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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상과 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원
[단편소설] 모래성 / 마광수
어느 날 ‘모인회’에서 회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가 이목일이 문득 심각한 표정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요즘 심각하게 구상하고 있는 사업 한 가지가 있어. 거창하게 ‘사업’이란 말을 갖다 붙일 수도 없는 거지만,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한번 구상해본 거지.”
“먹고살기가 정말 그렇게 힘드신가요?”
이목일의 말이 끝나자 주리가 물었다.
“일류로 성공하지 못한 환쟁이는 글쟁이보다 훨씬 비참해. 글쟁이는 설사 일류가 못 됐다고 해도 이런 저런 잡문 수입이라도 있게 마련이지만 화가는 그게 안 되거든. 옛날처럼 삽화 같은 걸 그릴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나는 요즘 사실 안면 하나 갖고 그림 파는 데 지쳐버렸어. 돈이 좀 있는 친구라고 해도 한두 점 사주고 나면 끝이거든. 그래서 적은 돈이나마 지속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을 한번 해보려는 거지.”
하고 이목일이 대답했다. 그러자 이길로가 이목일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떤 사업인데?”
“붕어찜 장사야. 내가 오랫동안 낚시를 즐기다보니까 붕어 요리 하나 만큼에는 취미가 붙고 일가견이 생겼거든. 그래서 붕어찜 전문 가게를 한번 내보려는 거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군. 그래, 물색해둔 장소라도 있나?”
하고 이길로가 이어서 물었다.
“생각 같아서야 신촌이나 홍대 앞 같은 곳에다 내고 싶지. 하지만 그곳은 세가 너무 비싸더군.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 원당에다 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 그만하면 경치가 좋은 데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니까 말야.”
“그쪽이 더 좋은 장소일 것 같네. 우선 세 부담이 적어 만약 실패해도 큰 손해를 안 볼 테니 말야.”
하고 내가 말했다. 이목일이 살고 있는 원당은 번화한 시가지가 아니라 고양시 외진 곳에 있는 곳이라 경치가 좋았다.
그가 작업실 겸 거처방으로 빌려 쓰고 있는 허름한 창고 곁으로는 또 교외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어 향수 어린 정취를 풍겨주고 있었다. 옛날 동요 가사대로 그야말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였다.
“하지만 자네 작업실 근처에는 벌써 토종닭집이나 민물 매운탕집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서 있던데 과연 경쟁이 될까?”
하고 이길로가 말했다.
“그래서 붕어찜으로 승부를 걸어보려는 거지. 붕어찜 집은 아직 안 들어섰거든.”
이목일의 대답이었다.
“붕어찜 하나는 이 화백이 참 잘하지. 퇴촌이나 팔당 같은 데서 파는 시뻘겋게 고춧가루로 뭉갠 붕어찜이 아니라 간장에 졸인 붕어찜인데, 맛이 참 묘하게 담박하거든. 아마 무슨 비결이 있을 거야.”
다시 이길로가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이왕 얘기가 나온 거니 특별히 털어놓기로 하지. 백포도주를 많이 붓고 졸이는 게 내가 하는 비결이라네.”
이목일이 무슨 큰 비밀이라도 가르쳐주듯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해서 우리들은 다 같이 웃었다.
“어때요, 루비 씨? 이 화백이 하는 장사에 투자할 생각 없어요?”
이길로가 이목일을 도와주려는 듯 귀족 부인 루비에게 물었다.
“투자하고말고요. 하지만 신촌이나 홍대 앞 같은 데서 크게 하는 건 좀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역시 돈 많은 사업가의 귀족 부인인 루비의 말다웠다.
“요즘은 맛만 좋으면 서울 근교 어디든지 달려가는 게 미식가들이니까, 이 선생님 작업실 근처에서 하더라도 잘만 되면 꽤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거예요.”
루비가 이렇게 덧붙이자 이목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술잔을 비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루비 씬 역시 통이 큰 여자야. 사실은 내가 전에 한 사장한테 말을 꺼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더란 말이오. 맨날 돈 자랑을 해대는 친구가 그렇게 나오니까 좀 실망이 됩디다……. 내가 붕어찜 장사를 하려는 건 돈도 돈이지만 그림 그리는 데 이젠 권태증이 나서 그래요. 혼자 살며 요리를 해 먹다보니까 요리도 큰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그리고 붕어 가지고 요리하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내 그림에도 아이디어의 재충전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 선생님은 그림 그리는 것을 잠시 쉬시게 됐고 마광수 교수님은 새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셨으니 역할이 뒤바뀐 셈이네요.”
