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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산악인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은 19명 이지만
여성으로서는 대한민국의 오은선(44) 산악인이 세계 최초로 성공을 했습니다.
품속에는 산악인으로서 라이벌이자 든든한 동반자였던
후배 산악인 고미영씨의 사진을 품고...
후배 고미영은 지난해 7월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하다가
발을 헛 디뎌 안타깝게도 추락사 했습니다.
1997년 7월 가셔브룸Ⅱ에 오른 이후 12년 9개월만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이었습니다.
오은선은 안나푸르나 정상의 만년설 속에 후배 고미영의 사진을 묻고 하산했습니다.
8,000m급 14개봉 완등 레이스 시작! 오은선 VS 고미영
오은선 14개봉 최난의 K2 포함, 이미 5개 올라
고미영 코오롱스포츠 전폭 지원 받으며 1년사이 3개 등정
브로드피크 등반중의 고미영
k2 등반중의 오은선
오은선(吳銀善ㆍ41ㆍ수원대 OB)과 고미영(高美榮ㆍ40ㆍ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두 여성 산악인이 ‘8,000m급 14개봉 완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오은선은 올 7월 K2를 오름으로써 에베레스트, 시샤팡마, 초오유, 가셔브룸2봉까지 5개, 고미영은 올 7월 브로드피크 등정으로 에베레스트, 초오유까지 3개를 끝냈다. 현재 여성으로서 거봉 최다 등정기록 보유자는 오스트리아의 30대 중반 여성 겔린데 칼텐브루너(Gerlinde Kaltenbrunner)로서 초오유, 마칼루,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안나푸르나, 가셔브룸1,2봉, 시샤팡마, 캉첸중가에 이어 올해 브로드피크를 올라 10개를 기록했다. 그 다음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Edurne Pasaban)이 2001년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마칼루, 초오유, 로체, 가셔브룸 1,2봉, K2, 낭가파르바트, 브로드피크의 9개이며, 그밖에 이탈리아의 니베스 메로이(Nives Meroi)가 7개 등이다. 14거봉에 7대륙 최고봉 포함하면 ‘세계 최초’도 노릴만 이렇듯 앞선 기록을 가진 여성들이 여러 명 있기 때문에 오은선, 고미영 두 사람이 여성 세계 최초 14거봉 완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박영석의 경우 한 해에 무려 6개나 오른 적이 있다. 오은선과 고미영은 현재 매년 2~3개봉 등정을 계획하고 있으며, 두 사람의 등반 기량은 탁월하며, 등반 외적 조건도 좋다. 그러므로 2년쯤 뒤엔 두 한국 여성이 두 외국 여성과 각각 1, 2개 봉을 남겨놓고 완등의 선두다툼을 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세계 최초를 거론할 경우는 얘기가 더욱 달라진다. 소요시간이 더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미 7대륙 최고봉 완등을 이뤄낸 오은선이 월등히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10여 회 경험자인 오은선이 고미영에 비해 한 수 위다. 그러나 고미영은 김재수라는 탁월한 고산등반가가 매니저로서 동반키로 하며 이 약점을 가리고 있다. 세 남성 산악인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에 비해 한결 가벼울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남성 완등자들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관심이 바로 이들 두 여성에게로 옮겨가면서 무엇보다 등반비 마련이 한결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비 마련이 그만큼 어려웠음을 함축하는 말이다. 남성도 아닌 ‘연약한’ 여성이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8,000m급 14개 거봉을 완등하려 한다는, 사회 일반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할 이 이벤트는 곧바로 대기업의 전폭적 지원과 연결될 수 있다. 최초의 거봉을 오르기 전에 코오롱스포츠가 전속 계약을 맺으며 전폭적인 경비 지원을 약속했다. 