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시내에는 예로부터 홍수와 해일이 일어 났다 하면 시내가 물난리를 겪는 것이 상례였다. 허목(許穆)이 삼척부사로 왔을 때에도 큰 홍수가 일어나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에 허목부사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삼척포에 세웠더니 해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898년 무술년(戊戌年) 봄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퇴조비가 한밤에 홀연이 간데 온데 없이 사라졌으니, 이는 큰 해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여, 백성들이 짐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산으로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더욱이 부채질 한 것은 삼화사(三和寺)에 있는 비결책에 무술년 2월 10일 자시(子時)에 동해 바다 물이 끓어오른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니 소동 중에 큰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영동 일대에 퍼지어 강릉에도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강릉 부사 정헌시(鄭憲時)는 전령을 삼척에 보내어 퇴조비 여부를 알아보았다. 퇴조비는 건재하고 있어 뜬소문이란 것을 알고 백성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조선왕조 제18대 현종 1년(1660년) 음력 10월 삼척부사로 허목(許穆)이 부임한 이듬해에 허목 부사는 서별당(西別堂)을 지었고 역사 유적을 두루 답사 기문(記文)을 남겼다. <서별당기(西別堂記)>〈죽서루기문(竹西樓記文)>〈노동·동산이묘기(蘆洞·東山二墓記)> <두타산기(頭陀山記)〉등을 이때 썼다. 또한〈치리사유부노문(置里社諭父老文)>〈양창직제통편의상(兩倉稷燔便宜狀)〉등의 글을 짓고 장계를 올렸다.“(중략) 흉년을 만나서 2월에 대여곡을 나누어 준 뒤로 지방 백성과 유민(流民)들 가운데 대여곡을 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 지금은 5백83호나 됩니다. 보리가을까지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는데 찾아오는 기민(飢民)들은 5,6백명이 넘으니 본부의 저축은 바닥이 날 것이고 간성(杆城)에서 수송해 올 대여곡이 비록 5백섬이라고 하지만 북쪽으로 운항한 많은 배들이 영해(寧海)에 있으면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간성(杆城)에서 곡식을 수송해 오려면 많은 선박이 필요한데 영해의 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때는 본부의 곡식은 바닥이 나고 기민은 흩어진 다음이어서, 그렇게 되면 굶어 죽는 자가 들판에 가득하더라도 그냥 보기만하고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상평창(常平倉)의 기장을 가지고 대출을 하여 구제해야 되겠습니다.”
현종 3년 (1662년) 봄에 간성에서 곡식 2천섬을 실어 와서 진흘했다.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이런 가운데 음력 7월 24일 대풍우(大風雨)가 일어났다. 기와가 날아서 깨어지고 나무는 뿌리째 뽑혀 부러지고 물이 범람하여 전야(田野)가 모두 침몰하였다. 삼척부의 주민들이 말하기를 소시때 큰 수재를 당하여 많은 굶주림을 당하였는데 금년에 다시 그러한 해를 만났다고 했다. 폭풍우는 삼척의 해안선을 따라 더욱 심했다. 이에 삼척부사 허목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만리도(萬里島)에 세웠다.
