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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
전도(傳道)시대(4세기 말까지)
불교 전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서역(西域)을 경유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물론 중국은 이 시대까지는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또 문자의 표현과 기록의 보존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국의 문화는 반드시 한자로 옮겼다. 안세고(安世高)·지루가참(支婁迦懺)·축법호(竺法護)·불도징(佛圖澄) 등의 외국 승려 외에 주사행(朱士行)·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의 중국인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독자성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老子) 수준으로 신봉되었고, 특히 반야(般若, 智慧)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서 해석하는 융합·절충이 성행하였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일종의 혼효사상(混淆思想)이 시행되었다.
연구시대(580년까지)
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서역으로부터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이후 9년 동안 여러 대승경전을 훌륭하게 번역하였고, 또 3000여 명의 제자를 교육했다. 여기서 중국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번역한 한문경전만으로 충분히 불교교리를 연구,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불타발다라·담무참(曇無讖)·진제(眞諦)·보리유지(菩提流支) 등의 도래승에 의하여 뛰어난 한역불전이 완성되었으며, 이들 여러 경과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많은 학파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역경서(譯經書)가 정리되어 경록(經錄)과 전기 등 신뢰할 만한 불교사의 여러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혼란이 계속된 이 시대에 불교는 겨우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한민족의 습속과 융합하여 우란분회(盂蘭盆會)같은 법회(法會)가 성행하게 되었다. 때로는 왕조에 의한 폐불(廢佛)이 있었으나, 불교는 즉시 부활하였다. 다퉁[大同]·윈강[雲崗]의 석불과 룽먼[龍門]의 석굴 등은 열렬했던 불교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시대(8세기 중반까지)
300년에 가까운 분열에서 중국은 마침내 통일되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왕조가 계속되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통일과 종합을 가져왔다. 불교의 여러 학파는 이른바 종파로서 독립하여 중국불교의 황금시대를 출현시켰으며, 수나라의 3대법사라고 하는 정영(淨影;慧遠)·천태(天台)·가상(嘉祥;吉藏)이 나타났다. 먼저 혜원은 그의 저서 《대승의장(大乘義章)》으로 유명하고,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으며, 지의는 천태종(天台宗)의 개조로서 알려졌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 敎相判釋)의 원형을 제시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여러 경전의 최상위에 두었으며, 또 지관(止觀;정신의 集注)에 힘써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길장은 용수(龍樹) 계통을 이어 받아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삼계교(三階敎)가 행해졌는데, 말법사상(末法思想)의 고취가 과격하였기 때문에 즉시 탄압되었으며, 그 가르침은 정토교(淨土敎)에 흡수되었다.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와 같은 승려가 나와, 오로지 아미타불 신앙을 주창하는 정토교가 확립되었다. 645년, 17년 동안의 인도-서역 여행으로부터 귀국한 현장이 당시의 인도에서 번영했던 불교를 중국에 전했다.
그 방대한 번역경전 중 아비다르마·유식·논리학(因明) 등에 귀중한 것이 많고, 특히 유식설(唯識說)은 그 문하인 자은대사(慈恩大師)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은 화엄경의 번역에 참가하여, 그 이전부터 내려온 화엄종(華嚴宗)을 확립했고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움과 동시에, 일체의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설(緣起說)을 그 가르침의 중심으로 했다.
또, 이미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 전해져 있던 선(禪)은 그 6대째라고 하는 혜능(慧能)과 그 동문인 신수(神秀)에 의해서 종풍(宗風)이 확립되고, 많은 우수한 후계자가 나와 엄격한 수행을 철저하게 하여 선종은 중국에서 안정된 지위를 쌓았다.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전래된 것이 밀교이며,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이 인도에서 당나라로 와서 밀교의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고, 밀주(密呪)의 염송(念誦)과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 수법(修法)이 특히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곧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실천시대(12세기 초까지)
이 시대 중반에 다시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충분히 중국화된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그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개판(開板)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널리 읽히게 되었다.
