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불교 포교 1세대 마지막 주자
혜성스님
미주 땅에 잿빛 승복을 입고 그 모습을 처음 선보인 한국 스님은 서경보스님으로 1964년이다. 그로부터 46년이 흐른 지금 캐나다, 미국, 멕시코에는 140여명의 스님들이 전법과 수행을 하고 있다. 백림사 혜성스님은 서경보 스님의 뒤를 이어 미주 땅에 한국불교의 씨를 뿌린 삼우, 고성, 숭산, 법안, 대원, 도안 스님의 뒤를 이어 1978년 4월에 문화비자를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혜성스님과 비슷한 시기에 온 스님은 서미사의 일면스님이 1977년, 시카고 불심사 법춘스님이 1978년 1월 이다. 1970년대까지 미주 땅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한 스님들을 미주한국불교 포교 1세대 스님이라고 볼수 있는데 혜성스님은 포교 1세대 대열에 가장 늦게 합류한 스님이지만 또한 1세대 스님 중 가장 젊은 스님이다.
혜성스님은 1962년 불국사로 출가하여 범어사에서 계를 받았다. 그 후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하고 통도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즉 한국의 불교전통에 따라서 공부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난 후 통도사에서 당시에 명성이 자자한 경봉스님을 모시고 2년 동안 지내면서 2차례의 안거를 마쳤다. 당시에 스님들뿐만 아니라 수 많은 신도들도 경봉스님의 지도를 받았는데 현재 혜성스님이 주지로 있는 부산 금강사 창건주 보살도 경봉스님에게 오랫동안 수행지도를 받은 사람이다. 이 보살이 부산에 금강사 절 세우는 불사를 하자 경봉스님께서 혜성스님에게 “금강사 불사를 도와주라"고 하여 혜성스님이 부산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산에 나온 스님은 이 작업이 끝나자 1970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하고, 그 후 대학원은 부산대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29세였다. 즉 혜성스님은 30세 전에 전통불교교육을 다 마치고 또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마친 것이다. 당시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다 마친 것이다.
1970년대 한국사회에서 이민이든 유학이든 미국에 가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젊은 혜성스님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은사 서경보스님에게 찾아가 미국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서경보 스님은 대혜라는 법명을 가진 미국인 제자를 소개하였다. 대혜스님이 사는 샌프란시스코로 온 스님은 여기에 조금 있다가 청정심 보살이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로 갔다. 이 지역에는 청정심 보살, 동국대학교 출신 이태근 씨 등을 모아 가정법회의 모임을 하다가 이를 해산시키고 청정심 보살등을 신도로 1979년 선국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오하이로 클리브랜드에 법흥사라는 절을 만들어 디크로이트와 클리브랜드를 오가며 1983년까지 5년동안 포교를 하였다. 그리고 미시간 주의 웨인대학교 박사과정에 적을 두기도 하였다.
그 후 스님은 스님이 초청한 도만스님에게 선국사를 인수인계 해 주고 한국에 나갔다. 한국에 나가 여기 저기를 다니다가 남해 보리암 뒤 용문사 주지 성진스님에게 다니러 갔다. 도반인 성진스님과 미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혜성스님은 성진스님에게 그간 미국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미국에 오게 되면 같이 협력하여 미국에서 포교를 해보자고 하였다. 용문사는 오래된 고찰인데 성진스님은 법당수리 중 발견된 사리 3과를 혜성스님에게 주었다. 이 사리가 혜성스님이 백림사 불사를 하는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혜성스님은 미국에 와서 도만스님, 성진스님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있던 도만스님은 곧바로 미국에 들어왔지만 성진스님은 들어오지 못했다. 혜성스님은 도만스님에게 디트로이트 선국사를 클리브랜드 법흥사는 비구니계의 원로인 해운스님에게 인계를 해주고 성진스님에게 얻은 사리를 명당에 묻고 미국불교계에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뉴욕에 오게 되었다.
