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자줏빛 노을에 물들다 :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 간 : 2019.11.5 - 2020.3.8
전시제목 ‘자줏빛 노을’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 신위(申緯, 1769~1847)의 호인 ‘자하(紫霞)’에서 온 것이다. 신위가 태어난 지 250년이 된 올해가 저물어갈 무렵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의 두 방을 신위를 주제로 꾸몄다. 전시는 문인으로서의 신위의 자의식을 볼 수 있는 서예와 묵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신위, 소식의 시 일부를 쓴 행서. "천하에 몇 사람이 두보를 배웠나/당시 세상에 소철 한 사람뿐이었네" 소식을 거쳐 두보의 경지로 들어서고자 하는 그의 시 이론이 잘 드러난다.
신위, <붉은 여뀌를 노래한 시(紅蓼)>, 조선 1832년 이후, 비단에 먹, 67.9×148.2cm 국립중앙박물관 낚시터는 먼 곳의 푸른 산을 가로막고/ 물가에 무성한 여뀌 꽃은 작은 배에 들어오네 새벽바람에 지는 달 걸린 버드나무를 서늘하게 벗하니 / 백로 날아들고 오리가 씻는 물가를 담담히 가려주네 주인이 아직 강호의 꿈 깨지 못하니 / 뱃집에 갯내음 실려오는 듯 정자 주렴 앞 성근 비 그치니 / 몇 줄기 붉은 여뀌 정원과 잘 어울리네
열 세 살 때부터 조선후기 예단의 총수였던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게 지도받았다는 그. 그리고 바로 뒤 세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 앞서 조선의 문예의 중심이 되었던 사람으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당대부터 이름을 얻고 있었다. 친구 김조순(1765-1832)는 신위의 시가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경지이며 그림 또한 중국의 대표 문인화가 예찬(1301-1374)이나 심주(1427-1509)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자하는 열살 남짓부터 이미 삼절에 이르러서 고금에 그 적수가 없으니.... 시법에서 압록강 동쪽에서 처음으로 묘한 경지를 창조하였으니.... 그림또한 기묘하고 빼어나게 맑아 운림(예찬)이나 석전(심주) 같은 사람이 아니면 상대가 될 수 없다...서예는 정취가 지극하지만 시와 그림만은 못하다. 그러나 이는 신위 자신의 삼절 중에 논한 것이지 만약 동시대 다른 인물들과 비교한다면 월등히 뛰어나다. 겨울밤에 우연히 자하의 묵죽을 보다가 그림으로 인해 글씨가 생각나고 글씨로 인해 시가 생각나 이와 같이 두서없이 썼다...." -김조순 『풍고집』 권 16 「잡록」
김정희와는 달리 한나라 예서에서보다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한 동기창체에 자신의 글씨의 본원이 있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기창, 말년에는 미불에 더욱 근접한 서예를 보였다고 한다.
문인의 시대인 조선에서 시서화가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모두 잘한다는 ‘삼절’은 그 시대 문인에게 최고의 칭찬과 찬사였다. 당나라의 왕유, 송나라의 소식, 원나라의 조맹부 등이 존경을 받았던 것은 이들이 세 가지 모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그가 매진했던 시서화의 방향이 이러한 문인정신을 따르고 본받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위의 행서 대련(동원 기증품). 사대부가 지켜야 할 학문의 규범을 썼다. "성誠과 경敬의 공부는 녹동(주희가 세운 서원)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이요 고상하고 자연스러운 문자는 사마천의 법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44세 때인 1812년 서장관으로 청나라 사행을 다녀온다.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이때 안목을 넓혀 대학자 옹방강과 교유하여 이후의 학문과 예술에 큰 영향을 받는다. 소식과 두보의 시를 배워 평생의 화두가 되어 정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또 한국적인 특징을 가진 시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에도 그 영향이 있을 것이다.
신위 의 시를 모아 '신자하시집'을 내기도 한 김택영은 신위에 대해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호탕하여 매이기를 싫어했고, 음악과 풍류를 즐겼으며 자신의 재주에 대해 퍽 자부하는 바가 있어 세정에 소홀했다'고 되어 있다.
신위는 산수화를 비롯해 수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역시 그의 특기는 대나무라 할 수 있다.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3대 묵죽화가로 불리는데 문인적 묵죽, 즉 형사를 배제한 사의적 묵죽에 중심을 둔다. 스물세살에 문과를 거친 되 십여 년 간 한직으로 보내면서 묵죽을 그리며 문인으로의 마음가짐을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신위의 대나무는 대개 가느다란 줄기, 과하지 않게 달린 댓잎, 농담으로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지적이고 고아한 인상을 주는 특징이 있다. 즉 강인함보다는 우아함이 느껴지는 묵죽이다. 80 가까이 사시면서 꾸준히 그린 묵죽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데, 평면적인 바위 묘사나 대나무에 농담의 차이를 주어 원근을 나타낸 점에서 조선 중기 양식을 띄기도 하고, 댓잎을 ‘入’자형으로 그리거나 서예적인 필선을 사용하여 죽간竹間을 길게 그리는 등 조선 후기의 양식도 차용하고 이들을 혼합하여 자신의 양식을 성립시켜 간다. 전해지는 작품 중에는 말년작의 묵죽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노하老霞’, ‘자하노인’ , ‘자하노초紫霞老樵’ 등의 관서가 많음).
대나무를 그린 열폭의 화첩. 원래는 머릿병풍으로 장황되어 있었다.
서예와 묵죽은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25건 85점에 이르는 전시 목록 중에는 그가 청나라 그림에 쓴 제화시나 서화로 이름을 날린 두 아들 명준(申命準 1803~1842)과 명연(申命衍 1809~1886)과의 합작, 특히 신명연의 다채로운 화조병풍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가 남긴 적지 않은 작품과 영향의 일면만을 훑을 수 있을 뿐이다. 신위의 예술세계가 조선 후기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향으로 조명하는 기회들이 여러 차려 겹쳐져야 가능할 것 같다.
전시는 그의 아들들로 마무리된다. 아들 두 사람과 함께 만든 이 두루마리는 신위의 제자 이학무를 위한 것이다. 그는 이학무에게 '시령(시 짓는 배)'이라는 자를 지어주고 소식에 빗대어 후적벽부의 도상에 '시령도'라는 제목을 써서 이었다. 제목은 신위가 썼고 그림과 첫번째 발문은 큰아들 신명준, 또다른 발문은 둘째아들 신명연이 남겼다.
첫댓글 거리가 가까우면 보고 싶은 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