계승시대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압력을 받아 이동하여 남송(南宋)이 되자 특히 선이 유행하였는데, 천태·율(律)·정토 등도 부흥하여 정토교에서는 결사(結社)를 만들어 염불을 재가자사이로 넓혀 갔다. 몽골에서 일어난 원(元)나라는 티베트에서 티베트교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유착되어 그것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明)나라 때는 불교에도 국가통제가 엄격하여 중국불교사상 일찍이 없었던 불교교단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루어져 활발한 불교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유(儒)·불(佛)·도(道)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다. 다음의 청(淸)나라 때에는 일시적으로 티베트교가 부활하였으나 이미 국가 통제하에 안주해 온 불교에는 이제 지난날의 활력은 없었다. 재가불교의 부흥도 있었으나 원래 중국불교는 출가불교가 주류였으므로 전반적으로 불교는 쇠퇴하여 갔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중국대륙으로부터 불교는 그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며 최근에 조금씩 부흥되어 가고 있다. 한편, 타이완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가 전해져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불교 -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시대였다. 당시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불교 승려들은 상인들을 따라 중앙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코탄·소그디아·파르티아·쿠차 등)로부터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인들은 불상을 보면서 부처를 신으로 여겼으며 현세적 구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전을 처음으로 한역한 사람은 파르티아인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람으로서 148년에 수도 뤄양[洛陽]에 와서 주로 선관(禪觀 dhyna)과 소승경전들을 번역했으며 비슷한 때에 지루가참(支婁迦讖)도 뤄양에 와서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 등을 번역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정법화경 正法華經〉 등 약 150부 300권을 번역하여 중국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311년 장안이 북쪽 흉노족에게 정복당하자 한족들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317~419)을 세웠으며 많은 지성인들은 허탈감 속에서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불교의 이질적 세계관이 중국 지성인들 가운데 파고들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자연히 반야경전의 공(空) 사상을 노장의 무(無) 개념에 준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의도적으로 유교나 도가 사상의 술어들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화북지방에서는 서역 출신의 승려로서 주술에 능한 불도징(佛圖澄:232~348)이 눈부신 포교활동으로 많은 신자를 얻었으며 사찰들을 세웠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도안(道安:312~385)으로서 그는 반야경전을 강의했고 경전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외국 승려들을 초청하여 역경사업을 지원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여 중국 불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 혜원(慧遠:334~416)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정통했던 승려로서 여산(廬山)에 거하면서 동진 불교를 주도했다. 그는 아미타불을 명상하는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시작했으며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도안과 혜원의 불교 이해는 아직도 토착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구자(龜玆 Kucha)국으로부터 온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334~413)의 역경활동에 의해 비로소 중국 승려들은 대승불교 철학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마라집은 〈대품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유마경〉·〈금강경〉, 용수의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 등을 포함하여 35부 254권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 그의 번역은 그 이전의 것들에 비해 사상적 내용의 전달이나 문체의 미려함에서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374~414)는 공사상을 천명하는 논서들을 지어 공에 대한 성숙한 중국적 이해를 보였고 도생(道生)은 대승 〈열반경〉 연구와 불성사상·돈오(頓悟) 사상으로 유명했다.