1984년 뉴욕으로 이사
뉴욕으로 오게 된것은 디트로이트에 있으면서 숭산스님 모시고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하여 커네티컷 주 뉴 헤이븐 선원, 보스톤 캠브리지 선원, 프로비덴스 선원 등 숭산스님이 만든 선원을 방문하면서 혜성스님 자신도 뉴욕 근교에 수행처를 만들어겠다는 발원을 하였다. 그리고 1984년도에 현재의 백림사 터를 구했다. 이 터는 현재 180에이커지만 처음에는 폴란드 사람의 소유지 50에이커를 샀다. 현재 요사채와 종무소로 쓰고 있는 건물, 마구간이었으나 개조하여 지하는 식당으로 1층은 법당으로 쓰다가 지금은 없어진 건물, 그리고 보살들이 기도하면서 머무는 요사채 등 3개의 건물이 있었다. 그 다음에 현재 납골당 앞쪽의 땅을 길을 내기 위해 매입하였고 , 현재 탑을 모신 터를 그 나중에 샀다.
절 이름도 없이 2년 정도 살다가 1986년 백림사(白林사)라고 간판을 붙였다. 어느 날 아침 혜성스님이 이곳에서 겨울을 나면서 보니까 주변의 나무들이 하얀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옛부터 하얀색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하며 서양인을 백인이라고 하니 하얀 것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이나 서양인들이 모여 가람을 이루고 살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백림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혜성스님을 언급하면서 꼭 해야 하는 부분은 서경보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사실이다. 한국불교는 선종과 교종이 함께 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선종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는가를 중요시하고 교종에서는 전강을 받은 것을 중요시한다. 제주도가 고향인 서경보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하다가 머리가 아파 수양하려고 절에 갔다고 한다. 맨 처음 만난 스님이 전 진응스님이었지만 진응스님의 추천으로 석전 영호스님 밑에서 수학을 하였다. 영호스님에게서 전강을 받은 스님은 청담, 운허, 일봉 서경보, 운기, 운성, 그리고 시인 서정주 라고 한다. 60년대 말에서 80년대까지 한국의 전통강원과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혜성스님은 1992년 8월 20일에 서경보스님으로 전강을 받았다. 혜성스님은 현재 승가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지는 않지만 한국의 승가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려면 이런 계보를 가진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혜성스님은 1970년대 까지 들어온 미주한국불교 포교 1세대 스님이다. 1세대 스님 중 숭산, 도안, 법안스님은 입적하였고, 나머지 스님들은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많거나 그동안 많은 일을 하여서 이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혜성스님은 매해 한국에서 스님들을 초청하여 매해 개산대재 행사를 하고 있다. 이 행사에 보통 한국에서 몇 분의 스님이나 다인들을 초청하지만 한국의 중진스님들을 수 십 명이 참석한 경우도 두 번 있었다. 지금까지 혜성스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한국스님은 100명에 가깝다. 혜성스님은 가장 많은 한국스님들을 미국으로 방문하도록 한 스님이다. 올해에도 백림선원 안거를 위해 한국에서 5분의 스님과 함께 입국하였다.
혜성스님이 이렇게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뉴욕에 백림사 그리고 한국의 불교도시 부산 금강사 주지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혜성스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 질문 : 포교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 혜성스님 : 젊은 시절이어서 자기 극복이 어려웠습니다. 젊은 혈기만 가지고 포교를 하겠다고 접근했지만 젊기 때문에 신도교화가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국사와 법흥사를 하면서 내린 결론이 젊고 수행력이 부족한 사람이 ‘포교’라는 용어를 걸고 활동하는 것은 맞지않다. 산중 수행처에서 나 자신 먼저 수행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명산을 찾다가 백림사를 세운 케스킬에 와서 1984년부터 1986년 까지 은거해 살아습니다. 1986년에 백림사 간판을 걸고 절을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면서 산중 수행처를 만들겠다는 발원을 하였습니다.