하고 주리가 말했다. 내가 신문에 연재하는 내 소설의 삽화를 직접 그리기 시작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이목일에게 새로운 전기(轉機)가 주어진 것이 기분 좋았다. 그는 요즘 그림에 진척도 없고 또 잘 팔리지도 않아 몹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번에 루비가 큰돈 들여 청담동 화랑에서 기획전을 열어준 것이 별 성과 없이 끝나자 그는 상당히 우울해하고 있었다.
이목일은 자기가 물색해둔 가게 자리를 약도까지 그려가며 신이 나서 설명해주었다. 이목일의 작업실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이 바로 그동안 물색해둔 가게 자리라는 것이었다. 집주인이 전세로 내놓기를 원하고 있는데, 붕어찜 가게로 바꾸는 데는 꽤 많은 돈이 들어갈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루비는 별 군말 없이 전세금과 설비비를 다 대겠다고 말했다.
이목일은 기분이 좋아져가지고 다 같이 축배를 들자고 말했다. 기분 좋아하는 이목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문득 서울 교외의 한적한 전원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한달 후, 이목일이 차린 붕어찜 가게의 내부 설비가 완료되었다. 이목일은 화가답게 낭만적인 멋을 부려 가게 이름을 <나무와 해>로 붙였다. 붕어찜집치고는 우스꽝스럽게 멋을 부린 상호라고 볼 수 있었다.
이목일은 개업 기념 파티를 열어 친한 사람들을 초대했다. 나와 루비, 이보라, 지사장, 한그루, 이길로, 김주리, 김수희, 박성민, 내 친구(?) 채나 외에도 이목일이 친하게 지내는 화가 대여섯 명이 초대되었다.
개업 기념 파티의 주인공은 이목일과 루비였다. 루비 역시 공동출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무와 해>라는 상호는 붕어찜 가게에 걸맞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주변 풍광에 걸맞은 이름이었다. 가게의 주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으로 되어 있었지만, 키 크고 숱 많은 나무가 많고 공기가 맑아,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가게에서 20미터 정도의 거리에는 교외선 철도가 지나가고 그 뒤로는 넓은 터에 수많은 비닐하우스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비닐하우스들은 저녁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넓은 호수나 강처럼 보였다.
우리는 먼저 이목일이 정성들여 만든 붕어찜을 시식했다. 밑에 무를 여러 겹 깔고 커다란 붕어 한 마리를 조린 것인데 국물이 많은 게 특징이었다. 그래서 ‘붕어찜’이라기보다는 ‘붕어조림’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곁들여 천천히 붕어찜을 다 먹자 이번엔 저녁 식사로 ‘어탕(魚湯)국수’가 나왔다. 붕어 뼈다귀를 조린 국물에 칼국수를 넣고 끓인 것인데 특별한 맛이 있었다. 음식을 날라다주는 여종업원들도 다들 해맑은 얼굴을 한 여자들로서, 시골 소녀들 같은 느낌이 들어 한결 그윽한 운치가 났다.
음식과 술을 먹는 동안 실내에서는 은은한 배경음악이 깔려 나왔다. 이목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계속 클래식 음악을 틀고 있었다. 이를테면 구노의 <아베마리아>나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같은 성악곡들이었다.
나는 특히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센티멘털한 음악이 가져다주는 청각적 즐거움과,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붕어 맛이 가져다주는 미각적 즐거움이 예상 외로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어탕국수’까지 다 먹고 나서 우리는 집 앞 뜰로 나왔다. 울타리도 없는 널따란 마당에는 여기저기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붕어튀김’을 안주로 술을 마셨다. 계속 붕어 한 가지로 된 요리를 먹는데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다. 아마 아주 가끔가다 먹어보게 되는 음식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비닐하우스 너머 멀리서 점점이 불빛들이 켜졌다. 그래서 그 불빛들은 마치 ‘강 건너 등불’처럼 보였다.