앞으로 6년간 일정액의 연봉과 더불어 14거봉 완등+7대륙 최고봉 완등을 이룰 때까지 등반 경비 전액을 후원키로 했다. “아무리 못해도 인류 사상 4~5번째,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 아니면 두 번째 완등자로 화제에 오를 고미영을 통해 코오롱이 올릴 광고 효과는 대단할 것”이라고 코오롱측 관계자는 말한다. 에베레스트 2회, 로체, 초오유, 시샤팡마 남벽(세계 2등), 브로드피크, 로부제 동벽(세계 초등) 등 고산 경험이 풍부한 김해 산악인 김재수씨를 선정, 그와도 계약을 곧 맺는다. 고미영으로선 경비, 안전 등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 그야말로 ‘해피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김재수라는 베테랑의 동행으로 고미영의 등정성공률이 높아지며 자연스레 완등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14거봉 완등의 2대 난제 중 하나인 K2를 해결한 데다 이미 7대륙 최고봉 완등자이기에 든든한 후원사를 아닌 말로 골라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넘칠만큼 풍부하게 축적이 돼 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두 여성은 3~4년 내에 목표를 무난히 이룰 것으로 보인다. 성격과 등반성향 놀라울 정도로 비슷 성격이나 등반 성향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오은선은 알피니즘을 강조하며 전통과 서열을 중시하는 대학 산악부를 통해 산악인으로 성장했다면 고미영은 스포츠 클라이머로 대성공을 이룬 후 고산등반으로 전격 방향 선회를 했다. 두 여성은 모두 한국여성산악회(회장 배경미) 회원이긴 하지만, 같이 산을 올라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이렇듯 성장배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소수 대원에 의한 속공등반을 선호한다. 남성들도 놀라울 정도의 단호함과 집중력을 가졌으며, 남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오은선(왼쪽), 고미영. 두 사람은 같은 한국여성산악회 회원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단신이지만(오은선 154cm, 고미영 160cm) 신체조건이나 체력은 산악인의 평균치를 크게 넘어선다. 오은선은 태릉선수촌에서 테스트를 받은 적이 있는데 “심폐기능이 황영조보다 좋다”는 말을 들었다. 때문에 8,000m 고소에서도 일단 산소를 쓰면 속도가 매우 빠르다. 2004년 에베레스트 북릉 등반 때 오은선은 4시간 전에 최종캠프를 떠난 여러 외국 대원을 모두 따라잡고 선두에 나서기도 했다. “산소를 쓰니까 거의 평지에서 걷는 듯한 기분이더라”고 오은선은 말한다. 일반적으로 성인 맥박수는 60~80회이며, 엄홍길은 55회 정도, 황영조조차도 52, 3회 정도라고 한다. 성인 남녀의 연령이 같은 경우 체지방율이 높은 여자가 남자보다 대개 심박수가 6~8개 많다고 하니, 고미영의 심박수는 놀라운 수준이다. 느린 심박수는 그만큼 나은 고소적응력을 보장한다.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선수 때 어느 검사소에서 폐활량을 재본 적이 있는데, 그때 검사소 직원이 자신이 계측해본 여성 중 최고라 말했다. 가셔브룸 1봉과 브로드피크를 오를 예정이다. 그 이후는 아직 구상 중이다. 등반대는 김재수씨가 대장으로 총지휘 감독과 촬영을 맡으며, 마칼루 같은 난봉 등정시엔 강연룡, 윤치원, 김영태 등 한국 유수의 고산 경력자들이 동행키로 했다. 셰르파는 에베레스트 2회 등정을 비롯해 시샤팡마 3회, 초오유 5회 등 막강한 경력의 소유자인 다케(Dakeㆍ40), 주믹(Jumikㆍ29ㆍ에베레스트 2회, 브로드피크 등정), 다케의 친동생인 치링(Tshingㆍ27ㆍ에베레스트 2회, 로체, 시샤팡마 2회 등정) 3명을 선정해두었다. 내년 로체, K2, 마나슬루, 2009년 마칼루, 가셔브룸1,2봉, 2010년 안나푸르나와 낭가파르바트, 2011년 캉첸중가에 이어 다울라기리 등정으로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다. 내년에 K2 등정 후 시간이 남으면 가셔브룸도 해치울 작정이다. 이렇게 틈새 시간을 활용할 경우 1년 정도 시간이 당겨질 수도 있다. 대의 명칭과 로고는 공모를 통해 올 겨울 확정한다. 고미영은 이렇게 반문한다. “일단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 등반이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보상이 따라온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가 있겠어요?” “얼마 전까지 저는 아마추어였지만 이제는 프로이므로 저에게도 이제 등반은 유상의 행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무산소 거봉 등정이 아니라 완등이 목표인 만큼 최대한 산소를 쓰며 등정해나갈 예정이다. 