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
글쓴이 / 안재구(미레벌사람)
61 . 북방을 철통같이 지켜낸 김종서 장군
“호랑이어른이 도관찰사로 오신다. 길을 내어라.”
앞장에서 군졸이 먼저 소리를 지르고
뒤를 이어 몸집이 그리 크지 않은 대감이 힘차게 말을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길을 덮고 나섰는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대감은
사방을 주위 깊게 보더니만 자기의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호랑이라고 하더니만 무섭게 생기진 않았구려.”
“그래두 성만 나면 하늘이 날아난대요.”
“그러게 호랑이라 하겠지. 거저야 그렇게 부르겠소.”
사람들은 부임지에 도착한 김종서를 보고는 수군거립니다.
당시 북방의 국토를 안정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끊임없이 침입하여 백성들의 생명, 재산을 마구 약탈 파괴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사업은 그 시기 정부 앞에 나선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책임 맡을 사람을 보내어 하루빨리 북방을 개척하여야만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 문제를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김종서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종서는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찬바람 휘몰아치는 북방으로
말을 달리었던 것입니다.
김종서는 1390년 순천에서 도총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술에 능하였고 문장에도 매우 밝아 주변사람들을
감탄시킨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굳세고 용맹하여
호랑이로 소문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감히 누구도 선뜻 반대해 나서지 못했습니다.
김종서는 15살이 되던 1405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1419년에는 사간원 우정언이 되고 경차관과 우부대언을 거쳐
1433년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435년에는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했습니다.
그가 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부임지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상복을 입었습니다.,세종대왕은 역말을 보내어 김종서를 위로하고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재촉했습니다.
“그대가 지닌 임무는 북방개척에 있는 것이요.
어서 임지로 떠나는 게 좋겠소.”
사실 김종서는 상복을 입고 한 2년간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왕의 영이 그러하니 더 다른 군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임지로 돌아와 군사들을 정비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김종서는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는 무섭게 내몰고
또 이것이 끝나면 그들을 푸짐히 먹여 힘을 저축하도록 했습니다.
김종서가 도절제사로 있던 때 바로 여진의 한 부족인 혐진우더거가
영고탑지방에서 우리의 국경으로 나오면서 그들에게 밀려 난 부족들이
자주 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압록강 중류지대와 두만강 중류지대에
대한 방비시설들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때문에 북방의 국경을 새롭게 정하고
이 방비를 결정적으로 개선하여야 할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김종서는 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 위해 침입해 온 적들을
물리치는 한편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등 4군을 설치한데 뒤이어 자신이 직접
두만강 중류일대에 6진을 새로이 개척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종서는 1434년 여진족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나가면서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역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바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시에는 만리변역에 큰 칼을 집고서 침략자들을 단 한 놈도 남김이 없이
단숨에 베 버리고 조상대대의 자랑이 넘치는 내 나라를 굳건히 지켜가려는
결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두만강 이남의 모든 지역은 조선에 속한 땅이었지만
이 시기 행정 군사조직이 짜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여진족은 이 틈을 이용하려고
꾀했습니다. 김종서는 적들의 형편을 자세히 살펴본 후 필요한 곳들에는
성을 쌓고 또 모두 6개의 군사행정단위를 구성하여 6진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나라가 나에게 맡긴 과제는 북방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을 못하고서야 내 무슨 체면으로 대왕을 대한단 말인가.”
김종서는 차례차례로 6진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종성군의 개척은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령은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종성군과 온성군도 종성부, 온성부로 고쳐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만강 변에 있는 훈융으로부터 회령서쪽까지는 길게 성을 쌓아
국경선의 체모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이리하여 6~7년 뒤에는 부령, 종성,
경원(당시), 경흥(당시), 온성, 회령 등 완전한 6진이 개척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적 조치만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조치로도 실현되었습니다. 김종서는 6진을 설치함과 동시에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에 많은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진행한 이주사업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국토를 완정하고
자기들의 안정된 생활을 꾸리려는 백성들의 염원에도 맞는 것이므로
짧은 기간에 성과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새로 개척된 6진을 비롯한
함경도 지방에는 4차례에 걸쳐 근 6,000세대에 이르는 백성들이 이주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김종서는 이렇게 말했고 합니다.
“한 명의 아전에게도 채찍질을 하지 않았으며
한명의 백성에게도 형벌을 준 일이 없으나
수만 명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새 땅으로 모여왔습니다.”
김종서에 의해 진행된 6진의 개척은 생산의 장성뿐 아니라
당시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던 국방력 강화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었습니다.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국토를 완정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김종서는 커다란 역할을 했고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시기 김종서는 북방의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여진족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많은 시가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장백산에 기를 꽂고>, <장검을 빼어들고>의
시조에서는 원수들을 기어이 물리치고 나라를 철벽으로 지켜내려는
기개를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에서 그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용연각우에 뉘 얼굴을 그릴꼬.