동해에는 원래 조석간만의 차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허목 부사가 부임했던 당시에는 조수가 크게 일어났다. 조수가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와 읍내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다. 홍수철에 오십천의 물줄기는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오십천 강 입구가 막히고 거슬러 올라온 조수가 읍내 마을을 덮쳤던 것이다. 해일 피해가 극심했다. 현종 3년(1662년) 음력 7월 24일의 대풍우(大風雨)는 조수가 끓어올랐던 대표적인 조수 피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허목 부사가 만리도에 세운〈척주동해비>를 민간에서 퇴조비(退潮碑)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허목 부사의 신비로운 문장과 웅혼한 필치로 석각한〈척주동해비〉의 위력과 덕화에 감동되었는지, 그 후부터는 조수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해일을 없애는 신령한 비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사 이계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허미수(許眉未.허목의 호) 선생이 작문하여 비를 세워 조수를 막았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도끼로 비석을 부쉈다. 그랬더니 조수가 다시 치밀었다. 비를 다시 세웠더니 과연 조수가 없어졌다"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지금 삼척항(三陟港) 축항 3분의 2되는 지점에 있던 만리도에 세웠으나, 48년 뒤인 숙종 34년(1708년)에 풍랑으로 부러졌다. 당시의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척주동해비 원문을 사방으로 찾았다. 마침 문생 한숙처(韓塾處)에게서 구했다. 그 원문을 모사 개각했다. 그랬던 것을 숙종 36년(1710년) 삼척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官島·지금의 육향산) 동쪽 기슭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지금의 육향산(六香山) 산정 자리에 이전한 것은 1969년 12월 6일이었다. 비의 높이 1.7m, 너비 76㎝, 두께 23㎝이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삼척을 척주(陟州)로 이름을 고쳤고,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척주동해비의 척주는 이때의 척주 명칭을 딴 것이고 동해비는 삼척의 동해, 조선 왕조 때의 동해를 가리킨 것이다. 허목 부사가〈척주동해비>를 세우던 때는 동해를〈朝鮮海>로 프랑스, 영국, 네델란드 등의 지도에 표기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척주동해비는 허목부사의 철학의 극치를 담은 신비로운 문장과 웅혼한 전서체 필치로 성난 바다와 물과 불과 바람을 다스린 주술적인 이 비문을 탁본하여 소장하면 온갖 재앙을 물리쳐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 준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이 비문을 소장 하려 한다. 비문 네째줄에 "교인 지진(鮫人之珍)"은 "교인의 보배"로 원문을 해석하고 있다. 교인(鮫人)은 물 속에 사는 괴물인데, 쉬지 않고 비단을 짜는데, 힘들어서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이 되는 동물이다. 또한 비문 여섯째 줄에는 "천오구수(天吳九首) 괴기일고(怪夔一股)"는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와 외발 달린 짐승 기(夔)는 "태회차우(颱回且雨)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로 번역하고 있다.
천오(天吳)는 몸은 범과 같고 얼굴은 사람과 같으며 머리 다리 꼬리가 각각 여덟개 달린 괴물이다. 그리고 기(夔)는 동해로 7천리로 들어가면 유산(流山)이라는 산이 있고 거기 사는 짐승이 있어 소의 형상에 몸이 푸르며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인데 그가 물에 드나들 때 비바람이 인다. 이러한 이면의 뜻이 담겨 있는 척주동해비이다.〈문화재 편과 연관〉
<解> 큰 바다 가없이 일렁이고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모래바다 밀물썰물 없으므로 大澤(대택: 동해를 이름)이라 이름 했내.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 있네. 밝디 밝은 暘谷(양곡: 해 뜨는 곳)은 해 뜨는 문이로다. 羲伯(희백: 요순 때 천지와 사시를 다스린 관원)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析木(석목: 동쪽에 있는 두 별)의 위치요, 牝牛(빈우: 丑方의 두 별)의 궁으로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교인: 물속의 괴물)의 보배와 바다의 온갖 산물 많기도 하여라.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너울대는 상스러움은 덕을 이루어 나타남이로다.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달과 함께 성하고 이지러지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토하고 머리 아홉인 天吳(천오: 머리는 범 몸은 사람인 水伯)와 외발달린 괴물 소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아침에 돋는 햇빛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줏빛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삼오야 둥실 뜬달 물은 거울이 되어 주위를 신령스럽게 비추니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扶桑(부상: 해가 밤에 머무는 나무)의 沙華(사화: 동해에 있는 나라)와 黑齒(흑치: 남만에 있는 종족) 麻羅(마라: 남만에 있는 종족)와, 상투 튼 莆家(보가: 종족의 이름)며 蜑蠻(단만: 종족의 이름)의 굴과 조개 爪蛙(조와: 부족 이름)의 원숭이, 佛齋(불재: 부족 이름)의 소들은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성덕이 멀리 미쳐서 모 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 멀리 까지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都護府使 陽川 許穆 先生의 碑文
<참고>척주동해비란?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1661년(현종 2)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세운 것으로, 조수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오십천(五十川)이 자주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했다. 이를 염려하던 허목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우자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후 비가 파손되어 다시 조수가 일게 되자, 1710년(숙종 36) 비문을 그대로 베껴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비문은 고전자체(古篆字體)로 씌어졌는데,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인 허목의 필체이다.