일부 우려하는 시각이 있긴 하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결코 상대방을 의식해서 서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회적 이목을 긍정적으로 함께 이끌어가는 훌륭한 동반자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서로간 단점 아닌 장점 들추기가 선행될 경우에 한해서다. 사회 일반은 산악인들은 고산등반을 통해 자신들보다 고양된 품성을 지녔으리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 선입견이 무너지면 산악계 전체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 날다람쥐’오은선 등반속도가 빠르고 몸이 재다고 하여 별명이 날다람쥐인 오은선은 66년 전북 남원에서 2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났고, 강원도에서 유년을 보내다가 서울로 왔다. 고교 시절부터 암벽에 관심이 있었고, 수원대 진학 후 산악부에 가입했다. 첫 암벽인 인수봉 A코스 등반이 너무 재미있었던 것으로 돌이킨다. 그 후 오은선은 집과 학교, 그리고 암벽과 친구를 포함한 산 세 꼭지점을 벗어나지 않는 청년기를 보냈다. 25세 때인 91년 가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에 선발돼 1년여 맹훈련을 한 뒤 에베레스트 원정길에 나섰다. 수원대 전산학과를 나온 오은선은 서울과학교육원 전산직 공무원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93년 에베레스트 원정 직전엔 7급 승진 케이스였다. 그러나 오은선은 미련 없이 직장을 버리고 에베레스트를 선택했다. “수원대산악부 가입 이후 대학산악연맹이라는 조직의 선후배들 사이를 오가며 만년설을 향한 꿈에 속속들이 젖어들었던 사람이 나였다”고 오은선은 돌이킨다. C3(7,300m) 이상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과 힘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등정에 대한 미련은 곧 흰 산에 대한 열정으로 치환되었다. 96년 후배 2명과 유럽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부터 올라갔고, 그 다음 97년엔 대학산악연맹이 주최하고 영석형이 대장을 맡은 가셔브룸1,2봉 원정에 참가해서 생애 첫 8천미터 정상을 밟아봤어요.” 박영석으로부터 독립하다 가셔브룸2봉 등정 이후 오은선은 박영석과 사뭇 길게 인연을 이어갔다. 99년 봄 브로드피크(8,047m)에 이어 마칼루(8,463m), 2001년 K2(8,611m)로 이어지는 박영석의 완등 행보에 홍일점으로 연이어 동행했다. 이 세 등반 모두에서 한 사람씩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고 등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혹독한 등반들을 체험하며 오은선은 첫 등정인 가셔브룸2봉 때는 그저 앞 사람 발꿈치만 뒤따르던 초보자에서 어느덧 고 지현옥의 뒤를 이을 한국의 대표 여성 산악인으로 자연스레 부상했다. “93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부터 줄곧 팀의 일원으로서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만 움직임이 허용되는 방식의 등반이 그만 싫증났다”고 오은선은 돌이킨다. 2000년 들어 오은선은 ‘내 돈 벌어 내 원정 내가 가겠다’며 평촌에서 스파게티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만에 잇몸이 흔들릴 정도로 장사는 피곤했다. 그러다 박영석 대장의 제의로 ‘좀 쉬고 싶다’며 나섰던 K2 등반 또한 박영도 대원의 죽음으로 끝났던 것이다. 오은선은 이후 거봉 등정에서 목표를 7대륙 최고봉 등정으로 재설정했다. 7대륙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를 제외하면, 8,000m급 고봉만큼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소수로도 등정을 이룰 수 있는 5,000~6,000m급 봉우리들이다. 평소 일하다가 원하는 원정을 나갈 경우 시간과 장비 지원을 해준다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2004년 에베레스트 북릉(초모랑마) 원정으로 이어졌다. 