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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병세가 오락가락해서 강씨네집 자식들이 다 모이였다. 연변에 있는 자식들은 물론 외국의 자식들도 다 왔는데 중국의 외딴 남해바다섬에 시집간 처제가 금년에는 올수 있을가? 십년이 넘도록 해마다 기다렸지만 한번도 오지않았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처제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싶었다. 녀자팔자는 시집팔자라더니 두번이나 옮겨앉은 처제의 운명은 남달리 기구했다. 다른 딸들은 대상을 잘 만나서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조선사람을 보고 죽자해도 없는 외딴섬에서 홀로 살아가는 처제가 얼마나 후회했을가? 공직에 있을 때 출장가면 한번 만나보려고 했는데 결국 내 가정을 돌보느라 한번도 가보지못한게 두고두고 후회되였다. 조선족에게 시집가면 몰라 한족에게 시집간 처제의 생사가 늘 바늘방석에 앉은기분이다. 1950년 출생
중국 연변수필마을 민족작가 리태근 회장의 글쓰기와 인민 합동농장에 로동을 하다가 잠시 웃는 조선동포
"연변의학" 잡지사 총편력임
1983년 연변일보 단편소설 "풍파"로 대뷔
"연변문예" "도라지" "송화강"등 잡지에 단편소설 "로지서"
"와룡사람" "풍파" "미인선발" "할미꽃피는 고향"등
수십편 발표, "할미꽃 피는 고향" 도라지 문학상 수여
"톱질령감과 맷돌어머니" "리태근 문학 작품집" 출판
수필 "깨여진 고향의 반쪽얼굴"한국 문경출판사 출판
2009년 "깨여진 고향의 반쪽얼굴"연변문학
윤동주문학본상 수상 한국해외문학상 수상
<연변화타중의문진부> 동사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수필을 통한 초혼과 초근서사
ㅡ리태근씨 수필을 읽고서
김 관 웅(연변대학 교수)
리태근씨가 세번째로 수필집을 상재하게 된다. 리태근의 최근 몇년 동안의 수필들을 읽을 때마다 부지중 1920년대 조선민족의 걸출한 민족시인 김소월의 《초혼(招魂)》의 시구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가군 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이 몇년 동안 리태근씨가 수필을 통해 애타게 부른것은 사라져간 시골 고향에 대한 초혼곡이였다. 《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은 이 면에서의 가장 이목을 끄는 작품으로서 광범한 독자들의 넓은 공감은 물론이고 평론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들도 이끌어내여 2009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필부분 본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리태근씨는 자신의 문학관을 다음과 같은 소박한 언어로 드러낸바 있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상측이 나면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혼을 부르는게 리해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메고 하얀 기발 날리며 산으로 가서 무덤을 만들고 귀신에게 뭐라고 부탁하는 건 더구나 리해되지 않았다. 사람은 죽으면 그뿐인데 제사는 왜 지내는가? 그런데 철이 들면서 생사고락을 나누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어쩐지 그들의 령혼이 영원히 우리들의 머리속에 나무뿌리처럼 끈끈하게 뻗어있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다. 죽은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산 사람은 죽을 때까지 령혼을 않고 살아가는게 현실이 아닌가?
나의 동년은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딩굴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불쌍한줄 몰랐는 데 책을 읽고서야 내고향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민초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쩐지 벼짚이 흣날리는 고향이 싫어져서 환골탈태하려고 발버둥쳤다. 용케도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서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 진출하게 되였다. 오로지 내가정 내 새끼를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고향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지는게 이상하다. ‘빈손타령’을 부르며 령혼을 달래려고 필을 들었는데 웬일인지 생각대로 안된다. 오히려 혹떼려 갓다가 혹을 달고 온다더니 괜히 자는 령혼을 깨워서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목메여 부르는 초혼곡 같은 리태근씨의 수필들에는 작가와 동년시절에 함께 뒹굴었던 “불쌍한 사람들”, “이 세상의 가장 불쌍한 민초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한평생 토밥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숱검댕이를 얼굴에 바르고 살아온 톱쟁이 아버지, 숯쟁이 아버지를 비롯하여, 머나먼 산동땅에서 허위허위 살길을 찾아온 채씨네 부자들, 온동네 이목을 한몸에 끌었지만 나를 매몰차게 대했던 시골처녀 미자……이 “이 세상의 가장 불쌍한 민초들”의 희노애락으로 점철된 리태근의 수필씨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초근서사(草根叙事)로 읽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달래여 준다.