삼척 시내에는 예로부터 홍수와 해일이 일어 났다 하면 시내가 물난리를 겪는 것이 상례였다. 허목(許穆)이 삼척부사로 왔을 때에도 큰 홍수가 일어나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에 허목부사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삼척포에 세웠더니 해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898년 무술년(戊戌年) 봄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퇴조비가 한밤에 홀연이 간데 온데 없이 사라졌으니, 이는 큰 해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여, 백성들이 짐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산으로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더욱이 부채질 한 것은 삼화사(三和寺)에 있는 비결책에 무술년 2월 10일 자시(子時)에 동해 바다 물이 끓어오른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니 소동 중에 큰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영동 일대에 퍼지어 강릉에도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강릉 부사 정헌시(鄭憲時)는 전령을 삼척에 보내어 퇴조비 여부를 알아보았다. 퇴조비는 건재하고 있어 뜬소문이란 것을 알고 백성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조선왕조 제18대 현종 1년(1660년) 음력 10월 삼척부사로 허목(許穆)이 부임한 이듬해에 허목 부사는 서별당(西別堂)을 지었고 역사 유적을 두루 답사 기문(記文)을 남겼다. <서별당기(西別堂記)>〈죽서루기문(竹西樓記文)>〈노동·동산이묘기(蘆洞·東山二墓記)> <두타산기(頭陀山記)〉등을 이때 썼다. 또한〈치리사유부노문(置里社諭父老文)>〈양창직제통편의상(兩倉稷燔便宜狀)〉등의 글을 짓고 장계를 올렸다.“(중략) 흉년을 만나서 2월에 대여곡을 나누어 준 뒤로 지방 백성과 유민(流民)들 가운데 대여곡을 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 지금은 5백83호나 됩니다. 보리가을까지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는데 찾아오는 기민(飢民)들은 5,6백명이 넘으니 본부의 저축은 바닥이 날 것이고 간성(杆城)에서 수송해 올 대여곡이 비록 5백섬이라고 하지만 북쪽으로 운항한 많은 배들이 영해(寧海)에 있으면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간성(杆城)에서 곡식을 수송해 오려면 많은 선박이 필요한데 영해의 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때는 본부의 곡식은 바닥이 나고 기민은 흩어진 다음이어서, 그렇게 되면 굶어 죽는 자가 들판에 가득하더라도 그냥 보기만하고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상평창(常平倉)의 기장을 가지고 대출을 하여 구제해야 되겠습니다.”
현종 3년 (1662년) 봄에 간성에서 곡식 2천섬을 실어 와서 진흘했다.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이런 가운데 음력 7월 24일 대풍우(大風雨)가 일어났다. 기와가 날아서 깨어지고 나무는 뿌리째 뽑혀 부러지고 물이 범람하여 전야(田野)가 모두 침몰하였다. 삼척부의 주민들이 말하기를 소시때 큰 수재를 당하여 많은 굶주림을 당하였는데 금년에 다시 그러한 해를 만났다고 했다. 폭풍우는 삼척의 해안선을 따라 더욱 심했다. 이에 삼척부사 허목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만리도(萬里島)에 세웠다.
