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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接見龍、馬兩將於養和堂。 龍骨大以皇帝命, 進高麗玉印及申景瑗副元帥之印, 上謝之。 仍言蒙古尙在都城, 侵掠人物, 龍骨大卽使從胡, 驅出蒙古於城外, 令眞㺚守門。 且曰: "皇帝明當班師, 不可不來送。" 上曰: "諾。" 仍請刷還被擄人, 龍骨大曰: "皇帝自當有處分矣。" 上又言歲貢難辦之狀, 兩將曰: "貴國事勢, 帝所目覩。 當自再明年始行矣。"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2월 13일 壬寅 1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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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염초(焰硝)를 굽는 일은 그 공이 쉽지 않으며 저장된 것도 많지 않다. 만약 이것을 성(城)을 공격하고 진(陣)을 함락시키는 데 사용한다면 염초의 소비량은 매우 많을 것이다. 만약 저장하고 염초의 소비를 적게 하기 위하여 화포를 익히지 않는다면, 또한 필요한 시기를 당하여 응변(應變)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널리 염초를 준비하여 날마다 화포술을 연습하게 하려면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찬성 허조와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염초를 굽는 곳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세 곳뿐인데, 왜인들은 본래 성질이 간교(奸巧)하고 또 하도(下道)에 와서 사는 자도 많으니, 만약 그들이 그것의 굽는 기술을 본다면 반드시 능히 전습하여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화(禍)를 장차 예측(豫測)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동계(東界)011) ·서계(西界)012) 양계에서도 또한 다 염초를 굽게 하며 항상 화포를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물소[水牛]는 힘이 세고 밭 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중국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바꿔 오고자 한다. 다만 우리 나라는 중국의 남쪽 지방과는 기후(氣候)가 같지 않아서 물소가 우리 나라에서 번성(蕃盛)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
하니, 상이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물소가 밭을 가는 것이 보통 소의 두 배나 된다고 합니다. 전라도의 기후는 중국의 남방과 비슷하니 사양(飼養)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조도 또한 그것이 유리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에서 타려(駝驪)를 교역(交易)하고 싶다고 중국 조정에 주청하였더니, 황제가 그 값을 돌려보내고 타려 30필을 하사하고, 이어 유시하기를, ‘내 타려를 중외에 나누어 주고자 하나, 다만 사양한 수가 적어서 뜻대로 하지 못한다. ’고 하였었다. 지금 물소를 청하여도 도리에 잘못 될 것이 없으니 중국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바꾸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다. 예부에서 허락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사연을 갖추어 황제에게 주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壬寅/受常參, 視事。 上謂左右曰: "煮取焰(焇)〔硝〕 , 其功不易, 所儲不多。 若用於攻城陷陣, 則焰(焇)〔硝〕 之費甚多, 若因儲費之少, 不習火砲, 則亦無以臨機應變。 如欲廣備焰(焇)〔硝〕 , 日習火砲, 將如之何?" 贊成許稠、判書申商啓: "焰硝煮取之所, 慶尙、全羅、忠淸三(小)〔道〕 而已。 倭人性本巧, 而居下道者亦多, 若見其術, 必能傳習, 禍將不測, 宜於東西兩界, 亦皆煮取, 常習爲便。" 上又曰: "水牛力壯, 可使耕田, 予欲奏請易換。 但本國, 與中朝南方風, 氣不同, 恐或不盛。" 商曰: "臣聞水牛耕田, 倍於常牛。 全羅道風氣, 與南方相似, 可以畜養。" 稠亦言其利, 上曰: "高麗奏請, 欲換駝驢, 帝還其價, 賜駝驢三十匹, 仍諭曰: ‘予欲頒賜中外, 但畜養之數少而未果。’ 今請水牛, 無害於義, 可咨禮部請換, 禮部不許, 具辭奏達如何?" 僉曰: "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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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신묘년 만력 19년, 선조 24년(15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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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2월. 황윤길(黃允吉) 등이 대마도(對馬島)에서 바다를 건너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복명(復命)하는데, 가지고 온 수길(秀吉)의 계사(啓辭)에는 출병할 정상이 뚜렷하다. 임금이 왜적의 사정을 묻자 김성일(金誠一)이 대답하기를, “일본이 지금은 출병할 기세가 없으니 아무 일 없을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하다. 물러나와서 일행의 사람들이 수길의 매우 사나운 정상을 퍼뜨리자 조정과 백성들의 인심이 어수선하고 두려워하다.
○ 왜적의 괴수 수길이 또 현소(玄蘇)ㆍ평의지(平義智) 등을 회사사(回謝使)로 내보내오자 우리나라에서는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宣慰使)로 하여 경상 감사 김수(金睟)와 함께 동래(東萊)에서 영접하게 하다. 보내온 글이 극도로 패악하고 오만하여, 거기서 그가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명 나라를 침범해 들어가겠다고 지껄여오다. 우리나라에서는 곧 자문(咨文)을 작성하여 성절사(聖節使) 김응남(金應南) 편에 보내어 명 나라 예부(禮部)에 보고하고 또 진주사(陳奏使) 한응인(韓應寅)을 보내 따로 자세하게 알리니, 명 나라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유(獎諭)하고 백금(白金)과 채폐(彩幣)를 하사하다. 계속하여 신점(申點) 등을 보내어 칙서와 하사품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명하게 하고 또 왜적의 사정을 알리다.
