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인천에서 살고 있지만 인천을 잘 모릅니다.
마침 인천(중구와 동구)을 걷는 행사가 있어 참여해 보았습니다.
일시: 2018년 11월 1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생각보다 장시간 걸었네요.ㅠㅠ
개항 후 인천은 새로운 문물의 집산지이기도 했지만,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으로 쓰였던 곳이죠.
특히 일본은 1893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김으로써 우리 나라를 식민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천은 지정학적으로 만주로 가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
일본은 1920년대까지 철도와 공장을 건설하고 1930년대부터는 만주로 진출을 하지요.
1937년 중일전쟁 후 일본은 전시체제로 접어들어 인천을 군수산업을 공급하는 장소로 활용합니다. 이러한 전략으로 인천에는 일본의 군수관련 산업 시설이 많았고, 그 흔적이 남아 있지요.
식민지 시절의 흔적을 남겨 후대의 역사교과서로 써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 걷기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민초지만....
오전 10시- 인천역 올림포스 호텔 전망대에서 걷기가 시작됩니다.
해마다 새얼백일장 심사 때문에 일 년에 딱 한 번 오는 곳- 올해는 두 번 오게 되었네요.
올림포스 호텔- 전형적인 모더니즘 건물이지요.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처음으로 생기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애틋하게 생각하여 식수까지 했던 곳.
정치적으로도 파란만장한 사건이 많았다고 합니다.
영국 영사관이 있던 자리...갑자기 눈에 띈 이곳.
올 때마다 왜 눈여겨 보지 않았을까요?
봉화대도 있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올 때마다 이곳을 찍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알고보니...
이곳은 한미수호통상조약체결장소가 아니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구, 그것도 모르고 여기가 그 장소다 떠들었던 게 부끄럽네요.
개항이 되면서 활기를 띄게 된 곳- 월미도도 보입니다.
원래 세곡선이 드나들었던 인천의 원항은 성창포(영종도와 월미도 사이로 지나가는 세곡선을 지키는 수성과 세곡을 쌓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라는 곳인데 바로 만석동 항구를 말하는 것이랍니다.
세곡선이 한양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성창포에 곡식을 야적하였는지 궁금했지요.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선이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강폭이 좁고 물살이 센 까닭에
세곡선들이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대요. 그래서 이곳에서 세곡을 보관하고 있다가 정해진 날짜에 납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책을 당하니까요.
그래서 생긴 이름이 만석동^^
오늘 걷기를 함께 할 분들-이성진 선생을 비롯하여 시립박물관 학예사, 전 인하대 교수님 등
다양한 분들이 나오셨습니다.
올림포스 호텔을 내려와 만석동으로 가는 길.
위에 보이는 작은 철도 같은 것은 인천에서 만든 이른바 '은하철도 999'같은 것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운행할 수 없어 철거해야 하는데 그 철거비용이 상상 초월 액수라서
저렇게 방치되어 있습니다.
에휴, 국민의 피와 땀으로 가득한 세금으로 저런 짓을 해놓았네요.
새우젓 골목-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이곳에서 새우젓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보수되고 철거되고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예전 가옥의 모습이 남아 있어요.
이렇게 길을 걷는 사람들이 기웃기웃하니
주민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조용히 지나다니고, 주민들을 보면 고개 숙여 인사를 했지요.
어린 시절 생각나게 하는 골목길.
인천 8부두 앞
맑은 하늘에
철거하지 못하는 철도가 철없이 놓여 있네요.
이곳 월미도 앞이 바로 적색해안
나머지 두 곳은 수인역과 송도 쪽이랍니다.
대한제분을 지나....
이곳 대한제분은 아동문학가 김구연 선생님이 오래도록 근무하시던 곳이지요.
대한제분 왼쪽을 따라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어요.
바닷물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요. 다행히 냄새는 나지 않았고요.
바로 이 모습...
무슨 가구 공장과 대성 목재가 있는 곳.
예전에는 저기 쌓여 있는 나무들이 그냥 바다에 둥둥 떠 있었대요.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그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도 꽤 있었다네요.
같이 걷는 분들의 말씀이.
또 예전에는 이곳을 똥바다라고 했답니다.
비만 오면 사람들이 인분을 이곳에 버려서 그렇다네요.
그러니까 시골에 사셨다는 학예사 분,
저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장마만 지면 똥물을 죄다 버렸어요. 그 날은 똥물 버리는 날이라고 하면서요.
만석포구의 모습입니다.
민석포구도 지금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 이유는 포구의 어느 부분까지 매립을 해서 건물을 세우자는 측과 매립을 반대하는 측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답니다.
개발을 하자는 측은 주로 주민들이고,
반대하는 측은 시민단체와 현재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랍니다.
개발도 좋지만, 보존도 좋지만...
제 생각은 지금 현재....쓰레기도 좀 치우고 좀 정리정돈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여기 와서 회를 먹을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안 먹겠다는 생각인데
저녁이 되면 낙조가 좋고
밀물 따라 만선이 된 배가 들어와 회를 먹으러 들이 몰려온다네요.
대한조선- 배를 수리하는 곳입니다.
굴막....
이곳으로 굴을 가득 실은 배가 들어오면
굴막에서 굴을 까는 작업이 밤낮으로 이루어졌답니다.
지금은 다 떠나고, 조금 좋은 시설에서 굴을 까고 있답니다.
나무 전신주가 있는 집....
예전에는 다 목전주였지요. 그건 저도 아는 것.