동해에는 원래 조석간만의 차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허목 부사가 부임했던 당시에는 조수가 크게 일어났다. 조수가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와 읍내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다. 홍수철에 오십천의 물줄기는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오십천 강 입구가 막히고 거슬러 올라온 조수가 읍내 마을을 덮쳤던 것이다. 해일 피해가 극심했다. 현종 3년(1662년) 음력 7월 24일의 대풍우(大風雨)는 조수가 끓어올랐던 대표적인 조수 피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허목 부사가 만리도에 세운〈척주동해비>를 민간에서 퇴조비(退潮碑)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허목 부사의 신비로운 문장과 웅혼한 필치로 석각한〈척주동해비〉의 위력과 덕화에 감동되었는지, 그 후부터는 조수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해일을 없애는 신령한 비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사 이계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허미수(許眉未.허목의 호) 선생이 작문하여 비를 세워 조수를 막았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도끼로 비석을 부쉈다. 그랬더니 조수가 다시 치밀었다. 비를 다시 세웠더니 과연 조수가 없어졌다"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지금 삼척항(三陟港) 축항 3분의 2되는 지점에 있던 만리도에 세웠으나, 48년 뒤인 숙종 34년(1708년)에 풍랑으로 부러졌다. 당시의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척주동해비 원문을 사방으로 찾았다. 마침 문생 한숙처(韓塾處)에게서 구했다. 그 원문을 모사 개각했다. 그랬던 것을 숙종 36년(1710년) 삼척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官島·지금의 육향산) 동쪽 기슭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지금의 육향산(六香山) 산정 자리에 이전한 것은 1969년 12월 6일이었다. 비의 높이 1.7m, 너비 76㎝, 두께 23㎝이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삼척을 척주(陟州)로 이름을 고쳤고,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척주동해비의 척주는 이때의 척주 명칭을 딴 것이고 동해비는 삼척의 동해, 조선 왕조 때의 동해를 가리킨 것이다. 허목 부사가〈척주동해비>를 세우던 때는 동해를〈朝鮮海>로 프랑스, 영국, 네델란드 등의 지도에 표기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척주동해비는 허목부사의 철학의 극치를 담은 신비로운 문장과 웅혼한 전서체 필치로 성난 바다와 물과 불과 바람을 다스린 주술적인 이 비문을 탁본하여 소장하면 온갖 재앙을 물리쳐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 준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이 비문을 소장 하려 한다. 비문 네째줄에 "교인 지진(鮫人之珍)"은 "교인의 보배"로 원문을 해석하고 있다. 교인(鮫人)은 물 속에 사는 괴물인데, 쉬지 않고 비단을 짜는데, 힘들어서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이 되는 동물이다. 또한 비문 여섯째 줄에는 "천오구수(天吳九首) 괴기일고(怪夔一股)"는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와 외발 달린 짐승 기(夔)는 "태회차우(颱回且雨)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로 번역하고 있다.
천오(天吳)는 몸은 범과 같고 얼굴은 사람과 같으며 머리 다리 꼬리가 각각 여덟개 달린 괴물이다. 그리고 기(夔)는 동해로 7천리로 들어가면 유산(流山)이라는 산이 있고 거기 사는 짐승이 있어 소의 형상에 몸이 푸르며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인데 그가 물에 드나들 때 비바람이 인다. 이러한 이면의 뜻이 담겨 있는 척주동해비이다.〈문화재 편과 연관〉
<解> 큰 바다 가없이 일렁이고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모래바다 밀물썰물 없으므로 大澤(대택: 동해를 이름)이라 이름 했내.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 있네. 밝디 밝은 暘谷(양곡: 해 뜨는 곳)은 해 뜨는 문이로다. 羲伯(희백: 요순 때 천지와 사시를 다스린 관원)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析木(석목: 동쪽에 있는 두 별)의 위치요, 牝牛(빈우: 丑方의 두 별)의 궁으로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교인: 물속의 괴물)의 보배와 바다의 온갖 산물 많기도 하여라.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너울대는 상스러움은 덕을 이루어 나타남이로다.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달과 함께 성하고 이지러지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토하고 머리 아홉인 天吳(천오: 머리는 범 몸은 사람인 水伯)와 외발달린 괴물 소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아침에 돋는 햇빛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줏빛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삼오야 둥실 뜬달 물은 거울이 되어 주위를 신령스럽게 비추니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扶桑(부상: 해가 밤에 머무는 나무)의 沙華(사화: 동해에 있는 나라)와 黑齒(흑치: 남만에 있는 종족) 麻羅(마라: 남만에 있는 종족)와, 상투 튼 莆家(보가: 종족의 이름)며 蜑蠻(단만: 종족의 이름)의 굴과 조개 爪蛙(조와: 부족 이름)의 원숭이, 佛齋(불재: 부족 이름)의 소들은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성덕이 멀리 미쳐서 모 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 멀리 까지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都護府使 陽川 許穆 先生의 碑文
<참고>척주동해비란?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1661년(현종 2)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세운 것으로, 조수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오십천(五十川)이 자주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했다. 이를 염려하던 허목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우자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후 비가 파손되어 다시 조수가 일게 되자, 1710년(숙종 36) 비문을 그대로 베껴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비문은 고전자체(古篆字體)로 씌어졌는데,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인 허목의 필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