○ 현소 등이 서울에 도착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시를 쓰기를,
매미는 시끄럽게 울면서 버마재비에게 잡히는 것 잊어버리고 / 蟬噪忘螳捕
물고기 놀며 백로 잠든 것 기뻐하누나 / 魚遊喜鷺眠
여기가 어디메오 / 此地知何地
다른 해 다시 이 땅에서 술자리를 펴리라 / 他年重開筵
하다. 돌아갈 적에 임박하여 의지가, “삼척(三陟)으로 해서 곧장 동해를 건너가려 하오.” 하매, 역관이 대답하기를, “삼척은 서울에서 3천여 리나 떨어져 있어서 졸지에 갈 수 없는 곳이오.” 하니, 의지가 눈을 부릅뜨고 우리나라 지도를 내보이며, “이 나라에 어찌 천 리의 국경이 있단 말이오.” 하다. 동래에 도착해서는 관사에 시를 쓰기를, “명년에 만약 동풍의 편을 얻게 된다면 67주(州)를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얻으리라.” 하다.
○ 조헌(趙憲)이 강계(江界)에서 밤낮으로 걷기[步] 연습을 하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애쓰는 거요?” 하고 물으면, 조헌은, “명년 왜란 때 효력을 볼 것이오.”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방면되어 옥천(沃川)에 돌아가다.
○ 명 나라 사람 허의후(許儀後)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는데, 수길이 침공(侵攻)할 정상을 보고 명 나라에 다음과 같이 상소하다.
기밀을 보고하는 사람 허의후는 충의로 나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신미년(명 목종(明穆宗) 융경(隆慶) 5년, 조선 선조 4년(1571))에 광동(廣東)을 지나다가 배까지 함께 포로로 잡혔습니다. 다행히 작은 기술이 있다 해서 일본 살마(薩摩)의 번주(藩主)한테 사랑을 받아 구차스럽게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못된 무리들이 왜놈들을 인도하여 우리 대국(大國)의 상선과 어선이 노략질당하고 갖은 괴로움을 다 당하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저희들이 함께 협력하여 살마의 번주에게 애걸하자, 진화(陳和)ㆍ오전소(吾錢小) 등 10여 두목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적몰(籍沒)하였으며, 나머지 도적들도 달아나서 캄보디아ㆍ샴[暹羅 즉 지금의 태국]ㆍ루송[呂宋] 등지로 들어갔습니다. 이리하여 해적선이 잠잠해졌습니다만, 정해년(1587, 선조 20)에 관백(關白)이 살마(薩摩)ㆍ비전(肥前)ㆍ비후(肥後)를 격파하고 또 몰래 해적선을 내놓았는데, 제가 살마 번주를 따라 관백한테 들어가 뵙고 죽음을 무릅쓰고 울음으로 호소하자 관백이 그제서야 영을 내려 해적들의 목을 베어 서울로 보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도적 두목은 도망하여 못 잡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다 위는 평온합니다. 관백이 또 중국을 침공해 들어가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저희들은 앉으나 누우나 불안해 하였습니다만, 다행히 정보 탐문차 보내신 배를 만났습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배를 보내는 이 일은 국록을 먹는 사람의 좋은 기회요,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본심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오래 살던 중국인들은 다 도적의 잔당들이어서 아마도 진상을 말하려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또 다들 저자거리나 시골에서 살고 있어서 나랏일을 알지 못하니 한 사람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벌 받을 것을 피하지 않고 9월 3일 일본 사정을 차례로 쓴 다음 평호(平戶)를 거쳐 봉승선주(奉僧船主)에 주어서 친히 보시도록 청대(淸臺)에 보내드립니다만, 길은 막히고 물은 멀어 도착하게 될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9월 7일 또 내년 봄에 수길이 고려(조선을 그렇게 말한 것임)로 건너가 요동(遼東)을 치고 북경성(北京城)을 빼앗으리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저희들이 다시 조목조목 써서 9월 9일 새 선주한테 주어 청대에 전달하게 하였으나 도착하게 될지의 여부를 알 수 없어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만 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주균왕(朱均旺)의 충성스러운 심정과 극히 간절하고 의로운 마음이 발현한지라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기를 자원하여 이 글[狀疏]을 안고 가서 보고하겠다고 하기에 저는 기뻐 뛰며 자세히 갖추어 진술해 바칩니다. 9월 25일, 일본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을 침략하러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살마의 군신이 비밀리에 일을 모의하고 동해도(東海道)에 있는 나라들에 통고했는데 올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한 나라만이라도 관백에 모반(謀叛)하는 데가 있으면 침략군은 떠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은 예측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먼저 마음을 써서 방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거룩하신 천자께서 신이 아뢰는 바를 보시고 방비하신다면 국가가 크게 다행일 것이고 백성들이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삼가 황공하게도 갖추어 진술합니다.