산악인 오은선에게 2004년 봄의 이 등반은 영육의 극한을 체험케 하며 베테랑으로 거듭나게 한 의미 있는 등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대구 계명대팀과의 합동등반이나 다름없었던 이 등반 중 계명대팀 박무택 대원이 하산 중 실종되는 사고가 났고, 등정 도중 오은선은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본다. 거기서 겪었던 극심한 슬픔과 공포, 그리고 등정 후 하산길에 산소가 떨어져 최종캠프에 다다르기 직전 온몸의 기운이 쇠진하여 쓰러졌던 극한 체험은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를 ‘너무도 재미나게’ 오른 뒤 호주 최고봉인 코지오스코(2.228m)를 가볍게 밟은 다음 그해 12월19일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를 밟는 것으로 7대륙 최고봉 순례를 끝냈다. 1년여 산을 쉬는 동안 ‘최대 난봉인 K2를 향한 4단계 계획’을 구상, 첫 단계로 2006년 8월 말 시샤팡마ㆍ초오유 원정을 추진했다. “나 혼자서 등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해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 스스로 체크해본다는 의미를 둔 그런 원정이었다”고 한다. 비용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는데 굿모닝신한증권에서 3천만 원에 TV광고 모델 제의가 들어왔어요. 무조건 오케이를 했는데, 회사(영원무역)에서 등반경비로 3천만 원을 지원해줬어요. 그래서 처음엔 시샤팡마만 계획했다가 바로 옆에 있는 초오유도 해버리자, 그렇게 계획을 바꿨죠.”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서 8천미터 거봉 10개 등정기록 보유자인 오스트리아 칼텐브루너와 함께선 오은선. 오은선은 혼자 셰르파 2명만 고용해서 나선 이 원정에서 시샤팡마만 오르고 초오유는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 아닌 실패였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먼저 시샤팡마부터 캠프를 2개만 설치하고 등정했어요. 힘들었지만 할 만했어요. 그래서 초오유도 3캠프는 생략해버리고 2캠프에서 곧바로 등정 시도를 해봤어요. 2캠프에서 3캠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개 3~4시간이니 그만큼 빨라야겠죠. 그런데 오전 11시쯤 록밴드에 도착했을 때 체력이 떨어지면서 머리가 너무 시려워왔어요. 강풍이 불고, 날씨도 너무 나빴어요. 안되겠다 싶어 되돌아섰지요. 또한 자신의 혹한 등반능력을 키우는 한편 K2 원정을 함께 할 동료들을 물색, 단련한다는 취지의, K2를 위한 2단계 원정이었다. 아마다블람 등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올봄 오은선은 후배 김선애(30)와 단 둘이 단돈 1,200만 원만 쥐고 초오유 재시도에 나섰다. 셰르파도, 산소도, 쿡도 없는, 베이스캠프 이후는 오로지 단 두 사람만이 움직이는 초경량 원정대였다. 코펠 한 조, 압력밥솥 작은 것 하나, 브루스타 버너 한 조, 부탄가스 20개가 베이스캠프 취사구의 모두였다. “5월3일 지난 번처럼 2캠프에서 곧장 혼자 등정 시도를 했는데, 또 록밴드에서 되돌아섰어요. 이틀 쉬고 5월6일 2캠프 텐트 걷어서 3캠프로 옮겨 치고 다음날 밤 1시10분에 출발, 카자흐스탄 사람 한 명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올라갔지요. 초오유 정상까지 8시간인가 걸렸어요.” [좌]시샤팡마를 함께 오른 두 세르파와. [우]수원대산악부원 시절, 빙벽등반을 위해 아이젠을 들고 선 오은선 이렇듯 자기 단련을 마친 오은선은 올해 7월2일 K2 등정길에 올라 등반 개시 18일만에 정상을 밟았다. 의사 한 명을 포함해 대원은 6명이었지만 오은선 자신 이외 고소경험자는 초오유 3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산 경험의 전부인 김선애뿐이어서 실제 등반은 셰르파 2명과만 진척시켜야 했다. 1, 2캠프만 고정텐트를 설치해두고 4캠프는 3캠프에 썼던 텐트를 옮겨 설치하는, 초오유에서 유용했던 방식을 썼다. 올해의 K2 등반에서 오은선은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다른 팀 셰르파가 낙석을 피하려다 추락사한 것이다. “너무 무서워서 위 한 번 보고 아래 한 번 보고 하면서 가만히 서 있다가 부산팀 대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겨우 용기를 내서 다시 올라갔다”고 오은선은 돌이킨다. 