한편 구마라집 이후 인도 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의 번역은 계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담무참(曇無讖:385~433)의 대승 〈열반경〉, 불타발타라(覺賢이라고도 함:359~429)의 〈화엄경〉,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394~468)의 〈능가경〉, 보리류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 진제(眞諦:Paramrtha 499~569)의 〈섭대승론 攝大乘論〉·〈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의 번역은 각각 중국 불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하기는 했으나 남조에서처럼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심한 박해를 받는가 하면 대대적인 승가의 지원도 있어서 윈강[雲崗]의 석굴과 같은 거대한 불교유적을 남기고 있다. 남조에서는 왕실의 한결같은 지원 아래 불교가 번창했으며 특히 교학적 연구가 발달했다. 남북조시대는 아직도 인도 불교의 문헌들이 소개되고 있는 역경기로서 중국인들은 불교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인도 불교의 주요경전과 논서들이 번역될 때마다 한 특정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주석적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열반경〉을 연구하는 열반종, 〈십지경론〉을 연구하는 지론종, 〈섭대승론〉을 전공하는 섭론종, 〈중론〉·〈십이문론〉·〈백론〉에 기초한 삼론종 등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능가경〉의 연구와 전수를 주로 하는 능가종도 형성되어 초기 선 불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토신앙 계통의 〈무량수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 정토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태종(天台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여 남북의 정치적·사회적 통합과 종교적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태종은 혜사(慧思)·혜문(慧文)을 거쳐 천태산의 지의(智:538~597)대사에 의해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所依) 경전으로 삼는 종파로서 당시 중국에 들어온 모든 주요 불교사상들을 석존의 설법 시기에 따라 다섯(五時)으로, 교설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8가지(八敎)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포괄적인 교상판석(敎相判釋:敎判이라고도 함)의 체계를 세웠다. 천태종은 또한 실천수행의 방법으로서 지관(止觀)의 명상법을 제시했다. 지(止)란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뜻하고, 관(觀)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사물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훈련이다.
당조(唐朝)에는 인도의 날란다(Nland)사에서 유식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하여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저술했으며 그의 제자 규기(窺基)는 그 주석서를 써서 중국 유식학파인 법상종(法相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현장은 귀국할 때 많은 불교전적을 가지고 와서 일생을 역경사업에 바쳤으며 그의 번역은 종전의 것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법상종은 다분히 인도적인 교학적 종파로서 당 초기에는 선풍을 일으켰지만 곧 인기를 잃어버리고 화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에 자리를 내주었다.
화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가장 포괄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화엄경〉의 진리를 최고의 가르침으로 간주하는 화엄종은 종래의 모든 불교사상을 5가지 가르침(五敎)으로 정리하는 교판체계를 제시했다. 두순(杜順)·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완성된 화엄사상은 징관(澄觀)·종밀(宗密)에 의해 계승·발전되다가 845년의 폐불(廢佛)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법계(法界) 사상으로서 화엄은 사(事) 법계, 이(理) 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 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의 4종 법계를 말하고 있다. 이 법계사상은 천태의 관법과 마찬가지로 공(理)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상계(事)와 진리가 불가분(色卽是空)이며 현상계의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연결되어 있음(事事無碍)을 말하고 있다.
천태·법상·화엄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실로 인도 불교를 능가할 만큼 정교하고 포괄적인 중국적 불교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거기에 흡수되어버렸다. 즉 삼론종은 천태종, 섭론종은 법상종, 지론종은 화엄종, 열반종은 천태·화엄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천태·법상·화엄이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로서 포괄적 사상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대중적 종파가 되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권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했으며 결국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실천적 성격이 강한 선(禪)불교와 대중적 성격이 강한 정토(淨土) 신앙뿐이었다.