○ 일본의 상세한 사정을 진술합니다. 일본의 66국(國)은 곧 우리 대명(大明) 66부(府)에 해당됩니다. 만약 그 호구(戶口)와 전량(錢糧)의 총계를 따진다면 우리 10부의 수량도 못 됩니다. 원래 황제가 있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지만 나라의 정사는 감히 조금도 맡지 못하니, 바로 중국의 한대(漢代) 말엽에 열국(列國)이 각각 요지를 점거하여 서로 치고 빼앗고 하던 형세와 같습니다. 낳아서 열 살이 되면 칼쓰기를 배우고 활쏘기를 배우며, 우리 대명의 글자로 된 사서(四書)ㆍ주역(周易)ㆍ고문(古文)ㆍ육도삼략(六韜三略)ㆍ당시(唐詩)ㆍ통감(通鑑)ㆍ잡기(雜記) 등을 배웁니다. 그러나 배운다고는 하지만 문리(文理)는 통하지 못합니다. 병으로 죽는 것을 욕되게 여기고 전쟁으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평소에 자제들을 가르치기를, “열 살을 사나 백 살을 사나 한 번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차라리 적을 죽이고 죽으면 죽었지 움츠리고 물러나 살아서는 안 된다.” 합니다. 짧은 옷과 짧은 소매, 맨발에 머리를 깎고 긴 칼과 짧은 비수를 매일 몸에 지니고는 총을 겨루고 활을 겨루어 돈을 따는데 그것을 ‘부재(賻財)’라고 부릅니다. 화살을 지고 무거운 것을 지고서는 신(神)을 받드는데 그것을 ‘새원(賽愿)’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는 높은 산이 성이 되고 못을 파서 하수(河水)를 만들며, 적이 오면 양식을 먹는 자들은 성에 올라가 방어하고 양식이 없는 자는 다 죽여버리고 돌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싸워 빼앗는 데는 자기가 병정이 되고 자기가 양식을 대며, 장수는 뒤에 서고 병정은 앞에 섭니다. 복병(伏兵)의 계략은 잘 알지만 거짓 패하는 꾀는 모르고, 깃발을 많이 벌여서 적의 기세를 누르는데 한 병정이 열 깃발을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색을 이상하게 꾸며서 적의 마음을 놀라게도 하는데 소머리에 귀신 얼굴을 한 자도 있습니다. 이기면 대거 달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패하면 겁을 집어먹고 마구 달아나서 이기면 패할 것을 생각지 않고 패하면 회복할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육전(陸戰)은 잘하여 마구 죽이는 것만 알고, 수전은 잘 못하여 화공(火攻)을 모릅니다. 장수는 일정한 수의 병정이 없고 병정은 한 달을 넘길 양식이 없습니다. 나라를 비우고 출병하면서도 뒤를 습격하는 화는 모릅니다. 무거운 것을 지고도 멀리 나아가 싸우고, 앉아서 피곤한 적을 기다리는 전략은 생각지 않습니다. 뇌물을 써서 이간시키는 방법을 잘 쓰는데 이기게 되면 그 금품을 도로 빼앗고, 뜻을 같이 하고 죽음을 같이 하는 맹약을 잘 맺는데 목적을 달성하면 그 맹약을 잊어버리며, 이에 겸해서 거짓 화해와 속임수의 맹약을 써서 적국을 격파합니다. 성을 포위하는 데는 축대를 잘 구축해서 적의 성을 함락시키고, 인(仁)을 빙자하고 의(義)를 꾸며서 끝없이 탐욕을 부립니다. 법은 크고 작은 것을 물을 것 없이 약간의 죄에도 목을 벱니다. 황금이면 나라도 팔고 각박하게 백성을 학대합니다. 급한 공격을 가장 겁내어 오직 느린 싸움을 잘하고, 급하면 손도 채 못 쓰나 느리면 여유있게 위세를 기릅니다. 살마(薩摩)와 관동(關東) 사람은 강직하여 전투를 잘하고, 경락기내(京洛畿內)의 사람은 부드럽고 간사하여 모략을 잘합니다. 적이 적으면 기세가 배가 되나 적이 많으면 스스로 위태롭게 여깁니다. 전투만 있고 진(陣)은 없으며 살육만 있고 절제는 없습니다. 거짓으로 형세를 과장하여 병정을 놀라게 하지만, 잘 싸우는 병정은 1만 명 가운데 5천도 못됩니다. 그들의 배는 또 극히 불편합니다. 윗면은 넓게 바닥은 뾰족하게 만들어서 요동하기 곤란하므로, 가벼운 동요가 약간이라도 있으면 흔들흔들 뒤집히려 해서 가기도 어렵고 서기도 어려워 아주 공격하기 쉽습니다. 우리 대명을 ‘대당(大唐)’, 우리나라 사람을 ‘당인(唐人)’이라고 부르며, 왜(倭) 땅에 오래 산 자를 ‘구당인(舊唐人)’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대개 당 나라의 위풍이 본래 이 이적(夷狄)의 땅에 행해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堯) 임금ㆍ순(舜) 임금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진시황(秦始皇)ㆍ한 고조(漢高祖)ㆍ항우(項羽)ㆍ소하(蕭何)ㆍ진평(陳平)ㆍ한신(韓信)ㆍ장량(張良)ㆍ장주(莊周)의 고사를 배워서 알지만, 무릇 의복과 언어는 다 부허(浮虛)하여 실속이 없습니다. 전투하기 전에는 다들 큰소릴 치지만 싸움터에 임해서는 각자 무서워서 떨고, 전투하기 전에는 다들 목숨을 버릴 수 있다지만 전진에 임해서는 각자 살 궁리만을 합니다. 우리 대명에서는 마땅히 이러한 실정을 밝혀 장수들에게 알려주고 군사들에게 일러주어서, 온 천하로 하여금 그 폐단을 알아서 방비하게 해야 될 것입니다.
