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영화의 폭발’이 있기 전, 우리에겐 ‘이미’ 한국영화의 황금기가 있었다. 1960년 87편으로 시작, 1969년 229편으로 마감했던 60년대. 양만이 아니라, ‘질’로도 빛나던 시기였다. 신상옥, 김수용,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등 한국영화사의 주요 작가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한 방증이다. 빈한하던 시대, 대중은 ‘영화’를 도락거리, 혹은 화둣거리로 삼아 구멍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대중이 영화를 삶의 일부로 ‘습관’들이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는 연인이 생겨났다. 스크린의 스타들이었다. 그때 스타는 스케줄을 분 단위로 쪼개가며 “몸이 100개 있었으면 좋을 정도로” 살았고, 관객은 대략 일주일에 한편씩의 극장 간판에 얼굴이 오르는 배우들에게 질리는 줄을 몰랐다.
그 성단(星團)의 중심에, ‘트로이카’라고 불리던 세 배우가 있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믿기 어렵겠지만 이들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1년에 200편 넘어 제작되는 영화의 70∼80%에 매번, 그것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이 트로이카 시대는 일찍 마감하였다. 그와 함께 한국영화 중흥기도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 세 배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65년에 데뷔한 문희와 66년 데뷔한 남정임은 아쉽게도 71년 결혼과 함께 연기를 접었다. 남정임은 이혼 뒤 몇 작품을 하기도 했지만.
가장 독보적인 길을 걸은 건 윤정희였다. 74년까지 스크린을 지키던 윤정희는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와 연기를 더 공부하고 싶다”는 결단을 소감 대신 발표했다. 그리고 그가 누렸던 모든 영예을 뒤로 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학업을 중단함 없이 한국과 프랑스를 왕복하며 계속해서 영화를 찍었다. 가장 최근 출연작은 1994년작 <만무방>.
‘화려한 시절’은 액자 속에 곱게 들어가 벽에 걸려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윤정희는 회고록의 주인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현재 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나는 영화배우예요. 옛날 활동하던 배우에서 아직도 살아남아 외롭게 배우를 고집하고 있어요. 영화를 하기를 원하고 하기를 바라면서도 그것만 바라보는 생활이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죠. 남편(백건우) 덕분에 같이 바쁘잖아요. 그러기에 웃을 수가 있지…. ‘영화 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나’ 했으면 불행했을 거예요.“
자신의 영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매섭다. 300여편의, 손수 정리한 출연작 목록을 넘기면서, 걸작에 가장 많이 출연했다는 세간의 평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영화를 많이 했는데도 꼽을 만한 작품이 그렇게 많진 않은 것 같아요”라고 안타까워한다. 그의 연기에 대해서도 매너리즘을 거론하고 “멜로드라마는 꼭 비가 오죠. 그것만 있는 게 아니죠. 아스팔트에 쓰러지죠. ‘여보’ 하고 부르며 탁 쓰러져요” 하고 말한다. 회고가 아니라 영화 현장을 지키는 사람의 눈초리다. 따라서 현역의 배우에게 이 회고록은 차라리 ‘중간결산’에 가깝다.
이 회고록은 3회로 분재된다. 허락된 시간이 넉넉했다면 1년을 지속해도 과하지 않겠지만, 윤정희씨와의 만남이 너무 짧아 당장은 이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본격적인 회고록은 아마도 그녀 스스로 현역을 마감하고 회고에 좀더 오랜 시간을 쏟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3회 가운데 맨 처음은 데뷔하자마자 스케줄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때의 이야기. 두 번째는 그 시절을 함께 겪은 다른 트로이카 배우인 남정임, 문희, 그리고 신상옥·김수용 감독에 대한 이야기며 세 번째는 내조자이자 외조자 남편 백건우와의 만남과 스타덤, 팬덤, 현재 영화계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
데뷔작 오디션에서 눈물이 줄줄
제가 영화를 했을 때부터 시작하죠. 1966년이니까 제가 23살 때네요. 합동영화사에서 김래성이 쓴 소설 <청춘극장>을 영화화한다고 그 주인공 오유경 역을 뽑았어요. 그 당시에 <청춘극장> 안 읽은 사람이 없었어요. 오유경의 매력에 빠져 있었는데, 하고 싶죠. 배우 할 생각은 안 했는데 하려고 하니까 또 걸리는 게 가톨릭 신자라는 거였죠. 신부님께 가서 고민을 털어놨어요. 그 당시 보좌신부셨는데 그분이 “니가 가톨릭 신자라서 부끄럽지 않은 여배우 생활을 한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 걱정하지 말고 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거기에 용기를 얻어가지고 오디션에 참여했죠.