산소의 질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두통이 심했지만 등정 후 하산길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쿠쿠츠카는 내 마음속 애인” 형식상 부산팀의 한 대원으로서 등정을 시도했다. 7월28일 전진캠프에 이어 7월29일 2캠프, 30일 3캠프에 도착, 다음날 바람 때문에 지체하다가 밤 9시경 정상을 향했다. 나중에 출발한 부산팀 김진태, 김창호 대원은 오은선을 쏜살같이 앞질러 갔다. K2 등반 때 조금 투박한 것 같아서 옷을 좀 얇게 입었더니 춥기도 했구요. 갈등하다가 내 혼자 힘으로도 내려갈 수 있을 때 다시 오자며 되돌아섰어요.” “10개 정도 한 다음 정식으로 밝히려 했는데, 경비 문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라고 앞당긴 이유를 밝힌다. 그리고 무리하지는 않겠지만 서두르고는 싶어요. 1등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이 때문에요. 이제 40대인데 언제 힘이 떨어질지 모르잖아요.” “오은선이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임을, 그런 정도의 자제력은 갖춘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던 이들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마찰 때문”이라고만 간단히 그 이유를 밝힌다. 한국산악회 최홍건 회장의 도움으로 1천만 원, 모교 수원대산악부에서 모금해준 1천만 원, 대원 회비 등으로 간신히 경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7대륙 최고봉 완등에 난봉 K2를 포함한 5개봉 등정을 이뤄낸 오은선이 경비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결혼은? 하지만 14좌 끝나면 언제든지-. 제 마음 속 애인은 있어요. 체코 산악인 쿠쿠츠카. 그 사람이 쓴 등반기 ‘14번째 하늘에서’를 읽고 반했어요. 죽었지만, 그 사람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듯해진답니다. ‘셰르파니’고미영 네팔 고산족 셰르파 여성처럼 강인하다고 하여 ‘셰르파니’라 불리기도 했던 고미영은 67년 전북 부안에서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고1때까지 살았다. 학교까지 꼬박 30~40분 걸어다녀야했던 이때 기본 체력이 갖춰진 것 같다고 한다. 인성여고 졸업 후 공무원 생활을 하던 89년 우연히 암벽에 입문,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도 나왔다. 실내암장을 찾아 오르기 시작, 스포츠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68kg이나 나갔던 체중이 20kg이나 줄어들었다. 결국 97년 서른 살 때 고미영은 12년간 해온 공무원 생활을 접고 프로 클라이머로 변신했다. 92년 결혼했던 남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무렵이기도 하다. 프랑스 유수의 등산학교로 유학을 떠나 1년여 클라이밍 훈련 후 돌아왔다. 하지만 젊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밍으로 먹고 살 자신이 있었구요. 대개 사람들은 양다리 걸치기를 좋아하는데, 저는 클라이밍을 택하고 다른 것은 버리겠다고 마음 먹은 거죠.” 에베레스트 북릉을 오르던 중 쉬고 있는 고미영. 이후 고미영이 스포츠클라이밍 분야에서 쌓은 경력은 화려하다. 95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선수권대회 9연패, 1997년~2003년 아시아 선수권 6연패, 98년 월드 X게임 준우승, 99년 프랑스 베상송 월드컵 4위, 2000년 미국 유타주 5.13d/14a(캅킬러) 여성 초등, 2002년 아이스클라이밍 세계선수권 4위 등 발군의 기량을 보여왔다. 98년 고미영이 외국 대회에서 받은 상금만 총 2만달러가 넘었다. 당시 한화로 2,500만 원 정도 되는 그 돈으로 고미영은 직장 다닐 때처럼 쓸 데 다 쓰며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멘틀 스트롱(Mental Strong)’이라 부른다. 언제나 여유롭고 시합 때도 남달리 차분했기 때문이다. 늘 단전호흡과 요가를 해왔으며, <정신력 강화훈련>이란 책을 닳도록 읽기도 한 고미영은 이렇게 말한다. 외국 클라이머들 “멘틀 스트롱”이라 불러 “언제나 눈앞의 목표에 최선을 다했어요. 