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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
꼬리에 눈이 있는 뱀 외 1편
갈 수 있는 두개의 방향을 놓고 다투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가든 신을 만날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서쪽 서쪽은 서쪽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면서 서쪽이다 모를 땐 우기는 게 상책이다
끊임없다는 말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야바위꾼 오로지 한 길 걸어왔으나 아직 신을 만나지 못했다
죽음을 귀찮게 하는 죽음 살아있는 것들만 골라 성가시게 구는 살아있는 것들
오일램프 유리구에 묻는 그을음같이 고양이 눈 구슬을 유혹하던 어릴 적 흙구덩이 같이
동쪽의 이상향이 서쪽에 있듯 아무래도 그림자는 동쪽에 사는 토박이들 같아
죽어가는 개의 눈빛에서 굴러 나온 나침반 속에 서쪽으로 가는 기차의 역방향 좌석
같은 목적지를 가진 최악의 방향
서쪽이 서쪽인 서른 가지 이유를 찾다가 화장실 구석 마대자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그게 뭐라고 심심한 방향을 하나 둘 따지고 논다
그림씨에게
쇠붙이라면 뭐든 척척 만들어준다는 철공소 무뚝뚝한 그림씨에게 그려온 걸쇠 도안을 내보이며 물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손잡이 없는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는 어느 행성의 별이름 같아, 조금씩 다른 꼴로 진열된 그의 연장들을 바라보며 비극과 엇비슷한 모종삽 검은 혓바닥을 한껏 내민 꽃삽처럼 귀여운 꾸밈말을 주문한다
겁도 없이 드나들었던 문에 대한 사과, 사과에 어울릴 걸쇠를 부탁해요
열린 것도 닫힌 것도 아닌 문틈 짖어대는 눈빛 잠시라도 볼 수 있게 아버지를 위한 조간신문 어머니를 위한 실손보험 세일즈맨의 아쉽고 간절한 침묵 그 앞뒤에서 미적거리는 거절, 왼손잡이의 고민 펑퍼짐한 양귀호미 사시사철 피고 지는 무기력한 개화 단호한 결실, 그 반짝이는 비애같이 피할 수 없는 꾸밈말
아름다운, 은 무책임하고 보고 싶은, 은 상투적이어서 싫어요
이 꼴 저 꼴 하나만 고를 순 없나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림씨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다고, 읽히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확실치 않은, 모호한 그래서 미리 확인되어야 하는 단 하나의 꾸밈말 세상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라고, 없다면 하염없이 기다릴 수 있다고
꽃처럼 죽은 비유가 때론 돋보이죠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디자인도 괜찮아요
나한테로 가서 나한테서 오는 나, 또 다른 내가 되어줄 당신 같이 불가능한 형용사 그림씨의 뛰어난 손지식이 보내줄 얼굴 장신구 사실처럼 빚어낸 머릿결 무쇠로 만든 귀 무쇠로 만든 눈 무쇠로 만든 입,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의 걸쇠로 당신에게 나를 걸어보려고
신정민 2003년 부산일보 등단. 시집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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