그러다 시멘트 전주가 되고 또다시 철전주가 되고....
2층에는 대성목재 근무자들이 묵었던 곳.
대성목재에서 일했던 처녀 총각 노동자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한방에 5.6명씩 묵었다고 합니다.
대성목재가 사라지면서 노동자들도 자취를 감추었고요.
만석동 외국인 묘지터...
예전에는 구릉지대와 연결되는 산이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산꼭대기에 군인이 거주하던 포대가 있었고 전쟁 후에는 망루가 있었답니다.
외국인 묘지는 1937년 영국이 들어오면서 요청하여 8,000평 부지로 만들어졌고
일본이 들어와서 3,000평만 남겼는데,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옮겼다 현재는 부평 가족공원으로 모두 옮겼다고 합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정희네 집
나의 아저씨를 잘 안 보아서...하지만 정희네 술집이 기억납니다.
이 근처에는 주로 저유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제 시대 텍사스 석유 회사(현재의 칼텍스)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 석유가 위치했었고
또다른 대동석유회사도 있었던 곳.
일제 시대에는 나무 상자에 드럼통을 넣어서 석유를 보관했는데 그것이 폭발하여 당시 돈으로 3만원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민들의 불구경으로 화재 진압에 애를 먹었다는 일화...
지금은 만석어린이공원이지만, 예전에는 평안도 안주출신 집단촌이었던 곳.
한국유리 최태웅 창업주는 평안도 안주 출신인데 해방 이후 이곳에서 공장을 설립했고 고향 사람들과 70가구 마을을 형성했어요. 창업주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취업하고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월남하여 왔기 때문에 반공의식이 투철했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일제 시기부터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같은 노동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메카였기 때문...
동일방직 기숙사 담벼락에 핀 꽃.
예전에(1906년) 포구였던 곳을 매립하였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33년 동일방직이 들어왔는데 이때 갯벌 부지여서 지반이 약해 심을 박고 도로를 개통하고 상수도 시설을 했는데 이때 일본 자본이 많이 들어왔다네요.
동일방직은 1930년대 초 일본에 본사를 둔 동양방직이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세운 것인데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1929년 공장법이 제정되어 하루 8시간 이상 노동을 못하게 하고 18세 이하는 채용하지 못하게 되자,
노동법이 없는 조선에 와서는 무한정 일을 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에구, 불쌍한 조선 사람들....
일본놈들이 미리 1~2년치 임금을 부모에게 미리 지급하고 어린나이의 여학생들을 데려왔는데 작업 환경이 무척 열악하여 기계는 마구 돌아가고 그 과정에서 먼지도 많이 나 폐결핵에 걸리는 아이들도 많았고, 수증기로 인한 열 발생으로 힘들었던 공장 생활,
그것뿐이었겠어요?
일본 관리자들의 성희롱.
견디다 못한 여공들은 유곽으로 빠지거나 밖으로 도망치는 도중 바다에 빠져 죽기도 하고.
공장 바로 밖에 바다 였으니까.
그래서 도망을 못 치도록 초소를 만들고 담장을 더 높이 올렸답니다.
인천의 골목지킴이 대표 이성진 선생님
동일방직 안의 기와 올린 건물이 있어 궁금했는데 바로 의무실이랍니다.
기와를 올리고, 건물은 일본식, 창틀은 중국식으로 지었다고 하네요.
왜 그랬을까?
원래의 괭이부리말로 들어갑니다.
점심을 먹고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삼대천왕인가 뭔가 하는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중국집.
내 입맛에는 뭐 그닥 특별한 게 없더구만.
일제 시대때 잠수함을 만들었던 곳.
원래 목표는 100대를 만들 예정이었으나 넉 대 만들고 끝!
처음으로 만든 잠수함 1호가 인천에서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도중 떠버리는 바람에...라는 웃기는 얘기.
일본에서 1300명의 노동자를 들여오고 나머지는 조선 사람을 강제 징용하였답니다.
한국 노동자들이 살던 사택...
일본사람들은 공장을 세우면서 일본인직공과 조선인 직공를 썼는데
총 3,000명 중 500명 정도가 일본 직공.
그들은 주로 기계의 조립일을 하여서 우리 조선인에게 절대로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답니다.
괭이부리말의 기찻길옆 작은 학교.
사실은 이곳은 괭이부리말이 아니라네요.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골목 속에 위치한 우리 미술관
작지만 어여쁜 미술관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예전의 기찻길옆 작은 학교 모습...
굴막이 이렇게 현대적으로 변했어요.
마당 앞에 굴자루가 쌓여 있고, 아주머니들이 굴을 까고 계시네요.
(눈으로 보기만 했지 촬영은 사생활 침해)
지금은 작은 아파트가 들어선 괭이부리마을....
삼화제분의 모습.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입니다.
조일 장유공장(아사히 간장 공장)이 있었던 곳.
인천에 간장 양조업이 진출한 것은 1908년.
만석동이 간장공장 입지로는 최고였겠죠.
간장의 주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입지였으니까요.
오후 3시까지 이어진 강행군으로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한 번 걷기는 수박 겉핥기.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걷기로 하고....
내 고장 인천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기회였습니다.
첫댓글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특히 인천은 이야기거리가 엄청 많겠어요.
예, 엄청 많아서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차분히 쓰고 있는 중이에요. 언제 한번 같이 걸어요^^
@바람숲 아니 이 시간에 왜 안 주무시고...
@산초 요즘 잠이 안 와요.ㅠㅠ 초저녁에 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