대회 때도 상대방을 이겨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이 루트를 어떻게든 단시간에 완등해야지 하는 쪽으로 마음을 집중시켰어요. 그렇게 국내 대회에 1등 한 다음엔 아시아대회 1등이란 목표로 다가갔을 뿐이고, 그 과정이 즐거웠어요.” 고미영은 대회 전날에도 늘 잠을 잘 잤다고 한다. 다만 3년 전 집착으로 1주일이나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 자신의 팬이던 6살 연하의 한의사와 혼담이 오고갈 때다. 시부모 될 분들을 만나기로 날을 잡은 이후부터 ‘어떻게 그 날 잘 보일 수 있을까’하는 궁리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이 집착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브로드피크를 등반중인 고미영. 양가 대면을 마치고 고미영은 한 달 간 스페인 암장 순례길에 올랐다. ‘너무도 재미있고 너무도 자유스러운 나날’에 자신이 결혼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꼭 결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갖고 결혼한다는 것은 남자에게도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없던 일로 하자는 이메일을 보냈죠. 미안했지만,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지금 홀가분하고 좋아요.” 차분한 독서, 십자수, 한지공예에도 집중하곤 한다. 그래야 클라이밍이 더 잘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곧바로 암장으로 훈련하러 간 적이 있을 만큼 대단한 술 실력은 매일 됫병으로 하나씩 드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특이체질인 것 같다며 고미영은 웃는다. 될 수 있는 대로 뭐든 재미있다며 해야 더 잘 되고, 뭐든 맛있다고 하면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절대 지겹다는 말을 내보내지 않는다. 그럼 정말 지겨워진다”고 고미영은 말한다. 98년 미국 엑스게임에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초청선수로 나가 준우승을 하고 나서 선수들끼리 여러 가지로 내기를 했을 때다. 턱걸이 시합에 나선 고미영이 끊임없이 하자 다들 “네가 일등이니 이제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96번을 했을 때였고, 고미영은 “앞으로 2시간은 더할 수 있다”며 외국 친구를 기죽였다. 고미영이 시내에서 신고 다니는 작고 가벼워뵈는 스니커즈형 신발은 그러나 무게가 1.7kg이나 되는 특수 신발이다. 물론 다리힘을 평소에도 키우기 위해서다. 스포츠클라이밍에 한창 열중할 때는 남들이 근무하는 시간만큼인 하루 8시간씩 꼭 운동했던 고미영이기도 하다. 코오롱그룹 전폭적 지원 약속 2004년 자누 북벽을 등반해 황금피켈상을 받은 러시아 등반가인 알렉스는 고미영에게 강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하며, 베이스에서도 캠프에서도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그는 한 걸음도 뒤처지지 않고 자신을 따라왔던, 강인하고도 내면은 호수같이 차분한 이 동양의 여성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던 게 분명하다. 스포츠클라이머 고미영이 고산등반가로 변신한 계기는 코오롱등산학교 강사팀 일원으로 동참한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 원정이다. 고미영은 김형주 강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바짝 선 이 고난도 봉을 오른 뒤 강사들로부터 “진작에 시작했다면 벌써 8,000m급 몇 개를 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이제 폭이 좁은 무대를 떠나서 광대한 무대로 나가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참에 드리피카 경험을 했는데, 좋았어요.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았고, 미약한 두통만 잠깐 느낀 정도로 고소순응도 잘 되었고. 그래서 하산길에 선배 강사분들한테 이렇게 부탁했지요. 저를 이제는 알피니스트라고 불러주세요 라고 말이죠.” 요르단의 고난도 암벽루트를 오르고 있는 고미영.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다져진 고미영의 몸은 고산등반에서도 대단한 파워로 작용할 것이다. 