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에
나타난 설원랑과 문노의 아름다움

화랑세기(花郞世紀)는 김대문(金大問)이 신라 역대 화랑들의 세계(世系)를 체계적인
전기체(傳記體)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현재 전해오고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15대에 걸친 화랑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중 7세의 설원랑(薛原朗)과 8세 문노(文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설원랑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피리를 잘 불었으나, 출신이 미천한 탓에 낭도들이 그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미실(美室)이 왕의 총애를 믿고 낭도들을 호령하였으므로 감히 낭도들이 거부하지 못하였다. 그로인해 설원랑은 7세
풍월주(風月主: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미생랑(美生朗)을 보좌로 삼았고 이후에는 미실과 정을 통하여 더욱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이때 문노 일파는 전쟁에서 미실의 남편인 6세 풍월주 세종(世宗)과 함께 세운 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위를 얻지 못하자, 설원랑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의 무리를 만들었으므로 낭도들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미실이 이를
근심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 삼고 비보랑(秘寶朗)을 보좌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예를 좋아하고 협기(俠氣)가 많았으며, 설원의 낭도들은
향가(鄕歌)에 능하고 맑은 놀이를 좋아하니,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무리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 부르고, 설원의 무리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일렀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원의 무리를 많이 따랐고, 초야에 있는 사람은 문노의 무리를 많이 따르면서, 서로 도의를
연마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진지대왕(眞智大王)을 폐위시키는 과정에 있어 미실은 설원랑이 문노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설원에게 명하여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니, 설원의 무리들 가운데 불평하는 이가 많아지자 설원이 말하기를, ‘총애해주는 궁주(미실)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다.’하며 무릎을 꿇고 문노를 스승으로 섬겼다.
이 때문에 문노의 무리들도 또한 설원에게 잘 복종하자, 미실이 기뻐하며 풍월주의
자리를 문노에게 양보하게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은 풍월주보다 지위가 못지않고 스승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며 사양을 하지만 설원이
미실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하여 그대로 풍월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문노는 국선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어 선화(仙花)라고 일컬어졌고, 설원은
영흥사(永興寺)에서 미실을 따랐기에 후에 미륵선화(彌勒仙花)라는 호칭이 가해졌다. 시종 미실에게 따른 사람이 설원이었으며, 시종 세종에게 따른
사람은 문노였으니 참으로 성대하고 지극한 일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현재 국내에 전해져오는『화랑세기』가 원본을 필사한 것인지 아니면 위작(僞作)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향후 지속적으로 연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다만『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자기가 모시는 사람의 뜻에 따라 지위를 양보하는
모습, 권력을 쫒지 않고 상관의 명을 따르고 그 이양 받은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대우하는 설원과 문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의리와
지조보다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한번 쯤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