시에서는 말공부만 일삼으면서 허송세월하는 썩어빠진 관료들을 규탄하고
나라 지키는 국토방비에서 무훈을 떨친 무인들의 업적을 찬양했습니다.
김종서의 지휘 하에 수많은 구간들에 성들이 튼튼히 쌓아지고
방비시설들이 구축됨으로써 적들은 감히 기어들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 이에 대하여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한해에도 두 세 차례나 여진부족들의 침입이 있었으나
금년에는 한번도 쳐오지 않았다. 이것은 성을 쌓은 일이
잘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하여
정부에 보고했으며 그것을 철저히 막아내고 국토를 지켜내기 위한 대책안들을
만들어 건의서를 제기했습니다. 북방의 정세가 어느 정도 완화되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착되게 되었을 때 정부에서는 김종서를 형조판서,
예조판서로 행정적 지위를 올리었습니다. 그리고 1450년에는 우의정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그는 <고려사>가 공정하게 편찬되지 못한 것으로 하여
왕명으로 재 편찬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총책임의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공정성의 원칙에서 자료들을 고증확증하고 빠진 것은 보충했으며
잘못된 것은 수정을 가하여 1451년 훌륭히 간행했습니다. 그리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아 책임적으로 편찬했고 또한 <고려사절요>의
편찬도 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 문장에 밝은 그의 재주가 남김없이 발휘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절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웠지만 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세종대 왕을 뒤이어 문종이 왕 자리에 앉았으나
그는 3년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대를 이어 12살밖에 안 되는 단종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 자리는 안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범같이 드센 아들들이
조카의 왕위를 넘겨다 보는 것이었습니다. 문종은 생존 시에도 자기의 앞길을
내다보면서 이것을 제일 근심했습니다. 때문에 나라의 원로급에 속하는 대신들인
영의정으로 있던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 등을 불러 이제 자기가 없더라도
어린 임금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을 했으며 집현전의 이름 있는 학자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들에게도 이런 마지막말을 남기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자기의 집권을 위해 먼저 단종의 측근자들과 그 세력들을 쓸어 버릴 것을
계산했습니다. 그 첫 대상이 바로 김종서였습니다. 김종서로 말하면 북방의 적을
진압하고 6진을 개척하는 데서 명성을 떨친 대신이었으므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누구도 호락호락 접어들지를 못했습니다. 몸은 비록 늙었지만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말하면 아직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기에 그와는 맞서서
흥정하기보다 꺼꾸러뜨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대가 있고 지조가 굳어 자기의 신념은 좀처럼 굽히지 않는 김종서와 같은 인물을
조정에 그냥 앉혀두고서는 제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탈취할 수 없다고 단정한
수양대군은 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1453년 10월 13일 수양대군은
수하족속들에게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들의 거사에 가장 큰 방해로 되는 자는 김종서요.
그자만 처리해버리면 순풍에 돛을 단 듯 일은 쉬울 것이요.”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한명희, 권람, 홍윤성 등, 힘깨나 쓰는 장사
수십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들어갔습니다.
집을 완전히 포위한 이들은 먼저 김종서를 밖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손님들이 찾아왔기에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수양대군의 수하졸개인 홍윤성이 급작스럽게 내려치는 철퇴에 맞아
김종서는 흰 수염을 붉은 피로 적시면서 드넓은 마당가에 나가넘어졌습니다.
이자들은 이에 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환을 우려하던 그들은
그의 아들까지 그 자리에서 격살시켰습니다. 복수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저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처리하여라.”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에 있던 신사면, 윤광은까지도 모두 해치웠습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나라의 국토를 완정하고 4군6진을 개척하여 국경수비에서
큰 공을 세운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자리싸움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양대군은 그길로 대궐에 들어가 어린 단종을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입궐하는 대신들을 차례로 처리해버리었습니다.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까지도 김종서와 역적모의를 하였다는 죄를 만들어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죽여버렸습니다.
김종서는 이날 철퇴에 맞았지만 요행 살아났습니다.
그는 단종이 걱정되어 그 몸으로 궁중에 나갈 차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수양대군이 가만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자객을 보내어 끝내 그를 죽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보살피지 못하고 가다니,
그 죄 죽어도 씻을 길이 없구나.
장차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이냐.”
김종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영영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김종서의 저서로서는 북부국경방비경험에 대하여서와 조선 초기의 군대편성 및
훈련에 대하여 쓴 병서 <계승방략>(2권, 1책)이 있으며, 문집으로서는
<절계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