이미 드리피카에서 증명된 바 있다. 등정 직전 고미영은 60m를 추락, 척추가 두 마디나 어긋나는 중상을 입었다. 귀국 후 엑스레이를 본 의사가 놀라서 “이 정도면 통증 때문에 꼼짝도 못할 텐데 어떻게 걸어왔느냐”고 묻기에 “아픈 줄은 모르겠다”고 하자 “그럼 그냥 복대만 하고 두고 보자” 했다. 수술해야 한다던 척추의 마디는 6주 후 말짱하게 원상회복되었다. 고미영의 몸 구석구석은 그렇듯 어긋난 척추를 스스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 드리피카 정상부에서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했다면 그대로 불귀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고산등반가로의 변신을 선언한 고미영을 코오롱은 전폭 후원키로 했고, 고미영은 2006년 3월 코오롱이 장비와 등반비를 지원하는 대전팀과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올랐다. 그러나 작은 경험 미숙이 등정을 막았다. 암벽화를 딱 맞게 신는 오랜 습관 탓일까. 등반화를 딱 맞는 것을 신고 전진캠프까지 가서 닷새쯤 머물다가 베이스캠프로 하산하는 중 손발이 부어 신발이 꽉 끼는 상태가 되며 동상이 왔다. 베이스캠프에서 열흘간 머물며 통증을 견디다 못해 고미영은 결국 먼저 귀국하고 말았다. 혼자서 무겁게 지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청계산을 뛰어오르기도 하면서요. 그러다 이듬해인 2006년 가을 가장 쉽다는 초오유로 갔어요. 혼자서요. 제가 원래 혼자 다니길 좋아해요.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이 좋아서 외국 클라이밍 갈 때도 혼자 잘 다녔어요.” 9월28일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설렘을 안고’ 등정길에 나선 고미영은 10월1일 정상에 섰다. ‘정상만이 목표가 아니고, 이런 멋진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고 행복했던’ 고미영의 초오유 등정 사진은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라 어디 만년설로 놀러 나온 사람 같다. 등반 내내 입맛도 좋았고, 하산 때는 답답해서 산소마스크를 벗었지만 고소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브로드피크 정상에서 김재수대장과 코오롱 깃발을 들고 선 고미영. 올해 5월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세계 최고봉과 K2만 최고로 치는 일반의 인식을 고려해서 일부러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마침 김해 플라잉점프팀 구성 소식을 들었고, 잘 아는 송귀화 선배도 같이 간다기에 김재수 대장에게 전화해서 동참 허락을 받았다. 공항에서 난생 처음 만나 인사한 낯선 경상도 사나이들과 함께 한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북릉) 등반은 ‘원정을 이렇게 해도 되나 싶게 편했다’고 한다. “김재수 대장과 더불어 속공으로 공략, 12일만에 등정을 이루긴 했지만 특히 하산 때 다리가 몹시 아파 몇 번이나 주저앉았다”면서 “그간 일부러 몸을 불렸는데 속공등반에 딱 맞는 수준으로 몇 킬로 더 빼야겠다”고 말한다. 고미영은 몸과 근육, 스타일 등이 고산 체질로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고미영은 올 9월 예정인 시샤팡마도 셰르파 2명만 고용, 캠프를 2개만 설치한 뒤 정상까지 고도차 2,000m에 달하는 구간을 속공으로 돌파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렇듯 고소형으로 몸 만들기가 마무리된 이후 고미영이 얼마나 폭발적 힘을 보일지 궁금하다. 2007.9 월간 산
한편, 칼텐브루너는 가장 어려운 K2를, 파사반은 캉첸중가를 남겨두고 있다.
14개 거봉 완등에 국한하지 않고 7대륙 최고봉 완등까지 포함시켜
고산등반 노하우에서는 그간 박영석과도 여러 차례 등반해본 경험이 있는 등
오은선, 고미영 두 사람의 완등을 향한 발걸음은
산악인들은 “해외원정은 일단 떠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들 말해왔다.
고미영의 경우,
코오롱은 고미영의 14거봉 완등이 좀더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매니저 겸 동반자로서
“코오롱측은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고미영의 말이지만,
오은선은 최근 K2 원정을 떠나면서 그간 몸담았던 영원무역을 그만둔 상태다.