때맞춰 교외선 철로로 기차가 지나갔다. 주말에만 특별히 운행하는 증기기관차였다. 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열차가 나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날이 아주 어두워지자 분위기는 점점 더 로맨틱하게 되었다. 나는 채나 곁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느릿느릿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채나는 내게 한 개인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나의 지나간 세월이 가져다준 막연한 사랑에의 그리움, 그리고 막연한 삶의 슬픔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만일 내 곁에 채나가 아닌 다른 여자, 이를테면 루비나 주리나 수희가 앉아 있었어도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비닐하우스 밭이 저녁 불빛을 받아 더욱 큰 강물처럼 보이는 것을 느끼며, 비닐하우스 밭 넘어 먼 곳에서 반짝이는 등불들을 감회 깊게 바라보았다. 문득 옛날에 좋아했던 가수인 정훈희가 부른 <강 건너 등불>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그렇게도 다정했던 그때 그 사람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그렇게도 많은 세월 흐르고 흘렀건만
아아아 나는 왜 잊지 못할까
사무치게 그리워서 강변에 서면
눈물 속에 반짝이는 강 건너 등불……
채나는 계속 내 품에 힘을 빼고 안겨 있었다. 그리고 루비는 뭐가 기분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의 도움으로 이목일이 기운을 되찾은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루비는 팜므파탈로서의 요부같이 요염하고 휘황한 미모에도 불구하고 전혀 건방지지 않은, 정말 드물게나 볼 수 있는 ‘착한 여자’였다.
뜰에는 캠프파이어용 장작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 이목일이 석유를 조금 붓고 불을 지폈다.
불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흥분시킨다. 그 흥분은 낭만적인 흥분이 될 수도 있고 폭력적인 흥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밤의 흥분은 폭력적인 흥분이 아니라 낭만적인 흥분이었다.
채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이렇게 속삭였다.
“캠프파이어가 이렇게 멋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게 다시 기운이 나는 듯해요.”
“왜, 캠프파이어를 한 번도 못 봤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엠티 같은 행사에 한 번도 안 가봤나 보지?”
하고 내가 채나에게 말했다.
“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몹시 싫었어요. 다들 너무 자신만만해 보여서요. 그래서 엠티에도 가본 적이 없고 캠프파이어도 본 적이 없지요.”
“그럼 너무 청춘을 허비했군. 낭만도 한때 청춘도 한때야. 앞으로는 꼭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쏘다녀보도록 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사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합숙 훈련을 하거나 엠티 같은 행사에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다. 요컨대 나는 고독을 즐겨하는(아니 감수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주 오랜만에 캠프파이어를 보며 뒤늦은 낭만에 어색하게 들떠 있는 것이었다.
이목일이 근처에서 밀주(密酒)로 만들어 판다는 농주(農酒)를 큰 사발로 돌렸다. 먹기엔 단맛이 나는데 무척이나 독했다. 그래서 나도 채나도 농주 몇 잔에 크게 취해버렸다.
술에 취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다들 술에 취해 본색을 허물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지사장이 보라가 앉아 있는 탁자로 가 보라를 데리고 갔다. 보라도 술에 취해 지사장을 부둥켜안고 따라가버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노래에 맞춰 엉터리로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루비는 이길로의 품에 안겨 있었고 이목일은 주리를 껴안고 있었다. 얼마 후 이목일은 주리의 손을 잡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주리, 요즘은 지내기가 어때?”
하고 내가 먼저 주리에게 말을 붙였다.
“형편없어요. 사랑도 안되고 그림도 안되고……. 이렇게 용단을 내려 음식점을 차린 이 선생님이 부럽고 존경스럽게 느껴져요.”
“그럼 결혼이나 한번 해보지그래?”
“결혼이 그리 쉽게 되나요? 답답한 김에 선을 몇 번 봐보기는 했죠. 그런데 상대방이 모두 마음에 안 들더라구요.”
“주리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
“그런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쪽에서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적도 있었어요. 선을 몇 번 보고 나서 느낀 건, 요컨대 내가 결혼 체질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럼 그림을 더 열심히 그려보지그래? 주리는 집안의 경제 형편이 좋은 편이니까 아버지가 계속 밀어주지 않겠어?”
“웬걸요. 이젠 아버지나 엄마 보기에도 눈치가 보여요. 노처녀란 원래 그런 건가 봐요.”