○ 일본이 침공해 들어가려는 이유를 진술합니다. 관백이 여러 나라들을 병탄(並呑)하고, 오직 관동(關東)만을 항복시키지 못했는데, 작년 6월 8일, 여러 제후를 궁전 앞에 모아놓고 장수에게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관동을 정벌하라 명하고는, “나는 곧 바다를 건너 당에 침입하려 한다.” 이렇게 말하더니 마침내 비전수(肥前守)에게 배를 건조하라고 명했습니다. 열흘 후 유구(琉球 지금의 오끼나와) 나라 이름이니, 절강(浙江) 남쪽에 있다. 에서 중을 보내고 입공(入貢)하였는데 황금 백 냥을 내려주고 당부하기를, “나는 대당(大唐)을 원정하려고 하는데, 너의 유구를 인도(引導 앞잡이)로 삼겠다.” 하고는, 이윽고 전의 왕오봉(汪五峯) 도당을 불러다 묻자, 그 도당이 대답하기를, “대당이 왕오봉을 잡았을 때, 우리 3백여 명은 중국 남경(南京) 땅에서부터 약탈하면서 복건(福建)으로 내려가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 손해도 입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이 일본을 범같이 두려워하니, 대당을 멸망시키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와도 같습니다.” 하니, 관백이 이르기를, “내 지혜를 가지고 내 군사를 쓰면 큰 물이 모래를 무너뜨리듯 예리한 칼이 대를 쪼개는 듯할 것인즉, 어느 성인들 흔들리지 않고 어느 나라인들 망하지 않을 건가. 나는 대당에서 황제 노릇을 할 것이다. 다만 수병(水兵)이 엄중하고 철저해서 당의 땅을 국부적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였습니다. 5월에 고려(즉 조선)가 나귀를 바치려 입경(入京)하였는데, 역시 유구에게 한 말로 당부하고 황금 백 냥을 내렸습니다. 고려가 왜(倭)에 입공한 것은 작년 5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광동(廣東) 상[蟓]의 경내(境內) 환불랑기(渙佛郞機) 사람이 우리 대명의 지도를 일본에 바쳤는데, 그 바친 것은 지도 한 폭, 개 한 쌍, 큰 말 한 필, 경단(京段), 향, 보석 등의 물건들과 은 5만여 냥이었습니다. 제가 살마로 내려갈 때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떤 당부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의심하기로는 당으로 건너가겠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어 가지고 관동(關東)의 마음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나라를 멀리 나가게 하고는 그때 가서 그 뒤를 습격하여 나라를 없애고 군(郡)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8월이 되어 관동을 평정한 후에는 전연 그런 뜻이 있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들은 침범해 들어간다는 일은 진실입니다. 금년 가을 7월 7일, 고려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가 그 인질이 되었는데, 관백더러 속히 결행(決行)하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그때 일본이 우리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입공해 왔다고 거짓으로 말하여 나라 안에 퍼뜨렸기 때문에 의후는 자기가 들은 대로 이렇게 거짓된 상주를 했다. 이것은 천만 년이 지나도 다 씻어 버려지지 않는 치욕이다. 9월 7일, 관백의 문서가 살마에 도착했습니다. 그 문서에, “군사 3만, 대장 2명을 뽑아 고려로 건너가서 당에서 회합한다. 66국의 군사 도합 50여 만과 관백이 직접 거느리는 군사 50여 만 도합 백만, 대장 1백 50명, 전마(戰馬) 5만 필, 대서도(大鋤刀) 5만, 병참도(柄斬刀) 10만, 장창(長鎗) 10만, 부도(斧刀) 10만, 파시도(破柴刀) 10만, 조총(鳥銃) 30만, 장도(長刀) 50만, 삼척검(三尺劍)은 사람마다 몸에 지니고, 내년 임진년 봄을 기해 일을 시작한다. 관백은 3월 1일에 출범한다.” 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마의 번주는 본래부터 우리 대명을 존경하여 왔고, 관백도 그 의중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살마 번주의 아우 무고(武庫)에게 군사를 거느리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살마의 재상은 이름이 행간(幸㑆)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본래부터 대명을 경외(敬畏)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빼돌려 몰래 루송[呂宋]ㆍ담수(淡水) 등지로 도망가서 일의 성패를 방관하려고 하였지만, 뜻밖에 기밀이 누설되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무고와 함께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무고의 사람됨은 본래 탐욕스럽고 겁이 있으며, 살마는 본래 결사적인 전쟁은 잘하지만 무모하고, 본래 군사는 있으나 양식이 없습니다. 그들의 약점을 두루 기억하셔서 그들을 막으면 만행(萬幸)이겠습니다.