한편, 한국 산악계엔 그간 각 봉우리에 대한 정보, 등반 노하우 등이
두 여성은 산악인으로서 성장 과정이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반면 성향은 매우 비슷하다.
고미영은 맥박수가 분당 49회에 불과하다.
고미영은 폐활량도 대단하다.
오은선은 내년 여름 모교인 수원대산악부 팀을 이끌고
고미영은 ‘14개봉 완등 프로젝트 추진 계획서’를 공개했다.
이렇게 구성한 등반대와 더불어 고미영은 올 가을 시샤팡마,
‘등반은 무상의 행위’라는 말은 종종 고산등반가들을 압박하는 말이다.
오은선 또한 “등반이 유상의 행위가 된 지 오래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두 여성 산악인의 완등 레이스에 대해 지나치게 경쟁하며 혹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당분간 두 사람이 함께 등반을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만년설 향한 꿈에 속속들이 젖어왔던 나”
오은선의 고산 첫경험은 93년 에베레스트다.
에베레스트에서 오은선은 고소적응은 잘 되었으나
“적어도 이태에 한 번씩은 고산을 오르리라 작정했어요.
그 와중에서 오은선은 박영석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다.
박영석과의 세 등반 모두에서 등정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 2002년 들어 등산용품 업체인 포리스트시스템에 입사했다가 영원무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7대륙 최고봉 완등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룬 그해 8월 오은선은 대학산악연맹 후배 3명과
2005년 2월 오은선은 스키 중 오른쪽 정강이가 복합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큰 문제는 역시 경비였어요.
시샤팡마와 초오유에서 캠프 줄이며 속공등반
“속공 체질을 키워보려고 캠프 수를 줄였죠.
”
그 해 겨울 대학산악연맹 후배들과 추진한 동계 아마다블람 등정은
K2는 역시 위험한 곳이었다.
K2 등정 이후 오은선은 옆의 브로드피크로 바로 이동,
“혼자서 가는데 새벽 2, 3시 되니까 구름장이 몰려오면서 고정로프가 안 보였어요.
오은선은 “이 등반 이후 비로소 14거봉 완등 결심을 굳혔다”면서
“지금까지 저는 아마추어였지만 이제는 프로라고 선언하려 해요.
오은선은 K2 원정을 떠나기 직전까지는 영원무역 직원이었으나 지금은 무소속이다.
K2 원정비는 마침 화장품 회사인 더페이스샵에서 모델 조건으로 3천만 원을 받았고,
“내 목숨이 내 것 아닌데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안정된 직장 버리고 클라이머의 길 선택
휴일에 자연암장만 찾는 정도로는 암벽 실력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고미영은
“물론 주위에서 왜 그 안정된 직업을 버리느냐고 모두 반대했죠.
그러면서 장담한 대로 먹고 살 만큼은 클라이밍을 통해 벌었다.
국제 대회에서 만나 친하게 된 외국 클라이머들은 고미영을 두고
1등에 대한 집착 아닌 ‘좀더 빠른 완등에 대한 집중’을 선택했으므로
고미영은 클라이밍이란 역동적 움직임으로 비롯된 강렬한 파장을 순화시키기 위해
남자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다가 다들 떨어진 새벽녘
잘 웃는 것도 고미영의 특징 중 하나다.
멘틀 스트롱일 뿐 아니라 고미영은 육체적 파워도 엄청나다.
초오유 등반 때는 워낙 잘 먹고 잘 걷자 주위에서 그를 셰르파니(여자 셰르파란 뜻)라 불렀다.
초오유에서 만나 같이 오르기도 했던,
“마침 스포츠클라이밍을 계속 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가 되기도 했고,
“오기가 생겼죠. 다시 심신을 다졌어요.
셰르파 1명, 쿡 1명만 동행하고 나선 고미영의 초오유 등반은 여유롭고 순조로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보다는 브로드피크가 한층 더 어려웠다고 고미영은 말한다.
김재수 대장은 “앞으로 한두 개 더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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