정토종은 이미 언급한 정토 삼부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은 선도(善道:613~681)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중적 성격을 띤 사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본래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서원에 정토 왕생(往生)의 조건으로 언급된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난 후 성불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서 염불(念佛)이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명상하는 관상(觀想) 염불을 뜻했다. 그러나 쉬운 수행(易行)을 강조하는 중국 정토신앙에서는 염불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稱名) 염불(南無阿彌陀佛)로 해석되었으며 이것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정토왕생의 수행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성립에는 6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법사상, 즉 불교가 정법(正法)·상법(像法) 시대를 지나 지금은 불타의 올바른 가르침과 수행이 모두 사라져버린 말법(末法)시대가 도래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선불교는 문자 그대로 선정(禪定)의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초기 선불교는 〈능가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불성(佛性) 사상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는 점진적인 수행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행전통은 5세기 말엽에 인도로부터 온 승려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홍인(弘忍:601~674)·신수(神秀:606~706) 대사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선불교를 인도적 선과는 다른 독특한 중국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점진적 수행(漸修) 사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순간, 혹은 자기 마음의 본 바탕이 곧 불이라는(心卽佛)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성불한다는 돈오(頓悟)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선사상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은 홍인의 제자였던 혜능(慧能:638~713)과 그의 제자로 자처했던 신회(神會) 화상에 의해서였다. 그후로부터 선불교는 번뇌를 제거하여 마음을 닦아가는 행위(修)보다는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체험(悟)을 강조하는 이른바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인도적 좌선이나 수행보다는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중시하는 남종선의 추종자들은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며, 그들의 설법과 선문답을 담은 어록(語錄)들을 발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보다도 오히려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더 중시하게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선불교의 근본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말은, 진리는 경전의 문자보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마음에 갑자기 와닿는 체험을 통해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성불한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구절들이다. 이러한 선사상의 배후에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직관적 지혜를 강조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찬양하는 중국의 도가적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선불교는 인도적 공사상, 불성사상과 노장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원숙한 중국적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선불교는 당 중엽부터 시작하여 당말·송초에 이르기까지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불교에 대항하여 사상적 재무장을 하고 나선 신유학사상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선도(善導) 이후 대중적 뿌리를 내린 정토신앙에도 선불교의 영향 아래 염불선이 유행했으며 선수행자들 가운데서도 염불과 정토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정(禪定) 융합적 불교가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 중국인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불교를 비판하는 배불론이 항상 존재해왔다. 배불론자들의 주요논지는 불교가 자연스러운 인륜을 무시하고 효(孝)에 어긋난다는 것, 경제적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며 초세간적 성격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나라 말기부터 이러한 배불론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송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불교는 신유학에 사상적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고 그로부터 전반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정토신앙과 선불교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으며 도교나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을 통해 불교는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종교로 유지되어왔다. 1930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약 73만 8,000명의 승려와 26만 7,000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는 전반적으로 역동성을 상실했으나 중국 대중들 사이에 꾸준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침체된 불교계를 사상적·제도적으로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변혁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1949년 이래 공산치하에서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전통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아 거의 명목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겸(支謙)승려.
태양 숭배 종족의 인도 스키타이 계의 출신인 지겸이 230년경 아미타불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했다.
지겸의 할아버지 법도(法度)는 원래 대월씨국(대승불교가 일어 났던 쿠샨 제국의 간다라 지방이 그의 고향이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334~413)의 역경활동에 의해 비로소 중국 승려들은 대승불교 철학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마라집은 〈대품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유마경〉·〈금강경〉, 용수의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 등을 포함하여 35부 254권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
(아미타경 세가지 한역본 쿠바라지(구마라집) ,무문 자설경, 즉 제자들의 물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 스스로 설하신 경으로 정토삼부경 가운데 후대에 성립된 것)
<남북조시대(420~581)정토신앙 계통의 〈무량수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 정토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관무량수경 리우쏭 (劉宋)의 지앙리앙예서 가 424년에 번역하였다
무량수경 똥진의 쥐엔시엔 (覺賢)과 빠오인(寶雲)이 421년에 번역하였다.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첫댓글 빛을 비추는자 마니는 (274~277년 사이로 추정됨). 지겸(支謙)승려. 태양 숭배 종족의 인도 스키타이 계의 출신인 지겸이 230년경 아미타불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했다----중국 남북조시대(420~581)정토신앙이 형성---650년경 유행한다.---한국도 비슷한 시기(7세기)에 도입 --
결론은 태양신인 마니가 무량광, 무량수불로 탈바꿈하여..불교의 아미타불로 둔갑된 것이다.
꾀주머니 지겸한테 다 속았다~~! 대승경전을 쓴자들이 어느나라 출신인가 따져 보지도 않고 믿었던가? 통탄할 노릇이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