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도 올곧은 마음으로
청주 출신 첫 사제이자 한국천주교회 열 번째 사제로 수품 옥천본당 초대주임으로 옥천공동체 일궈
|
▲ 홍병철 신부 |
|
▲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신학생들이 1892년 귀국, 서울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에 모였다. 맨 왼쪽이 홍병철 루카 신학생이다. |
끼니는 성당 주변에 호박 등을 심고 이를 거둬 죽을 먹으며 때웠다. 쌀은 단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다. 손님이 올 땐 손수 보리 방아를 찧어 대접했다. 식복사는 두지 않았다.
이렇게 아낀 돈은 성당 인근 논밭을 구입하는데 썼다. 극도의 근검절약을 통해 1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매입,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여기에서 소출되는 양곡은 입에도 대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하고 이웃과 나눴다.
일제 경제 침략에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고, 장정 하루 품삯이 좁쌀 한두 되에 불과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자신만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청주 출신 첫 사제이자 한국천주교회에선 열 번째 사제인 홍병철 신부가 당시 조선대목구(현 청주교구) 옥천본당에 초대주임으로 부임해 사목할 때 일화다. 이처럼 홍 신부의 사목적 삶은 오롯이 하느님 백성과 함께 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신학에 뜻을 둔 지 15년 만에 목자로 서다.
홍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것은 1899년 8월 27일의 일이다. 김원영ㆍ이종국 부제와 함께였다. 김 신부가 생일이 빨라 아홉 번째 사제가 됐고, 홍 신부가 열 번째, 이 신부가 열한 번째 사제가 됐다.
사제품을 받기까지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874년 충북 청주군 남일하면 방동리(현 청주시 방서동)에서 홍종언씨와 김 마리아씨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홍 신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버지를 여읜 뒤 이듬해인 1884년 4월 오베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돼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885년 말라카교구장 가니에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페낭의 기후가 한국인들에게 맞지 않는데다 1885년 여주 부엉골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8년 만인 1892년 7월 귀국,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편입해 7년 뒤 같은 해에 부제품과 사제품을 연거푸 받았다.
첫 부임지는 뮈텔 주교 보좌 겸 조선 치명자 예심 수속 비서관이었다. 르 장드르(조선대목구 법원 판사) 신부와 함께 전국을 헤매며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들 행적을 조사하고 순교자들 유해를 발굴하는 데 몰두했다. 이어 1900년 10월 인천 제물포(현 답동) 본당 보좌로 부임, 이 본당 사상 첫 한국인 사제로 활동했고, 합덕본당 2대 주임을 거쳐 1906년 5월 신설된 옥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한다.
#주님 포도밭에서 주님 종으로 살다.
옥천본당에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홍 신부는 기가 막혔다. 공주본당 파스키에 신부, 퀴를리에 신부가 전교할 때부터 두 사제를 양대인(洋大人)이라고 부르며 천주교를 등에 업은 신자들이 지역 토호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송사재판 실권까지 장악했고, 당시 군수조차 이들이 상소한 죄인만 다스릴 지경이었다. 이에 천주교회 그늘에 안주하려는 가짜 신자, 즉 가교우(假敎友)들이 급증했다. 당시 2전5리면 살 수 있는 12단 교리책이 7원50전에 암거래될 정도였다.
홍 신부는 이들의 특권의식을 깨고 월권을 단속하며 전교와 신자 피정에 힘썼다. 부임 당시 본당과 공소 다섯 곳을 합쳐도 실제 신자는 1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어 근검절약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논밭을 매입해 소작을 주고 그 소출로 이웃과 나누며 신앙을 증거했다. 뮈텔 주교가 이같은 비관적 상황에 위로 서한을 보내고 본당을 직접 방문해 홍 신부와 교우들을 격려했을 정도였다.
1907년 4월 2일자로 뮈텔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서한은 이에 대한 사연을 담고 있다.
"천도교와 일진회가 세력을 잃어가면서 개종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부활대축일 때 성인 12명이 세례를 받아 성인 영세자는 모두 72명이 됐습니다. 영동에도 10명 가량이 세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한테는 피정 뒤에 갈 계획입니다."
#시련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다.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올곧게 살았지만 홍 신부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가교우 무리가 일진회를 등에 업고 핍박하는가 하면, 의병을 쫓는 일본군이 옥천에 몰려와 성당을 일군 숙영지로 쓰겠다고 요구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자 '자위단' 문제로 시끄러웠다. 의병들의 집중 공격대상이 된 친일파들이 스스로 자위단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가입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홍 신부는 날마다 사제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행에 동참하는 뜻으로 가죽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매질하면서[鞭笞] 성당 신축을 계획한다. 1908년 말 옥천읍내 죽동(현 죽향리) 154 작은 민가와 인근 부지 6320.66㎡(1912평)를 매입, 부족한 예산을 절감하고자 신자들과 함께 인근 마을 고가에서 매입한 목재를 실어와 다듬고 흙일을 하며 이듬해 봄 72.72㎡(22평) 규모 목조기와성당을 완공한다. 두 번째 옥천성당이었다.
옥천에서 재임하며 사제로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사사성경(四史聖經)」 번역에의 참여였다. 지금까지는 그의 선배 한기근, 손성재 신부만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져 오지만, 1906년 7~8월 「뮈텔 주교 일기」에 따르면 1910년 서울 성서활판소에서 나온 「사사성경」 번역에 홍 신부도 깊이 관여했다. 성경 번역과 함께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천주가사를 발굴해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또 「성가첨례 찬미경」을 지어 뮈텔 주교에게 올렸고, 이는 1911년 8월 15일자로 공포돼 공과(주일ㆍ축일ㆍ기타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에 삽입됐다.
본당 사목에 성경 번역, 기도문 집필 등으로 바쁘던 홍 신부는 1913년 부활 판공을 위해 충북 옥천ㆍ보은, 충남 연기, 충북 청주ㆍ괴산 등지 13개 공소를 순방하던 중 열병을 얻고 쓰러진다. 옥천 방골공소에서였다. 급히 서울에서 달려온 비에모(파리외방전교회, 조선대목구 재정 담당)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은 홍 신부는 1913년 3월 6일 새벽 주님 제단에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 15년 신학수업을 거쳐 15년 사제로서 살며 겸손과 온유, 청빈을 온몸으로 보여준 열 번째 한국인 사제의 안타깝기만 한 선종이었다.
-평화신문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