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바닥을 치고 일어섰나요? 『막다른 골목의 추억』
몇 년 전 가을 요시모토 바나나의 『안녕 시모키타자와』를 읽고 그 서정적인 느낌을 표현할 길이 없어 애태웠던 적이 있다. 어찌 리뷰로 쓰긴 했지만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고 관조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을 나의 얼마 안되는 언어로 표현하자니 난감했다. 그뿐 아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을 전면에 배치하는 대담함까지 선보였다. 서두에서부터 정점을 찍고는 죽음을 일상처럼 수용하는 그녀의 배포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그리는 죽음은 좀 특별했다. 그녀는 끝이고 단절이라 하지 않았다.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선고하지 않았기에 나는 죽음을 끌어안을 용기를 얻었다. 비록 사람은 가고 없지만 언제든 회상할 수 있기에, 그녀가 그리는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추억이 되었다. 그 추억을 반추할 때 부재는 실재보다 생생해졌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알고 있었다. 죽음을 말하지 않고 힐링이나 치유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에는 죽음이 주된 배경이자 장치가 된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도 예외는 아니었다. 5편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장소와 사건, 인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뿐 죽음과 방불한 극도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겪은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침울하거나 눅진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눈이 언제나 생명을 지향하고 있어서였다.
'유령의 집'은 가업을 이어야 되는 대학 동창생의 이야기다. 단지 이성 친구에 불과했던 그들이 연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노부부의 유령 때문이었다. 비록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고, 한때 스쳐가는 인연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노부부의 유령과 함께 했던 시간은 그들에게 일체감을 선사했다. 우리와 너무도 다른 정서적 특징과 습속, 사생관으로 쉽게 와닿지 않았지만 우연 또한 생이 준비한 필연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생과 사, 만남과 이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연결돼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해피 엔딩까지 있어서 더 따뜻했다. 따뜻함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힐링이 되었다.
'엄마'는 사내 식당에서 독극물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쓰러진 여직원에 대한 이야기다. 목숨은 건졌지만 몸이 상한 여자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않음을 절감하고 휴가를 낸다. 시골집에 가서 조부모를 만나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이 잊고 지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은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에 대한 것이었고, 자신 또한 엄마처럼 될까봐 여자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해준 조부모와 남자친구를 떠올리고는 일상을 소중히 여기기로 마음 먹는다. 할수만 있다면 관계가 어그러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도 하고 싶다며.
'따뜻하지 않아'는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소꼽 친구를 그리는 여자의 이야기다. 나이에 맞지 않게 늘 의젓하고 얌전했던 남자 아이는 아이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아이였다. 집안 사람들이 아무리 잘해줘도 아이에겐 그늘이 있었고, 여자 친구네 집에서만 편안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의 친엄마가 나타나 아이의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는, 아이와 함께 탄 차를 벼랑으로 몰아 같이 죽는다. 여자는 지금도 소꼽 친구가 집에 가기 싫어했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내게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다. 내가 자랄 때는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많았다. 중학교 1학년 때였는지 2학년 때였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하루는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일가족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소리였다. 누군가 했더니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했던 친구였다. 갸름하게 생긴데다 얌전하니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쳤던 아이였다. 당시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난 꽤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 친구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 그 아이와 몇 번이나 말을 했을까만 난 아직도 그 아이를 잊지 못한다.
'도모 짱의 행복' 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시각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가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도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일의 하나로 본다. 중학생 때 남자 친구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된 아버지의 외도,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그 트라우마에 가까운 상처를 요시모토 바나나는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다. 이는 그녀가 무심해서가 아닌 생을 소중히 여기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처에 짓눌리는 것은 생을 방기할 수 있기에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꿈꾼다. 행복은 꿈꾸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선물이니까.
‘막다른 골목’은 사랑하는 사람의 바닥을 보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특히나 결혼까지 약속한 사람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것을 대면하는 것은 여자에게 깊은 상처가 될 테다. 그럼에도 여자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용기를 낸다. 이제 여자에게 남은 것은 쓰디쓴 추억과 남자에게 떼인 돈 밖에 없다. 여자는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해 삼촌이 차린 '막다른 골목'이란 가게를 찾는다. 그곳에서 여자는 다시 삶을 바라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출구가 없어야 길이 열리고, 바닥을 쳐야 올라갈 수 있는 생의 아이러니가 꽤 흥미있다.
부재할 때 존재는 뚜렷해지며 고통의 소리가 높을 때 치유의 힘은 강하다. 그래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이란 커다란 슬픔을 우리 곁으로 불러온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지 않고 성장할 수 없으며,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을 수용하지 않고 우리의 생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다른 곳에서 추억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다시 설 수 있다. 그 힘은 고통을 감내하고 소화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막다른 곳에서 나는 오늘 희망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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