“그래도 보디페인팅이나 퍼포먼스 작업을 계속 밀고 나가 봐. 그 분야는 아직 개척할 여지가 많으니까.”
“개척할 여지도 많고 물론 재미도 있지요. 하지만 전혀 돈이 안 벌린다는 게 문제예요.”
주리의 말이 끝나자 이목일이 주리에게 말했다.
“그럼 주리도 나처럼 가게를 하나 내보는 게 어때? 아버지한테 부탁해가지고 결혼 자금을 대신 대는 셈 치고 돈을 내라고 해서, 압구정동이나 홍익대 앞에 아담한 카페라도 하나 내는 거지. 그럼 적어도 고독한 시간을 때워나갈 수는 있을 거야.”
그러자 주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아버지를 조르면 자본금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나는 계속 예술가로 남고 싶어요.”
“그럼 계속 더 버틸 데까지 버텨봐. 우선 주리네 집안에서 주리를 굶겨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만 해도 주리한테 큰 축복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술을 따라 마셨다. 술에 더욱 취해 몽롱해진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그루가 수희를 품에 안고서 그녀의 몸뚱어리 곳곳을 슬근슬근 어루만지고 있었고 수희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건 박성민과 루비도 마찬가지였다. 박성민은 루비의 젖가슴을 남 눈치도 안 보고 서슴없이 매만지고 있었고, 루비는 박성민의 어깨를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즐거운 잔치판’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나와 함께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은 오직 채나 뿐이었다. 쉬메일이라는 그녀의 특이한 정체성이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어서 그런지, 아무도 채나를 친근하게 상대해주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채나 곁으로 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얼싸안았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져서인지 채나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고 있는 그녀가 몹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채나도 우울할 때가 다 있군. 분위기가 좋은데 왜 우울하지?”
하고 내가 채나에게 말을 붙였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우울한 거지요.”
“여자는 우울하면 눈물을 흘릴 때가 많지. 남자로 태어나게 된 게 억울해 죽겠어. 사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많거든. 정말 억울해 죽겠어.”
“그래도 가끔가다 한 번씩 울어보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러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요.”
이미 여자가 다 돼 있는 채나의 말이었다.
“애써볼게. 그런데 정말 분위기가 좋아서 우울한 거야? 채나 주변의 분위기가 너무 을씨년스럽게 느껴져서 우울한 게 아니고?”
“왜 그런 생각이 드셨죠?”
“채나한테는 접근해오는 남자가 없어 보였으니까.”
“그런 것엔 벌써 만성이 된 지 오래에요. 오랜만에 교외로 나와보니,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밤을 맞다보니 마음이 왠지 센티멘털해진 것뿐이에요.”
"나도 이상하게 마음이 센티멘털해지더군. 아니 삶이 너무나 슬퍼지더군. 그래서 이런 시가 갑자기 생각났어."
하고 나는 조금 아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시상(詩想)을 그대로 한번 읊어주었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길가의 집들이 지나가고
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어렸을 때 물가에 서면 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를 타면 집들은 가만히 있고
나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물가에 서면 나는 가만히 있고
강물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시 읊기를 마치자 채나가 말했다.
"참 좋은 시로군요. 제목을 「늙는 것의 서러움」이라고 붙이면 좋겠어요."
" 참 좋은 제목이로군. 그런데 늙기는 늙었는데, 지금의 내가 중년 남자에 속할까. 노인에 속할까?"
"그야 물론 중년 남자에 속하시죠."
"그런데 난 내가 꼭 '노인'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하고 내가 말했다.
“오빠는 너무 늙은 티를 내세요. 그런 오빠를 보면 왠지 저까지 슬퍼져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살아가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마음 편히 살기도 어렵고, 사랑하기도 어렵고, 친구 사귀는 것도 어렵고(아니 무섭고), 점점 늙어가는 것도 어려워.”
“마치 불교책에 써 있는 것을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나는 어쨌든 사람이 무섭고 사랑이 무섭고 사회가 무섭고 권력이 무섭고 관습적 윤리가 무서워. 채나도 결국 ‘관습적 윤리’의 피해자 아냐?”
“그 말엔 공감해요. 저도 지금의 이 상태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외국으로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아직 젊으니까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좋을 거야.”
