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도 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십시오.(데살 5,16-18 세레 때 나의 성구)
주인이 불러 주시니 일하고, 일감을 주시니 기쁘고, 일의 보람을 은총으로 채워주시니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 나는 신앙생활을 성당 일과 나의 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 삶과 신앙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자신이 너무도 부족해 신앙의 길을 찾았다. 나는 한분의 돋보이는 신앙생활에 매료되어 신앙의 첫발을 떼었다. 드러내어 보이지도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가정에 충실하고, 신앙인으로 의롭고 바르게 살며 그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그 분을 보며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지향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 청하였다. “그 좋은 것을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정말 그분은 나에게 희망의 빛을 주셨다.
현장작업의 바쁘고 고된 일과에도 주일과 예비자 교리의 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저를 주님은 세례로 새로 태어나고 거룩한 성찬식탁에 동참하는 영광의 축복을 주셨다. 새벽 일찍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금 더 일찍 출발 새벽 미사가 하루 일과에 추가되었다. 매일 퇴근길에는 대부모님 집에 모여 세례 동기들과 함께 어려움 중에 있는 분과 우리의 청원을 묶어 묵주기도를 하고 헤어졌다.
매일 미사 참례로 수녀님께서 미사 해설의 기회를 주셨다. 본당에는 여성 쁘레시디움만 있었는데 첫 남성 쁘레시디움(현 바다의 별 Pr.)이 창단되었다. 초대 남성 레지오 단원은 본당 사목위원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감히 20대 초반, 세례 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저를 수녀님께서 회장님들과 함께하는 레지오 단원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 본당과 레지오 마리애를 잘 모르던 나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기도와 활동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레지오 단원활동을 통하여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회장님을 통해 본당 상황을 알게 되고 성당활동 안에서 전례와 행사 준비를 도왔다.
“그 좋은 것을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당시 교회도 조선 천주교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준비하며 서울대교구 모든 성당이 참여하여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돌아가며 9일 기도와 미사가 봉헌되었다. 본당에서 회장님들의 물적 지원과 행사 준비 열의는 상상 초월이었다. 레지오 단원들의 끊이지 않는 기도와 행사 준비는 밤낮이 없었다. 행사 날, 청량리성당에서 우리가 정성들여 국화꽃으로 장식한 차량에 성인 유해를 모시고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에) 경찰 싸이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종로와 광화문과 시청 앞을 지나 도보행진 시작 집합 장소로 이동하였다. 준비한 꽃가마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성당으로 도보 순례가 시작되었다. 103위 순교성인 호칭의 만장기를 선두로 기도와 성가로 이어지며 질서 정연한 신자들의 행렬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행사 질서와 안내를 맡은 레지오 단원 모습 하나하나가 자신을 내어놓는 순교성인의 유혼을 닮아가는 것일까!
한국의 천주교 전 신자가 일치와 열정으로 바친 기도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으로 이어지고 103위 순교 성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본당의 예비신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즈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지인의 소개로 반년 가까이 교제하다가 결혼하게 되었다. 나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결혼의 청을 들어준 삶의 동반자 카타리나가 사랑스럽다. 이런 우리 집 사람을 천사라고 부른다. 통신교리로 세례 받고 혼인성사 결혼 준비를 꼼꼼히 챙긴 나의 협력자이다. 나의 불편한 상황에도 흔쾌히 결혼을 승낙해주시고 막내사위 뜻을 들어 세례 받으시고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신 처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결혼하면서 가정에 경제적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성당 활동보다 돈을 벌기위해 열심히 현장을 더 뛰었다. 어려운 가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에만 열중하였다. 자녀도 연년생으로 둘을 주셨다. 어렵게 저축하여 조그만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작지만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거처가 있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카타리나도 시장 안에 작은 패션용품 가게를 마련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이 나아짐에 감사드리며 조금 노력하면 돈도 모으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고 노력했다.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 제2의 인생 살아
그러나 그것도 한낱 꿈이었다. 현장에서 운전자 부주의로 작업 화물차량과 담장사이에 끼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척추 골절과 내장 파열 차오르는 복수와 고통으로 응급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순간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교우와 레지오 단원이 문병을 오시고 기도해주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회생 불가능한 나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 부서진 척추를 맞추고, 설 수도 없던 다리가 걸음마를 하고, 끊어진 내장은 이어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일 년 반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사고 운전자와는 조건 없이 합의각서에 서명하였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만들어 주셨다.
퇴원 후 일 년 반쯤 지난 무렵 상아탑 레지오 단원 형제님이 위로하러 방문을 오셨다가 이제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니 다시 레지오 단원으로 입단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불편한 몸으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다시 활동하는 것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레지오 단원으로 입단하였다.
레지오 행동 활동은 못하고 기도로 활동을 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원 형제님들과 친분을 쌓고 활동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한때 18명이던 단원이 갑자기 7명으로 줄어들고 간부의 결원으로 단원은 이탈하고 갑자기 해단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단원 중 가장 오래된 내가 Pr. 단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 꾸리아 부단장 직에 선출된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해단 위기의 쁘레시디움은 2년 반만에 분단하게 되었다. 지금은 해체에 직면한 또 다른 쁘레시디움으로 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불러 모아 채워주실 것을 확신한다.
꾸리아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주님은 일하는 사람에게 일감을 모아주신다. 이전에는 묵주기도 선창 부탁을 받으면 “안 돼요”에서 “예”로 변화시켜 주셨다. 본당에서 일을 맡기면 “바빠요” 에서 “하겠습니다”로 순명을 배웠다. 그리고 공동체를 통하여 정을 주셨다. 본당에서 활동할 때 어려운 일생기면 “너나 잘해”를 “함께 합시다” 정은 누군가 함께 나눌 때 완성됨을 깨우쳐주셨다. 세상에서는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도 많은 사랑의 일감을 주셨다.
남성 구역 반장을 시작으로 본당의 여러 단체 일을 두루 맡아보면서 가진 자에게 더 주시는, 나에 대한 주님 사랑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자신의 의지로 설 수 없는 나를 성모님 품안에 안으시고 주님의 길에 먼지 자락을 치우는 도구로 쓰임은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