스크린 테스트는 한강 둔치에서 했어요. 어머니 역을 황정순씨가 했는데, 저희들이 황정순씨를 쫓아가다가 “어머니” 하고 울면서 무릎을 꿇는 거였어요. 그런데 한강에 사람들이 모여서는 이 상금 50만원 걸린 테스트에 어떤 지원자가 제작자하고 어떻게 해가지고 이미 결정이 됐다고 웅성거리는 거예요. 그런 소문이 났다고. 자존심이 팍 상하죠. 그렇게 결정됐으면 나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나갔어요.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듣고서도 가만히 있는데, 저는 못 참겠더라구요. 한강이니까 넓잖아요.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저를 쫓는 거예요. 퍼스트예요. 강대진 감독 조감독이 저를 쫓아와서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신이 된다고, 내가 볼 때는 당신이라고, 당신이 오유경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실갱이를 하다가 스크린 테스트를 한 거야.
제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무용하고 노래하고 그랬지만, 영화배우는 상상을 안 했던 사람인데, 스크린 테스트를 할 때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데서 울 수 있나 했는데 그래요. 그래가지고 됐어요. 그때 예명 윤정희를 제가 지었어요. 왜 고요 정을 썼냐 하면, 그 당시도 그렇지만 영화계는 화려하잖아요. 아무리 화려하지만 저는 조용히 살고 싶더라구요. 윤씨 성은 괜히 좋더라구요. 우리 친구 중 공부도 잘하고 얌전하고 예쁜 애가 있었는데 윤씨였어요. 윤정희라고 하니까 흐름이 좋고. 본명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더라구요. 다른 인생이었으니까 다른 인생은 다른 이름으로 나가자 한 거죠.
청평에서 첫 크랭크인을 했어요. 신성일씨하고 거기서 처음 만난 건데요. 누가 기록 조사를 했는데 제가 신성일씨하고 영화를 99편을 했대요. 기네스북에 올려야겠다고, 한 커플이 그렇게 한 경우는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청춘극장>은 1967년 1월1일 국제극장에 나왔어요. 모든 영화인들이 그렇겠지만 작품이 영화관에 올려질 때의 그 긴장은 말할 수가 없죠. 그것도 첫 작품인데. 저는 못 봤어요, 겁이 나서. 소식을 들으니 극장에 줄이 빙빙 돌았다고, 그때 한숨을 놨죠. 대성공(관객 15만명)이었어요.
허은옥으로 나왔던 고은아가 나한테 하는 말이, 너는 너무 고생없이 영화배우가 됐다고. 그때 제가 영화배우로서는 힘든 건 없었어요. 첫 작품부터 성공을 하게 되니까, 그 다음 그 다음 작품들이 계속 성공하면서 제 이름을 만들어줬죠. 고생이라는 게 밤잠 못 자고 하는 그런 고생은 당연히 있었던 거지만, 영화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순탄하게 오게 됐죠.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100명이었으면.”