○ 나라를 방어하는 방책입니다. 대저 고려는 작은 나라입니다. 일본 대마도와 3백 리가 떨어져 있고, 중간에 큰 바다가 막혀 있는데 물길은 2일의 거리이고 순풍이면 하루밖엔 안 걸립니다. 대국의 부모님(자기의 고국이기 때문에 한 말임)을 위해 계략을 내자면, 제발 충의 있는 인물에게 명하셔서 용맹하고 지략 있는 군사 약 2백만을 통솔하고 고려에 진주하여 그들의 관장(官長)들은 다 죽이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다 목 벨 것이며, 고려의 좌우 사방에 대군을 매복시킵니다. 고려 사람 중 우리나라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들에게 명하여 고려의 관리로 가장시켜 사면을 겹으로 포위하여, 화포(火炮)로 신호하여 공격해서 죽이고, 산동(山東)과 요동(遼東)에서도 각 50만씩 출병하여 연기를 신호로 왜적의 뒤를 치게 해서 수륙에서 서로 공격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왜적이 배불리 먹을 겨를도 없고 고려는 왜적과 호응하지 못할 것이며, 길은 주객(主客)으로 갈리고 뒤에는 구원병이 없으며, 수전에는 익숙지 못하고 화공(火攻)에는 당해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왜적이 비록 긴 칼을 가졌다 하더라도 소용이 닿지 않고 활과 총은 쓸 수 없을 것이며, 대장을 깡그리 죽일 수 있고 관백을 생포할 수 있으며, 왜병 1백만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멀리 오느라고 피로한 적을 앉아서 기다리고 주인으로서 객을 대비하는 형세인 것입니다. 적봉(敵鋒)은 정예(精銳)해서 급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왜적은 정예한 게 아닙니다. 대저 멀리 오느라고 지친 군사가 어찌 정예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들로 하여금 병영(兵營)을 만들어 방책(防柵) 속에서 거주하면서 정예한 힘을 양성할 기회를 준다면 토멸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 따로이 훌륭한 장수를 보내어 5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서 교련(敎鍊)하게하여 후원군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어금(御金)을 군중(軍中)에 걸어놓고 포상할 것임을 알려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利)를 보고 죽음을 바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절대로 맹자(孟子)의 인의(仁義) 따위 말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때는 맹자 당시의 시기와는 다르며 또 정도(正道)에 따라 할 일과 권도(權道)로 할 일이 같지 않습니다. 관동의 병가(兵家)는 가장 용맹하므로 역시 불러 쓸 만합니다. 그러나 왜적의 생각은 일정하질 않아서 혹 길을 나누어 진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양경(兩京)ㆍ산동(山東)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 일대의 해변은 모두 밤낮으로 군사를 교련하고 전선(戰船)을 많이 내어 방위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 비로소 만전을 기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접제의 화[接濟之禍]를 엄금하셔야 하는데 접제의 화는 도적에게 양곡을 주는 것이니, 해변의 주민이 적병을 돕는 것입니다. 만일 왜적이 중국의 땅을 밟게 되면 모름지기 이를 재빨리 공격하여 날과 때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우두커니 앉아서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일이나 꾀하였다가 이리 떼의 기세를 기르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만약 왜구가 성에 다가오면 구원병을 청해서 밖에 토성(土城)을 쌓아 겹겹이 포위하고, 성을 쌓고 못을 파고 총으로 공격하면 이것이 이른 바 내외 협공(內外協攻)이니 틀림없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앉아서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오래되면 위태합니다. 선박의 통행을 금하고 양곡 사들이는 것을 막는다면 백성들이 굶어 죽을 것이니, 우리는 절로 혼란해질 판인데 하물며 침입자를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성각(城脚) 뚫는 것을 조심해서 방비해야 합니다. 대저 관백은 매번 전진(戰陣)을 칠 때면 황금을 보내 화해(和解)를 사고는 10리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밤에 흙 방책을 쌓아 군사와 장수들이 쉬기를 기다립니다. 그 뒤 밤중에 성을 구축하여 그 주위를 포위하고, 하루하루 조금씩 접근해 들어가기를 도모합니다. 높은 방책을 쌓아 적병의 허실을 살펴 조총을 높이 들고 성을 공격하며, 아래로는 우물을 뚫어 성각을 파가지고 적의 성을 저절로 함몰하게 합니다. 그리고 혹은 황금을 많이 내어 내응(內應)해 줄 자를 매수하고, 혹은 온갖 간사한 꾀를 내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면 그 주었던 황금을 빼앗고 그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아시고 그들의 계교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일본 사람으로 장수 노릇을 하는 자들은 다 부귀한 가문의 자제들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니 곧 우리나라의 서생(書生)과도 같습니다. 그 재질이 참으로 유능한 자는 백에 하나도 없고, 오직 마구 싸울 줄이나 알 따름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소위 ‘군사를 쓰는 데 술을 마시게 하지 말라.’는 말은 불가합니다. 장수의 경우에는 물론 적당하지만 병정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대저 일본의 병정은 술을 마시게 해서 담력을 갖게 하는데 전쟁에 임할 때 한번 취하면 사기가 갑절로 늘고 살 것을 잊어버립니다. 이 방법은 마땅히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직접 달려가서 긴급을 고하고 싶으나 살마 번주의 곁을 떠날 수 없고 처자라는 무거운 짐이 있어서 그러질 못합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께서 저희들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살피지 못하시고 중죄를 가하게 하실까 두렵습니다. 이는 저희들의 한 조각 충의심을 헛되이 죽여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저희는 감히 못하니 오직 분명히 살피시어 유의해 주소서.
