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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설교본문 : 에스겔 16:59~63, 로마서 10:1~13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5년 10월 11일
지난 주 월요일 큐티한 에스겔 16:15절 이하의 말씀은 참으로 읽기도 묵상하기도 거북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기 직전의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영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때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하기 약 4~5년쯤 전이었으므로 매우 긴박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상한 말씀으로 경고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이가 불이나 칼로 매우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다면 “아이야 그런 장난하면 안 된단다~”하고 고상하게 말하겠습니까? 일단 큰 소리를 지르더라도 안전하게 해 놓고 나서 달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긴급하다면 아이가 놀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일단 그 불이나 칼을 뺏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너무 긴급한 때이니 매우 과격하고 거친 언어로 심판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런 심판의 말씀으로 가득하니 무서운 진노만 담겨 있는 책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 에스겔서는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창문 좀 열어달라고 해도 꼭 닫고는 도무지 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연인을 향해 그 창문 아래서 기타를 치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연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내였습니다. 그것도 남편을 떠나 이 남자 저 남자를 다니며 놀아난 그런 바람 난 여자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으면 행복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곧 죽임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고도 처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남편에게로 와야 합니다. 남편은 다른 남자와 놀아난 아내라도 좋으니 제발 나에게로 와서 죽지 않고 살라고 호소하지만 오히려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그 바람 난 아내가 더 큰 소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 편으로는 무서운 말로 협박하다가, 또 한 편으로는 제발 돌아와서 죽는 자가 되지 말고 사는 자가 되라고 호소하기도 하십니다.
1.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죄와 타락이 더 심한 유다와 예루살렘
에스겔 16:44~59까지는 사마리아와 소돔을 유다의 언니와 동생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이 땅에서 사라진 도시들입니다.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앗수르에 망하여 이방 나라에 흡수되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고, 소돔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을 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로 멸망을 당한 두 도시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언니와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48절과 51절을 보면 소돔과 사마리아의 죄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에 비하면 의로운 자라고 할 만큼 적은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죄를 짓고도 멸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하여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고도 살기를 바라느냐고 무섭게 호통을 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에 전체가 이렇게 무서운 심판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인 59절은 그 심판의 말씀의 요악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명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행동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되갚아 아주 무섭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 본래 약속에 없는 자들을 함께 회복시킬 것이라
그러나 그 다음 60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금방 크게 진노하시면서 화를 내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와 이전에 그들의 선조들과 약속하셨던 것을 기억하시면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하나님의 짝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기 전에 먼저 소돔과 사마리아를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소돔과 사마리아는 이방인 전체를 뜻합니다. 먼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후에 버림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1) 내 언약에는 들어있지 않았으나 네 언니와 동생을 너의 딸로 삼아주리니(61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소돔과 사마리아는 그 약속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약속하신 적이 없으시니 이방인은 그대로 멸망 가운데 있도록 내버려두셔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약속하신 적이 없으시지만 예루살렘이 회복되기 전에 먼저 소돔과 사마리아부터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이미 이 땅에서 사라졌으니 여기에서 말하는 소돔과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전에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모두 이스라엘의 딸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딸은 백성을 뜻하니 이방인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소돔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먼저 회복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이 먼저 받아들여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약 시대의 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유다 백성들도 예수님을 믿어 함께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날이 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그때는 정말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온 줄 알고 곧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한 이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까요? 그것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기 동족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속상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백성 유대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아픔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반복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시 한 번 유대인의 실패의 원인을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은 결코 그들이 게을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1) 경험에 의존하는 신앙의 위험(2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바울도 압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식(말씀)을 따른 열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경험에 따른 열심이었습니다. 말씀에는 모든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것이라 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의를 얻게 될 줄로 알고 무조건 열심히 하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맹목적인 열심이 그들을 실패한 자가 되게 했습니다.
이런 잘못은 요즈음에도 쉽게 발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경험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어떤 이들은 찬송을 부르며 은혜를 경험하고, 어떤 이들은 산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어떤 이들은 조용히 침묵하며 기도할 때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 작은 하나를 경험하고는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것인 양 강조하며 다른 것은 거부하는 것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칫 유대인의 실패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만 보면 길은 아는데 그 길을 걸을 힘이 없게 되고, 말씀은 없고 기도만 한다면 유대인들처럼 열심히 행하기는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가운데 행하는 맹목적인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2)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열심의 위험(3절)
유대인이 신앙적인 열심이 있다는 것을 바울도 인정하고 있고,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를 세우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자랑하듯 기도했고, 헌금이나 구제를 해도 큰 자루에 담아 자기가 얼마나 많은 헌금과 구제를 하는지 과시를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음(3절)
이렇게 말씀보다는 경험과 인간의 전통에 의존하는 신앙,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규칙은 따지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랑과 섬김은 하찮게 여겼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태복음 23:23).
4)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욕망 때문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경험에 맞는 방식이나 내 의를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의 신앙생활에 더 사로잡히는 것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본능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갈등 없이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면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를 하려면 죄의 문제로 갈등과 번민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것이 싫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더니 참 마음이 편하고 좋더라 하면 그 방식을 고집하게 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래도 내가 자랑할 만한 것 하나쯤 가질 수 있으니 고집하는 것입니다.
5) 그러나 때가 지나가기 전에 주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신앙의 관행이 나의 습관으로 고착되기 전에 서둘러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일단 내 몸에 습관으로 고착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도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처럼 자기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절)
그런데 이를 어찌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모두 시드기야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면서도 주님 말씀대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임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율법을 모두 완벽하게 지킨 것으로 인정받게 되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받게 하는 길을 제시하는 복음의 말씀이 이미 우리의 손에,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말씀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누구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해설집들도 많고, 조금만 열심히 한다면 성경공부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이 없이 믿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말씀을 배우기에 힘쓰십시오. 말씀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무엇인지, 그 의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결말이 어떠한지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하게 담겨 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삶의 모든 국면에서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을 나타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시간 사용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돈을 사용하는 데, 인생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지금까지 로마서의 긴 여정을 해 왔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믿음으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때 그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 또 다른 면에서 너무나도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열심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생각하고 헛된 열심을 품었는데,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입으로 예수님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그저 삶이야 어떻든 자기도 예수님을 입으로 부르고 있으니 구원이 될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할 때가 로마 치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성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퀴리오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곧 죽은 목숨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퀴리오스)라는 말은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그 용어를 황제에게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만 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모욕하는 죄, 혹은 모반하는 죄로 인정되어 끔찍한 형벌을 받았는데, 이를 다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합니다”하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내 생명을 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생명까지 건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시간 바치기를 아까워하고, 예수님의 말씀 보기를 귀찮아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의 고백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맙니다. 이런 자는 마음에는 다른 것을 담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의 고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부르는 데 나의 생명을 걸고 있다는 것을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존귀히 여기십시오.
주님
본래 약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방인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 드립니다.
유대인들처럼 경험에 의지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에
내 생명을 걸게 하옵소서.
그 고백에 내 생명을 걸고 있다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게 하옵소서.
이제 곧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