▷ 질문 : 뉴욕 근교에서 한국전통사찰을 건립추진을 가장 먼저 하였습니다. 부산 금강사에 1987년 부터 법당 건평 60평 밖 7포 안 9포짜기 대웅전을 짓기 위한 나무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스님은 이들의 인건비를 마련하기 위해 맨해튼 18가 8에비뉴에서 야채가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림사 대적광전이 완성되기까지는 목수도 여러 사람이 바뀌었고 시간도 10년 가까이 소요되었습니다. 1993년 12월 상량식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미동부 지역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참석한 커다란 행사였습니다. 이 불사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 혜성스님 : 미국의 건축방식은 한국 전통사찰 건축 방식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한국 사찰의 설계는 상세한 설계가 없습니다. 그냥 모델만 있습니다. 우수한 목수들은 경험에 의해 설계가 머리에 있습니다. 대들보 하중문제, 추녀가 나가는데 연결문제, 기둥이 세워지면서 지진에 얼마나 견고성이 있는지 설계가 없고 머리에 있습니다. 미국의 건물은 지진에 얼마나 잘 견딜수 있나 등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설계를 요구합니다. 기존의 한국설계도로는 미국 건축법으로 허가 내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또 타운의 보드에서 종교활동을 긍정적이지 않아서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건축과정에서 한국자재의 운송문제 등으로 비용은 비용대로 많이 들었고 작업을 할 목수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야 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한국에서 대들보와 기둥을 다듬어서 어렵게 운반해 놓았는데 허가가 무려 5년동안 나오지 않아 이 목재들에 터마이트(개미)가 달려들어 쓸 수 없게 되어 이를 버리고 다시 만들게 되어 비용이 이중으로 들어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다른 사찰에서 한국 전통사찰 건립한다고 자문을 해 오면 이러한 경험을 모두 알려주어서 다른 사찰 건립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질문 : 법당 건립시 비용조달을 어떻게 했는지 들려주십시오?
▶ 혜성스님 : 저는 한국에서도 법당을 건립한 경험이 있습니다. 전통법당을 건립할 때 목수들한테 맡기면 현재 시세로 하면 한 평당 2천 만원입니다. 백림사 법당이 60평인데 당시에도 비용 때문에 목수들한테 모든 것 맡기면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대들보와 기둥을 다듬을때 제가 직접 나무를 사고 일꾼들한테는 일하는 시간으로 돈을 주는 날일을 시켰습니다. 이 목재들을 개미 때문에 버리고 다시 만들때에는 백림사 산위의 나무를 베어서 건조시켰고 일할때에는 제가 많은 일을 하면서 목수에게 날일을 시켰습니다. 법당을 전체를 완성 시키는데 얼마로 계약하는 형식으로는 미국의 열약한 조건을 가지고는 비용 때문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손수 일꾼들과 함께 일하면서 돈이 생기면 공사를 하고 돈이 바닥나면 쉬면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미국에 있는 산중 절은 신도들 보시 믿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백림사는 제가 한국에서 절을 지어본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손수 일을 하면서 경험으로 얻은 제 요령으로 돈이 있으면 공사를 하고 돈이 떨어지면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 질문 : 스님의 서예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좋은 평판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서예를 하였으며 어느 분에게 사사를 받았는지 또 무슨 체를 즐겨 쓰는지 궁금합니다.
▶ 혜성스님 : “서예는 어린 시절부터 하였습니다. 그때는 구성공 예천명 체를 익혔습니다. 그후 개인적으로는 한국서예심사위원장을 지낸 청남 오재봉선생님이 동아대학교에서 지도하였기 때문에 동아대학교 재학시절에 만나 지도를 받았습니다. “청남은 임환경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승려며 문인 서예가다. 진주 촉석루 현판을 쓰고 서예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대가로 알려졌다. 이 서예의 대가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것이다.
또 그 분의 제자인 고천 배재식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서예로 대통령 상을 받은 분인데 이 분은 황산곡 서체를 썼습니다. 이 분에게도 지도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절필을 했다가 미국에 와서 케스킬에 있으면서 정판교체를 만났습니다. 청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서화가 정판교(鄭板橋)는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시서화(詩書畵)에서 삼절(三絶)을 이뤘다. 백림사 초기에 겨울에 차이나타운을 가끔 방문하였는데 고서점에서 우연히 정판교 서체집을 발견하였다. 정판교 서체는 모조리 사서 겨우 내내 연습했다.” 정판교 체를 완전히 습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저도 부산에서 서예지도를 좀 했습니다.
▷ 질문 : 그 외에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 혜성스님 : 부산에서 차문화 진흥에 힘쓰면서 ‘차밭골 문화재’ 6회 행사를 하였습니다. 개산학당을 열어 4서 3경을 지도하며 불교 교양대학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질문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 혜성스님 : 제 스스로 수행하면서 백림사를 독특한 수행처를 만들고 싶습니다. 백림사가 뉴욕 등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와서 쉬면서 원기를 충전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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