○ 일본 관백의 내력을 진술합니다. 관백은 바로 한(漢) 나라 대장의 칭호로서, 천자를 끼고는 제후를 능멸하고 멋대로 경락(京洛)을 점거합니다. 지금의 관백은 처음에 민가(民家)의 종으로 나무하는 일을 하였는데, 길에서 정관백(正關白)을 만났습니다. 좌우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관백이 석방하고 써주어 전부도수(前部刀手)가 되었고, 이웃 나라에 출정해서 마침내 적장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우자 관백이 기뻐하여 ‘목하(木下)’라는 성을 내리고 ‘십고차랑(十告次郞)’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는 늘 알랑거리면서 관백을 섬겼고 누차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자, 관백은 그를 대장으로 삼아 재상의 일을 겸임시켰고, 다시 ‘우시(羽柴)’라는 성과 ‘집전(執前)’이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드디어 관백을 죽인 다음 그 아들을 쫓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서서 관백이라 참호(僣號)하였으니, 바로 처음의 십고차랑(十告次郞)이 지금의 관백인 것입니다. 동서(東西)로 정벌하여 일본의 여러 나라를 합병하였습니다만, 그러나 한 번도 싸워 보거나 이긴 적은 없고, 오직 다 달콤한 말과 큰 소리 그리고 황금과 속이는 꾀로 얻은 것입니다. 작년 11월에는 자기 아우를 죽게 하였고, 금년 7월에는 자기 아들을 죽게 하여 안팎에 친속이라곤 없고 그 한 몸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왜적을 다 죽이고 곧 전승한 군사 50만을 옮겨서 곧장 왜땅으로 추격해 들어가면, 왜적은 마음이 부서지고 담이 서늘해져 꼼짝 못하고 생포를 당할 것입니다. 앞으로 공격하고 뒤로는 귀순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귀순을 받아들이고 뒤로 점령하고 하면 몇 달 안 가서 일본의 여러 나라를 다 평정하게 될 것이니, 오직 우리 부모님들은 유의하소서.
○ 일본의 66국 이름을 진술합니다. 운운. 뒤 경자년(1600, 선조 33) 강항(姜沆)의 계사(啓辭)에 상세히 나오므로 주(州)의 이름은 쓰지 않는다.
