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진갱빈 과수원집
 
 
 
카페 게시글
여행 정보 스크랩 불굴사
별과바람 추천 0 조회 57 12.09.04 02: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굴사

 

 

불굴사를 찾은 날은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소낙비와 가파른 산길은 불굴사 가는 길을 힘들게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게는 특히 그랬다. 나를 만나려거든 부처님께 삼천 배를 드리고 오라시던 성철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원효 대사와 김유신 장군의 성지인 이곳은 차를 쌩쌩 달려 희희낙락 오는 곳이 아니라는 듯, 도시락 싸들고 피크닉 가듯 그렇게 생각 없이 와서는 안 된다는 듯, 불굴사를 품에 안은 무학산의 소리 없는 가르침은 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선사와 장군이 구도와 통일의 꿈을 꾸며 오르던, 아득한 그 때 신라적 이 길은 어떠했을까! 황량한 언덕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눈 쌓이고 산 깊어라 해는 지고 바람이네/종소리를 듣고서야 절 있는 줄 알았으니/푸른 구름 저 가운데 법당이 숨었구나”. 삼봉 정도전의 노래에서처럼 그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언덕길이었으리라. 그 황량함이란 물리적 여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중생 계도와 조국 통일의 열망을 향한 정신적 갈증으로 말미암은 바가 더 크리라.

 

불굴사의 어제와 오늘

불굴사는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5번지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찰이다. 신문왕 10( 690),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을 염원하며 수도하던 사찰이다. 흥성기에는 50여동의 와가(瓦家), 12개의 부속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한 대사찰이었다고 전해 온다. 영조 12(1736) 큰 비로 인한 산사태로 대파되어 퇴락하였는데, 그 후 전라도 송광사에 있던 노스님이 현몽을 받아 이곳에 와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사찰 경내에는 신라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과 석조입불상, 부도 등이 있다. 3층석탑은 196591일 보물 제429호로 지정되었고, 석조입불상은 2001430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는 불굴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원효대사가 수도한 석굴(원효암, 일명 불굴암)이라 전하는 굴이 있는데 이 석굴에서 김유신 장군이 통일을 염원하여 기도하던 중 천신(天神)으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은해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이처럼 유서 깊은 대사찰이 지금은 은해사의 말사가 되어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전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받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유생들뿐만 아니라 스님들은 민간 사람들한테도 괄시와 천대를 많이 받았다. 지나가는 과객들마저도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청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 해주면 덮어 놓고 때렸다. 과객의 폐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과객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바뀐 왕조의 서로 다른 이념이 빚어낸 서글픈 풍속이었다. 참다못한 스님들은 어느 날 한 점잖은 과객에게 지혜를 청했다.

-여보시오 선비양반, 우리 절에 손님 좀 적게 오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그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하나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 버리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절의 스님들은 과객들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 그러자 청천 하늘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이 산 저 산이 떠내려 와서 절이 다 묻혀버렸다.

 

왜 하필 거북 돌의 눈이었을까? 민중들의 집단 무의식 속 거북은 무슨 의미이기에 거북의 파괴가 산사태를 일으켰다고 믿었던 것일까? <<시경>>에 의하면 거북은 우주적인 원리를 암시한다. 거북을 태워 점을 친다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묻는 일과 통한다. 거북이 우주를 상징하는 것은 거북을 싸고 있는 껍질이 하늘을, 그 속이 땅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는 것은 우주 원리의 파괴를 뜻하고 다시 그것은 불굴사를 묻어버리는 하늘과 땅의 무너짐으로 이어지리라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삼층석탑

참배객이 없는 불굴사 경내는 적막강산이었다. 적막강산이어서 불굴사의 주전각인 적멸보궁은 더욱 적멸보궁스러웠다. 1980에 지은 정면 3, 측면 3칸의 구조를 가진 맞배지붕의 양식을 지닌 적멸보궁 앞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보물 제429호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 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돌의 마무리에서 정연함을 보이고 있어 탑 전체적으로 뚜렷한 비례가 돋보이는 탑이다.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7.43m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원이 이 탑에 깃들어 있을까? 어느 사찰, 어느 도량인들 탑이 없는 곳은 없다. 탑은 불가에서 부처의 몸을 닮았다고 해서 탑 자체가 부처님의 몸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나타내고 믿음의 표징이 된다. 탑이 기원과 정성, 소망과 믿음을 상징하는 것일 때 불굴사의 삼층석탑이란 한갓 비에 젖고 있는 돌덩이가 아니라, 천년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는 원효와 유신의 마음속에 세워진 간절한 꿈과 소망의 몸체이리라.

 

족두리를 쓴 자연석 여성 약사여래불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특히 대학입시철이 되면 갓바위 부처님의 위력은 전국을 휘몰아칠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갓바위 부처님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만큼이나 불굴사 약사여래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를 중심으로 북쪽에 갓바위 부처님이 있다면 남쪽에는 불굴사 약사여래 부처님(입상석불)이 있다..불교계에서 이 두 부처님은 같은 시기에 음양의 이치에 맞춰 조성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팔공산맥 동쪽의 끝자락에 우뚝 선 약사여래가 남성적이라면 불굴사의 약사여래는 음의 기운을 품고 있다고 전해온다. 두 부처님을 두고 갓바위 부처님은 갓을 쓴 남성상, 불굴사 부처님은 족두리를 쓴 여성상을 하고 있어 부부라는 설화도 있다. 두 부처님의 표정과 신체의 표현, 그리고 대좌 양식 등의 제작기법을 볼 때 동시대인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부처님은 팔공산의 약사신앙과 더불어 영험 있기로 유명하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석으로 된 자연 상태의 예측불이어서 얼굴 부분에 땀이 나고 온몸이 젖으면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거나 하면 반드시 석불의 몸에 습기가 가득 찬다고 한다. 이제 불굴사 약사여래부처님의 원력이 세상중생을 제도할 인연의 시절이 도래했다고 한다.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중생들의 소원을 성취해 줄 때가 왔다고 한다. 비록 그것이 민중들의 소망적 사고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약사여래부처님이 병든 세상을 고쳐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홍주암

종무소에서 혼자 추녀 끝 낙수물 소리를 듣고 있는 주지 스님에게 홍주암을 물었다. 말없이 가리키는 스님의 손끝을 따라가 본다.

홍주암은 요사채 뒷길 200m 거리에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음의 기운을 가진 경내에서 제일 먼저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 태양을 뜻하는 붉은 구슬 홍주암(紅珠庵). 이곳은 신라 원효대사의 최초 수행지이고 김유신 장군이 17세 때 삼국통일의 소원을 기도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홍주암 석굴 속의 약수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 라는 글귀가 푸른 글씨로 새겨져 있다. 약수는 일명 장군수라고도 하는데, 김유신 장군이 이 물을 마시면서 삼국통일의 염원을 기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단한 바위틈을 뚫고 샘솟는 아동제일약수의 생명력이 신기하고 놀랍다. 이름에 걸맞게 위장병, 신장염에 특효이고 미용에도 좋다 하여 찾는 사람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팔공산 팔경 중 하나로 알려진 홍주암 기슭에는 해묵은 소나무가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독성전에 홀로 계신 나반존자님의 고독을 생각한다. 부처님이 용화세계에 오면 같이 출현하시려고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세인간의 복전이 되어주고 소원성취를 이루어 주려는 원력을 세우고 있다는 나반존자님의 큰 뜻을 생각한다. 그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기다리는 미륵불의 미륵세상은 언제 오려는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