“하지만 향수병이 또 저를 괴롭힐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그건 그래. 그래서 한그루 같은 친구도 프랑스에서의 유학 생활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탈출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거고.”
한그루 얘기를 하다보니까 어느새 한그루가 우리 곁에 와 있었다.
“한 선생님, 요즘은 지내시기가 어떠세요?”
“재미가 없지. 돈도 안 벌리고 글도 안 써지고, 또 이혼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되어버렸고…….”
“결단을 내려 붕어찜 가게를 낸 이목일 선생님이 부러우시죠?”
“맞아. 어떻게 그리도 내 속마음을 잘 알지?”
“그래 요즘도 루비 언니를 사모하고 계시나요?”
“이미 단념 단계로 들어서버렸어. 루비가 나만 좋아하질 않으니까. 난 나만 좋아하는 여자가 필요하거든.”
“그런 여자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유부남이라서 결혼하실 수가 없잖아요?”
“만약 그런 여자가 생긴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프랑스로 같이 날아가버리는 거야. 거기서는 동거나 결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소설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스파게티나 바게트 같은 거나 만들어 팔며 조용히 살아가는 거지. 그렇게 살아가도 프랑스 같은 나라는 행복하고 안정된 삶과 공포스럽지 않은 심리를 보장해주니까.”
“맞아요. 한국은 언제나 ‘막연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나라예요……. 그런데 그런 여자를 과연 만나실 수 있을까요?”
“나도 자신이 없어……. 한때는 어떤 여자를 생각해보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는 너무 사치를 좋아하고 흠모하는 체질이라 나한테는 안 맞더군. 그녀에게는 유명 여배우의 코디네이트 역할이 제일 어울려 보였어.”
나는 두 사람의 얘기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국이 왠지 모를 ‘공포 심리’를 조장해주는 나라라는 사실은 맞는 말이었다. 튀는 놈도 못 봐주고 개성이 강한 놈도 못 봐준다. 그리고 잘나가는 사람도 못 봐주고 패거리에서 섞이지 않고 홀로 가는 사람도 못 봐준다 ……. 한그루는 그런 점에서 나와 비슷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한그루와 채나는 계속 우울한 표정을 하고 앉아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나는 기분이 오히려 더 울적해졌다. 루비뿐만 아니라 채나조차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강 건너 등불’, 즉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彼岸)에서의 열반’이라는 것 역시 부질없는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왠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고 앞을 바라보니 한그루가 채나의 어깨를 얼싸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채나의 허벅지를 거세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변태’를 혐오하는 한그루 같은 친구가 채나를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도 외롭긴 무척이나 외로운 모양이었다. 밤이 돼서 그런지 채나는 내가 보기에도 더욱 완벽한 여자로 보였다.
한그루가 채나를 애무하다 말고 문득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자넨 행복해. 루비도 자넬 좋아하고 채나도 자넬 좋아하고 있지 않나?”
“루비는 한 남자 갖고는 만족 못 하는 여자야. 최근엔 또 박성민한테 빠져 있지 않나? 그래서 어쩐지 항상 찜찜한 기분이 들지. 나도 아마 자네를 닮아가는 모양일세. 자넨 늘 ‘온리 유(Only You)’ 스타일의 여자를 원하고 있으니까 말야.”
“그렇게 이모저모 따지다간 자넨 정말 진짜 연애 한 번 해보기 어렵겠어.”
한그루가 이렇게 얘기하자 채나가 한그루의 말을 받아 말했다.
“그건 한 선생님의 말씀이 맞아요. 마 교수님은 제가 간절하게 보내는 사랑도 육체적으로만 받아들이셨다구요.”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채나에게 변명조로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 채나. 그건 채나가 특이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냐. 내 마음속이 항상 정신적 사랑에 대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진짜 이유지.”
“물론 그 말씀에는 이해가 가요. 하지만 정신적 사랑을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랑 자체가 문제가 아냐. 인생 자체가 문제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한그루도 맞장구를 쳤다.
“그건 이 친구 말이 맞아. 사랑보다는 인생이 더 중요해. 인생 자체가 시들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에도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한 선생님은 왜 그렇게 사랑에 노골적으로 굶주려하시죠?”
하고 채나가 한그루에게 물었다.