○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 9월 일 진정인(陳情人) 허의후(許儀後)ㆍ곽국안(郭國安)ㆍ보국사(報國士)ㆍ주균왕(朱均旺)은 감히 다시 미진한 일을 진술하여 백성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는 마음을 다하렵니다. 대저 저희들은 암혈(巖穴)에 사는 초개 같은 사람이요, 해변에서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자들로서 고난을 겪은 지 오래되어 두서를 모르고, 학문을 그만둔 지 오래되어서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필묵(筆墨)으로는 비록 어람(御覽)에 바칠 글을 쓸 수 없다지만, 마음만은 사실 천지와 귀신에게 고할 수 있다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관백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포학하기가 걸주(桀紂)보다 더하고, 속이는 꾀를 백 가지로 내어서 그 진실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전에 모든 나라에 명해서 비전(肥前)ㆍ일기(一岐)ㆍ대마도(對馬島)의 세 곳에 성을 쌓게 하여 당(唐)에 건너가는 관역(館驛)으로 하였으며, 대마도의 태수(太守)에게 명해서 상인으로 분장하고 고려에 건너가 지세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10월 28일, 회보하기를, “고려 왕은 20일 걸리는 거리에 군사를 물리고서 관백을 기다립니다. 그 나라 안에는 불복하는 자가 많고, 다만 대마도에 가까이 있는 한 현(縣)의 백성들만이 귀순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공격하려 든다면 간단히 빼앗을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11월 18일, 문서를 모든 나라에 두루 보내기를, “각각 3년의 양식을 마련하고 먼저 고려를 정벌하여, 고려 땅에 일본 백성을 모두 옮겨 농사를 짓게 해서 당에 대적하는 기지로 만든다. 만약에 대당(大唐)의 한 현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일본의 이름이 서는 것으로 당의 천하는 우리 소매 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왜적의 무지하기가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의 크기를 측량하는 격이니, 정말 우습습니다. 또 모든 나라의 군사를 합쳐서 고려의 해안으로 건너가 타고 간 배를 불사르고, 밥 하여 먹던 솥을 부수고서, “고려국을 빼앗거든 밤중에 성을 쌓을 때 사람을 포로로 잡고 재물을 빼앗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무릇 성을 쌓고 정벌할 때는 잠시 일각을 멈추거나 풀 한 오라기를 집어 갖는 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황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쳐다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며, 전진에 임해서는 한 자[尺]라도 후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을 만나면 산으로 가고 물을 만나면 물로 가며, 함정을 만나면 함정에 빠질망정 입을 열거나 발을 멈추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다 죽은 자는 뒤에 남겨두고 후퇴하여 산 자는 왕후(王侯)나 장수ㆍ졸병이고를 묻지 않고 목을 베어 대중에게 보이고 그 가족을 몰살한다.” 했으니, 그 자들의 법령이 엄하기가 이런 정도입니다. 12월, 관백이 풍후왕(豐後王)의 처를 강제로 차지해서 첩으로 삼았습니다. 명령을 내려 서해도(西海道)의 아홉 나라는 선봉이 되고 남해도(南海道)의 여섯 나라와 산양도(山陽道)의 여덟 나라는 그에 호응하게 하였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출정하여 부자 형제 간에 한 사람도 집에 남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러 나라들은 모두 의혹을 품고, “이번 거사는 대당(大唐)을 정벌하는 게 아니고 우리들의 뒤를 습격하여 우리 족속을 멸망시키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이들이 각기 비밀리에 모반(謀反)하려고 하였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모반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 관백이 침공해 들어가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겠지만,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큰 나라가 충의심을 가진 인물에게 명하여 정병을 많이 거느리고 먼저 고려에 가 있다가 왜적을 맞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스스로 낙담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대저 왜적은 조그마한 재능도 없고 단지 용맹 한 가지만 있으니, 그것은 맨주먹으로 범에게 덤벼들고 알몸으로 황하수를 건너는 격일 뿐입니다. 우리 큰 나라가 그자들의 단점을 알아서 두려워하지 말고, 밤낮으로 협공하여 오늘도 내일도 장수를 늘리고 군사를 보태서 뒤따르게 하며, 황금을 내걸어 포상할 것임을 보여 주어 후원병이 벌 떼같이 당도할 수 있게 한다면, 우리 군사의 기세는 세차고 적병의 기세는 약해질 것입니다. 첫 진을 격파하면 백 진도 격파할 수 있게 되고 왜적을 다 죽여 단 하나도 돌려보내지 않게 될 것이며, 관백까지도 생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비천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쓰시고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엎드려 바라고 만 번이고 빕니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이 글이 명 나라에 도착했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본래부터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기는 지성(至誠)을 알고 있어 이 글 가운데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 진위를 몰라서 급한 일을 알리는 사신이 연달아 찾아갔었는데도 구원병 파견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황응양(黃應暘)이 왔다가 돌아간 후에야 군사를 동원했다.
여름 6월.평의지(平義智)가 또 와서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하고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고 갔다. 탐지하러 다니는 것이 이토록이나 빈번하여 예측할 수 없는 정세가 이미 그 형적을 나타냈는데도, 여전히 화평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그것을 섬멸할 생각을 갖지 않았다.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음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한데, 북조(北朝)가 날아 건너오는 건 아침 아니면 저녁으로 박두해 있다.
○ 이해 봄과 여름에 양화도(楊花渡)의 물이 얕아서 선박이 통행하지 못했다.
[주-D001] 남조(南朝)에 인물이 …… 박두해 있다 :
중국 남북조 때에 북방의 군사가 양자강을 건너 와서는, “남조엔 사람이 없구나.” 하였고, 남조 사람들은, “북방의 군사들이 날아서 강을 건너왔구나.”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5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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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고려(조선을 말함)가 당나귀를 바치니 역시 유구에 하던 말로 말하고 금 백 냥을 주었다. 신묘년 7월에 고려가 조공을 들어와 관백에게 빨리 거사하도록 독촉하였고, 11월에는 공문이 살마주(薩摩州)에 왔는데 군사 3만 명을 대령하게 하고 대장 2명이 고려로 건너가 50여만 군사를 모아 관백이 친히 거느린 군사 50만과 합하여 합계가 백만, 대장이 150여 명, 전마(戰馬) 5만여 필, 대서도(大鋤刀) 5만, 참도(斬刀) 10만, 장창 10만, 작시도(斫柴刀) 10만, 조총(鳥銃) 30만, 장도(長刀) 50만이고, 석자 칼은 사람마다 가져 내년 임진년 봄을 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하였다.
