못하자 투쟁 동력이 급격히 감소된 것으로 확인된다. 아울러 '2차 총파업'이 아니라 6월 26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을 전개한다는 전술은 실현이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전술이었고 이것이 향후 투쟁을 조직하는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③ 극복해야할 비민주적인 과정
노총은 6월 18일 산하조직에 '16일 시한부 총파업 투쟁의 열기를 지속시키고 26일 총파업 투쟁의 성사를 위하여' 24일 전국노조대표자대회를 소집한다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명칭은 "정책연합 파기와 총파업 결행을 위한 전국노조 대표자 대회"로 하고 주요 내용은 ①정책연합 파기에 관한 건②26일 총파업 관한 건 ③기타 당면 현안으로 명시되었다. 그러나 24일 개최된 총파업승리를 위한 전국노조대표자대회에서는 주요투쟁 경과보고와 협상 진행과정이 설명되었으며, 정책연합 파기 문제는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끝났다. 정책연합 파기선언은 노총으로 쓸 수 있는 주요한 무기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조자룡의 헌창'에 불과할 것인지는 칼집에 들어 있는 동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정책연합 파기 선언은 역시 신중한 문제이다. 다만 전국노조대표자대회의 안건으로 잡아 대회를 소집하였다면 명확한 입장 발표와 함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대회의 주요 안건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임의로 폐기처분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한국노총에서 최고 의결기관은 대의원대회이지만 전국노조대표자 대회야말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회인데 스스로 그 위상을 추락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이번에도 정부측과의 협상과정은 여전히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사안의 중대성이나 '물밑교섭'의 한계가 분명 있겠지만 대중조직인 한국노총이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조합원들은 여전히 집회에나 '동원'되는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민주노총과의 연대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간에 애석한 일이다. 물론 16일 명동성당에서 양노총 위원장이 만난이후 민주노총측에서 공동집회 제안이 있었으며, 노총은 24일 민주노총을 포함한 제시민단체와의 연대투쟁을 제안하였지만 실질적인 접근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6. 다시 투쟁을 준비하자
이번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얻은 성과를 과대포장하기 앞서 스스로 많을 것을 반성해야한다. 대표자의 로비나 정치적 역량에만 의존하는 운동방식, 공개하지 않는 활동방식등등. 노총은 노총일뿐이고 산별과 지역본부는 별개라는 조직이기주의, 사전 제안은 없고 사후 비난만하는 조직적인 풍토. 대안없는 반대운동에만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사전에 회의자료는 커녕 안건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회의, 형식적인 발언과 즉흥적인 토론이 지속된다면 과연 민주적인 의결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노총이 총파업을 결정하여 손해 보는 것이 무엇이냐 결과가 좋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노동자를 해고시키든 정치자금을 바치든 돈만 많이 벌면되는 것인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간단히 이번 투쟁의 성과에 대하여 노총 50년만의 두 번째 총파업이었고, 50년만에 사용자를 배제한 채 노정간에 맺은 첫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 50년 역사에 단 한번도 총파업을 할만한 일이 없었을까? 물론 이 표현은 노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보하고 변화하는데 정해놓은 목표치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판을 수용하는 조직만이 살아 있는 조직이며, 작은 민주적 실천하나가 조직의 큰 민주주의를 낳고 작은 신뢰가 큰 믿음을 낳는다. 이제 6월의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노정합의의 이행여부는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정부가 이행을 약속한 12월도 멀지 않았다. 노정합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준비된 노동자들의 힘이다. 우리는 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야 한다. {{{{주요 투쟁 경과
사족하나. '정책연합 파기'를 생각하기에 앞서 정책연합 과정과 조직의 문제점을 반성해야한다. 노총위원장직을 사퇴하고 개인 명의로 지지성명을 내고 이를 '정책연합'이라 강변하는 자기체면에서 하루속히 벗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