제가 <청춘극장>으로 합동영화사 전속이었어요. 조건이 그랬죠.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네 멋대로 살아라>를 제안했어요. 그것도 합동영화사 작품인데, 제가 조연이더라구요, 보니까. 주인공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신인으로서는 남들 보기에 건방지게 나섰죠. 지금도 생각이 나요. 조선호텔에서 김기덕 감독하고 저하고, 낙훈씨가 한자리에 만났죠. 내가 조연이라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랬죠. 너무 어리석은 얘기지, 지금 생각하면. 김기덕 감독에게 ‘나를 전속으로 계약했으면 합동영화사는 내가 좀더 자존심을 갖고 영화배우로 일하도록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주인공을 하고 싶다, 이런 식이면 전속으로 못하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전속이 안 됐어요. 지금 들으면 얼마나 거만하고 건방진 일인지. 하지만 그때는 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길이 열렸던 거죠. 더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으니까. 제가 작품을 고를 수가 있었으니까요.
굉장히 금방이에요. <청춘극장> 다음이 <돌무지>인데 <돌무지>를 해서 너무 좋은 게, 좋아하는 배우 김승호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예요. 그해 <청춘극장> 만든 강대진 감독의 <강명화>를 또 했어요. <안개>가 몇 작품 뒤지만 데뷔하던 그해 한 거고, <까치소리>도 했어요.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이게 말이 안 돼. 데뷔 첫해에 22편을 했는데, 그게 그 이후 영화 편수를 따지자면 많은 건 아닌데 데뷔를 막 해서 그런가봐요. 스케줄 고통이 심했어요.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100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촬영을 하는데 제작부 사람들이 싸우고, 그런 통에 어떻게 연기를 해요. <안개>를 찍으면서 <까치소리>를 찍었어요.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도 함께 찍었을 거예요. 그것도 여기저기 흩어진 스튜디오를 찾아다니면서 찍었죠. 그러면 다른 영화의 스탭이 와서 바쁜 사람이, 예를 들면 신성일씨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몇시까지 이거 끝내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러는데, 이쪽에서는 작업을 하다가 끝낼 수가 없잖아요, 한창 촬영중인데. 그러면 망하죠. 제작사가 돈이 많지도 않은데.
배우들 모두에게 작품이 몰렸어요. 제작자들이 와서 사정을 해요, 살려달라고. 그래서 맡은 작품이 있고, 작품이 좋아서 욕심부리는 경우가 있고. 큰 제작자가 아니라 군소 제작자가 와서 사정을 하면 거절을 못하죠. 개런티가 얼마 안 되니까 출연 안 한다, 그런 건 없죠.
잠자는 건 상상도 못하게 바빠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는지. 그 당시 제작자가 가난했으니까 모든 스탭과 배우들이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그 대신 작품이 좋은 건 아주 좋고 안 좋은 건 아주 안 좋잖아요. 그 당시 배우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잠자는 거, 상상을 못했어요. 개인 취향과 여유를 따지진 않았죠. 하루에도 이 영화를 찍고 다른 세트에서 다른 걸 찍고 그랬어요. 안양촬영소, 뚝섬촬영소 이런 게 있었잖아요. 한 촬영소에도 몇팀이 와서 촬영을 했죠. 홍콩도 그런 시스템이라서 다작을 했다고 하잖아요. 마음의 태도가 그런 것 같아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현실에 적응을 했던 거죠. 국민 모두가 여가시간에 극장으로 몰렸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배우들. 신성일·남궁원·최무룡·신영균씨, 여자배우들도 김지미·조미령·최은희씨 등, 우리 시대에는 선배들하고 후배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남정임이, 문희, 고은아, 우리가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면 경쟁자지만 밖에서 보는 것같이 살벌하지 않았어요. 얘기하고 서로 위로하고 화면에서는 라이벌로 나왔지만…. 분위기가 다 합해서 그런 시기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젊은 여배우 군단 중 제가 제일로 후배예요. 고은아가 나왔고 정임이도 활동을 하고 있을 때고 문희도 먼저 데뷔를 하고, 이후에 고은아가 시집을 먼저 갔고, 제작자하고, 그러니까 우리 셋이서 여배우 트로이카라고 불렀죠. 그뒤 71년 문희도 시집가고 정임이도 시집가고…. 지금까지 혼자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