의후가 사실과 틀리게 보고한 것은 역시 왜놈이 거짓말을 만들어 제 백성들을 위협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유구국 세자 상녕(尙寧)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소식을 알다. 각로(閣老) 허국(許國)만이 홀로 하는 말이, “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정형(情形)을 익히 아는데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 하였다. 김응남이 들어가자 허국이 불러서 조선의 사정과 왜놈들의 반역한 사실을 물은 뒤에 크게 기꺼워하면서 조정에 변명을 하여 여러 의심이 약간 풀리었다. 《일월록》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 연산군 8년 임술 > 1월 29일 > 최종정보
연산군 8년 임술(1502) 1월 29일(임인) 08-01-29[03] 병조가 북방을 방비하여 변고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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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兵曹)가 아뢰기를,
“평안도 관찰사가 아뢴 바에 의하면, 참지휘(站指揮)의 자비(咨批)에 ‘해서 삼위(海西三衛)에 달자(達子)가 애양보(靉陽堡)의 서북지방에 군사를 둔쳤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와 고려(高麗)를 침범하려고 할 것이다.’고 했으니,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것이 염려되오니, 적군을 방어(防禦)할 여러 가지 일을 조치하여 변고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12월 4일戊午 1번째기사 1644년명숭정(崇禎) 17년
보덕 서상리 등이 임경업에 관해 치계하다
국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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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 서상리(徐祥履) 등이 치계하기를,
"임경업(林慶業)의 군관 이효신(李孝信)이 관소(館所)에 왔으므로, 그 도망쳐온 경위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경업이 망명하던 당초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강원도 및 공청도 내포(內浦)를 왕래하면서 태안(泰安) 박수원(朴守元)의 집에 거주하였는데, 수원은 곧 임경업의 군관이었다.’ 하였습니다. 그가 데리고 온 뱃사람이 모두 10인이었는데, 이효신은 이천(利川) 서면(西面)에 거주한다고 자칭하였고, 차자룡(車自龍)·이형남(李亨男)은 범범하게 서산·태안 사람이라 칭하였으며, 중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임성기(林成己)라 칭하고, 하나는 최수명(崔守明)이라 칭하였는데, 모두 강원도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말에 의하면, 임경업은 지난해 5월 초에 태안(泰安)에서 배로 출발하여 중원의 해풍(海豊) 지방에 이르러 정박해서, 처음에는 해위 도독(海衛都督) 황비 군문(黃飛軍門)의 총병(摠兵)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뒤에 명나라 조정에서 그를 평로 장군(平虜將軍)에 임명하고 군졸 4만 명을 주었답니다. 북경이 함락된 후에 황 도독은 군대를 철수하여 남경(南京)으로 돌아갔고, 마등고와 임경업 두 장수는 석성도(石城島)에 머물고 있다가 청나라의 초유(招諭)114) 로 인하여 그 글을 받들고 귀순하였으므로, 이효신 자신은 표류된 사람 1명과 함께 마 총병의 심부름꾼을 따라 북경의 아문에 도착하였답니다. 그리고 임경업은 지난 경진년에 표류된 사람 및 소속 부하 30인과 함께 지금 등주(登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흉악하고 간사함을 헤아릴 수 없어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선 그가 가지고 온 청나라에서 보낸 초유문(招諭文)을 가져다가 베껴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그 초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국 섭정친왕(大淸國攝政親王)은 영지(令旨)115) 를 내려 고려 원임 총병(高麗原任摠兵) 임경업에게 유시한다. 우리 국가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연경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오직 너 임경업은 옛날에 죄를 짓고 도망쳤다가, 지금도 오히려 맨 나중까지 오지 않고 있다. 나는 천하를 다스릴 큰 계책을 행할 뿐이요, 한 개인을 사사로 보복하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너의 본국은 오랫동안 명나라를 섬겼는데 명나라가 또 멸망을 당했으므로, 나는 조정의 광대한 은혜를 체득하여, 앞서 지은 죄를 특별히 용서하고 모든 죄를 두번 다시 묻지 않을 것이니, 너는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너를 따르는 사람들 및 섬 안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앞장서 와서 귀순하라. 그렇게 하면 내가 의당 너의 재능을 헤아려서 공명(功名)의 길을 열어 보일 것이다. 우리 조정에서는 참다운 신의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니,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만일 사사로운 생각을 고집하여 결정하지 못하다가 기회를 한번 잃으면 후회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니, 너는 잘 생각하라."
첫댓글 자료ᆢ 고맙습니다
고려라는 명칭의 등장은 정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해석의 정당성은 이후로 미루어 연구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단지 唐人이란 용어에 대해 육당 최남선은 외국인을 말하던 명칭이라고 말하고 있군요. 참고할만 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