“사랑에 빠져들다보면 삶의 고통이 조금은 마취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렇지.”
하고 한그루가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선을 옮겨 루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루비는 어느새 이목일의 품에 안겨 있었다. 과연 사랑에 너그럽고 헤픈 루비다웠다.
얼마 안 있어 루비가 우리 앞으로 왔다. 나는 앞에 앉아 한그루와 얘기하는 루비를 술에 취해 몽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는 오로지 루비밖에 안 들어왔고 내 눈은 어느새 캠코더가 되어 슬로모션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밤이라 그런지 그녀 몸매의 아름다운 선이 더욱 또렷이 드러났다.
커다란 유방이 곧고 야물게, 그리고 희디흰 대리석으로 깎아 세운 듯이 가슴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사랑의 유희를 위해 정말 알맞게 다듬어진 몸뚱어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주위의 불빛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몸은 황금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분홍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녀의 피부는 마치 채색을 위해 만들어진 순백의 도화지 같았다. 다만 여물어 도드라진 젖꼭지만이 계속 붉은 장미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루비의 지극한 아름다움에 새삼 감읍(感泣)하며 그녀를 향한 오랫동안의 짝사랑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나 자신을 느꼈다. 왠지 내가 그녀가 그저 같이 놀아주기만 하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그녀 주변에 몰려 있는 남녀들 모두가 루비가 동정하여 돌봐주는 어린아이들일 것이었다.
나는 루비에 대한 관능적 경탄과 애모의 감정을 힘들여 추스르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한 밤 화장을 한 그녀의 얼굴이 왠지 갑자기 낯설어 보였다.
한그루는 루비와 얘기하는 것에 신이 나 있었다. 그는 어느새 루비의 어깨를 껴안고 있었고 루비는 한그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루비는 앞에 있는 술잔에 술을 따른 후 나에게 말했다.
“마 교수님, 우리 같이 한 잔 해요.”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루비에게 말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세요. 우리 다 같이 한 잔 해요.”
루비가 다시 내게 술을 권했다.
“다 같이 한 잔 하세. 야외에 나오니까 시내에서 먹는 것보다 술이 별로 안 취하는데. 그런데 자넨 왜 그리 빨리 취했나?”
하고 한그루가 말하며 나와 채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술잔을 받아 들었다.
“원 샷으로 마시는 거야. 알았지?”
하고 한그루가 말했다. 우리들은 다 같이 술잔을 들고 마셨다. 나는 원래 술을 질금거리며 마시는데 원 샷으로 마시니까 취기가 두제곱 세제곱으로 밀려왔다.
그런 상태로 철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강 건너 등불들이 훨씬 더 크게 보였다. 그 등불들은 마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왕방울 같은 별빛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이런 데서 놀아보니까 인생이 무척 즐겁게 느껴져요.”
하고 루비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내겐 흡사 종달새가 주책없이 지절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난 이런데 나와서 술을 마셔봐도 인생이 하나도 안 즐거운데요.”
하고 채나가 새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세요?”
하고 루비가 한그루에게 물었다.
“난 즐겁게 느껴지는데.”
하고 한그루가 대답했다.
“그럼 마 교수님은요?”
“난 그저 그래. 그저 졸릴 뿐이야.”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노래해요. 그러면 술이 깨실 거예요.”
하고 루비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루비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은하수도 안 보이는데 뭘.”
하고 내가 루비와 한그루가 같이 하는 노래 중간에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여긴 꽤 공기가 좋은 편인데도 은하수가 안 보여요.”
하고 채나가 말했다.
“은하수를 보려면 아주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할걸. 은하수는커녕 별도 잘 안 보이는데.”
하고 내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루비에 대한 짝사랑에 지쳐서 불쑥 튀어나온, 어린애의 밥투정 같은 우발적인 발언이었다.
“그럼 다른 노래를 해요. < 모래성>이란 동요가 썩 좋더군요.”
하고 채나가 말했다.
“어떻게 부르는 건데? 난 들어보지 못했는걸.”
하고 한그루가 말했다.
“이런 노래예요.”
하고 채나가 말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가고……
노래 가사도 그렇지만 채나의 목소리도 무척이나 구슬프게 들렸다. 나와 채나와의 사귐이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같이 느껴져서 더 그렇게 들렸는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