물론 지금의 리테근씨는 고향을 떠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 정착하여 지금은 연길시의 도심의 두 곳에 개인병원까지 운영하면서 남부러운것 없는 중산층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지난 시절에 대해, 동년시절에 함께 뒹굴었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자기도취나 자기찬미나 노스텔지어의 회향병을 앓기만 한것이 아니였다. 리태근씨는 자기가 동년시절에 함께 뒹굴었던 “이 세상의 가장 불쌍한 민초들” 이야말로 중국조선족문화 뿌리였음를 암시하고 있으며, 요즘 이 뿌리가 사정없이 뒤흔리들다못해 송두리채 뿌리채 뽑혀나가고 있는 고향상실의비극과 그로 인한 근원적인 방황을 보여주고 있다. 리태근씨는 나보다 한살 손위인 형님벌의 동년배이다. 그래서 나는 리태근씨의 수필을 읽으면서 미상불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큰 공명대를 갖게 된 상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리태근씨와 나의 문학관이 서로 비슷한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래에서 리태근씨가 이런 “초근서사(草根叙事)”로 일관하는 수필을 창작하는 동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수필을 사랑해서 수필을 쓰는게 아니다. 걸작을 만들자고 수필을 쓰는건 더구나 아니다. 무정한 세월속에 구름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살아진 불쌍한 고향 사람들의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어들이려고 피를 물고 글을 쓴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은 재미없는지도 모른다. 하얀령혼을 달래는 글에는 미사려구와 글 작난이란 없다. 아무리 잘 써도 무표정이요 잘 못쓰면 한숨 쉬며 돌아간다. 하얀령혼들 이 씹던 풀뿌리를 찾는게 이렇게 힘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나의 문학관은 하얀 령혼을 달래는것이다.”
즉 리태근씨의 수필은 한풀이라고 할수 있다. 사라져가는 우리민족의 뿌리인 고향의 상실, 그 죽은 령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애절하게 부르는 무당의 씻김굿 한마당이라고나 해야 할것이다. 이런 문학관은 내가 근 20년전부터 주창했던 “민족적사실주의” 창작원칙과 그 궤를 같이 하는것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리태근씨가 견지하고 있는 수필창작 나아가서는 문학창작의 방향을 전폭적으로 긍정하고 성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문단에는 “손톱눈 곰는 줄 알아도 염통 곰는 줄은 모르고” 우리민족의 실존상황과는 아무런 산관없이 상아탑속에 들어거서 코노래나 부르면서 문학을 한답시고 떠들어대는 이들이 아주 많다. 이런 이들의 문학에 비하면 리태근씨가 대표하고 있는 문학방향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탄광의 광부들은 갱도안의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측정하기 위하여 작업하려 탄갱속으로 들어갈 때면 새장에 카나리아라는 작은 새 한마리를 넣어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리태근씨의 수필 쓰기작업은 마치도 탄갱속에서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짙어가자 자기의 죽음으로써 위험이 도래했음을 광부들에게 알리는 새장속의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다고 할수 있다.
지금 도시화,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중국조선족은 《장자(庄子)》[1]의 우화에서 나오는 “학철지부(涸辙之鲋)” , 즉 마치도 큰물이 빠진 후 강호(江湖)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자국 웅덩이 속에 남은 한마리의 가련한 붕어 같은 존재로 되였다. 리태근씨가 수필을 쓰는 글쓰기 작업은 바로 웅덩이의 물이 점점 지글지글 말라 가자 붕어가 산소부족에 허덕이면서 수면우에 주둥이를 내밀어 산소를 호흡하는 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메타포를 동원한다면 리태근씨의 수필은 탄갱속에서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짙어가자 자기의 죽음으로써 위험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새장속의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다고 할수 있다.
설사 이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나라 이 땅에서 태여났다. 때문에 이 나라 언어밖에 모르고, 여기밖에 집이 없고, 여기밖에 직장이 땅이 없고, 여기밖에는 부모형제도 피붙이도 아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개척하고 지켜낸 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밖에 살곳이 없는것이다. 어차피 시골의 고향에서 거의다 빠져나온 상황이니 도시에서 잘 정착하여 악착 같이 살아가야 할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리태근씨의 수필들은 또한 이 땅에서 계속 악착스럽게 살아가겠다는 넉두리이기도 하다.
2012넌 4월 20일 연길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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