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얽힌 주역 이야기
술자리는 유시(酉時) 지난 술시(戌時)에
사람들은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酬酢)을 통해 오랜 회포를 풀고 교분을 나누는 등 일상적인 술자리를 자주 갖지만 술에 담겨진 깊은 철학적 의미를 별반 마음에 두지 않고 마신다.
사실 필자도 뜻을 함께하는 지인이나 벗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를 즐겁게 여기기는 하지만 주량도 약한 편이고 술에 관한 기본지식이 거의 없는 문외한이다.
水(물 수)와 酉(술병 유)를 더한 酒(술 주)는 음력 8월 한가위인 유월(酉月. 백로추분)에 빚는 술을 나타낸다.
해질 무렵 둥우리를 찾아든 새를 본뜬 西(서녘 서)에서 비롯된 것이 酉인데, 술병(西) 속에 햇곡식(一)을 넣어둔 형태로도 酉를 풀이하기도 한다.
해질 무렵의 저녁 酉時(5시~7시)는 마침 새 술을 빚는 음력 8월에 해당하며, 12지지(地支)로 열 번째에 자리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酉) 다음의 열한 번째 지지인 술(戌)이다.
마시는 ‘술’과 발음이 똑같기 때문인데, 하루로는 일과를 마치는 밤중(7시~9시) 때가 이르고 1년으로는 농사를 끝낸 늦가을 음력 9월이 이르러야 술을 마실 때가 되는 것이다.
본래 추분(秋分) 전후의 백로(白露), 한로(寒露)의 가을철은 매끄럽고 차가우며 단단하게 열매를 맺는 金기운이 왕성한 때이다.
대개 싹이 돋고 꽃필 무렵에는 어떤 열매가 맺을지 알기 어렵지만 가을철에는 사물 본래의 진면목(眞面目)이 분명하게 드러나 실체가 노출(露出)된다.
콩 심은 데 콩 열매가 달리고 팥 심은 데 팥 열매가 달리듯이, 자성(自性)의 본래면목이 완전히 눈뜨는 진아(眞我)가 발로(發露)하는 때인 것이다.
대중들이 즐겨 마시는 술 가운데 하나인 진로(眞露)란 명칭도 맑고 깨끗한 참이슬이라는 뜻이다.
이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처럼, 술자리를 가져보면 상대방의 의중이나 성격이 대략 파악되기 마련이다.
수작(酬酢)과 교역(交易)
술은 제주(祭主)와 신명(神明)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특별하고 희귀하며 값비싼 술이야 헤아릴 수 없겠지만 아마도 신명(神明)이 강림(降臨)하는 데 필요한 제주(祭酒)가 가장 귀중한 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음복(飮福)은 제주(祭酒)를 올리고 제사를 다 끝낸 다음 신명에게 바친 술을 돌려 마시는 풍속으로, 정성껏 예를 갖추어 신명에게 제사를 지낸데 대한 보답으로 신명이 감응(感應)하여 복을 내려줌을 말한다.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酬酢)은 주인이 손님에게 먼저 술(酬)을 권한 다음에 그 답례로 손님이 주인에게 술(酢)을 권하는 것이다.
제사는 후손이 없으면 지낼 수 없으므로 후손이 곧 제사를 주장하는 주인이 되고, 제사에 강림한 조상은 곧 초빙된 손님이 된다.
후손이 조상에게 올리는 제주(祭酒)가 ‘酬(술잔 보낼 수)’로 앞서고 조상이 후손에게 내려주는 음복(飮福)이 ‘酢(술잔 돌릴 작)’으로 뒤따르는 것에서도 주객의 선후가 나타난다.
대개 술자리 상대가 지위나 나이가 높을 경우 아래에 처한 신분으로서 상대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 상례이긴 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입장이라면 상대에게 술을 사거나 술값 전부를 내는 측에서 먼저 술을 권할 주인의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대개 주역에서는 천지신명에게 길흉에 대해 묻는 것을 酬, 천지신명이 괘효를 통해 일러주는 것을 酢이라고 일컫는다.
문답(問答)에도 이렇게 수작(酬酢)과 교역(交易)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酒에 담긴 동서양의 만남
동양철학서 가운데 으뜸경전인 역경(易經. 일명 周易)에서는 이 술을 지극히 중시하고 신성시하여, 선천(현실세상)에서 후천(이상세계)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교역수단으로 보았다.
주역학의 종장(宗長)인 也山선사(1889~1958)는 공자가 집대성한 주역의 숨은 이치를 극진히 밝혀내어 양력과 음력을 조화한 후천시대의 새 책력인 「경원력(庚元歷)」을 만들고 오행정치학인 서경 홍범(洪範)과 음양철학인 주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홍역학(洪易學)」을 창시한 분이다.
야산선사는 酒(술 주)’에 대해 “주역에서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를 술에다 비유한다.
어두운 북쪽을 등지고 밝은 남쪽을 향해 서면 왼편은 해뜨는 동쪽이고 오른편은 해지는 서쪽이 되듯이, 동양은 왼편 양(陽)에, 서양은 오른편 음(陰)에 속한다.
따라서 酒 왼쪽의 ‘?(삼 수)’는 도덕과 철학을 중시하는 동양의 삼교(三敎)인 선불유(仙佛儒)를 말하며, 오른쪽의 ‘酉(술병 유)’는 물질과 과학을 중시하는 서양의 기독교를 이른다.
후천시대를 맞이하려면 술과 술병을 서로 뗄 수 없듯이 동양의 형이상적(道) 세계와 서양의 형이하적(器) 세계가 다 함께 음양조화를 이루되, 반드시 철학이 과학을 이끌고 정신이 물질을 제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였다.
유부음주(有孚飮酒)와 음주유수(飮酒濡首)
천지자연의 우주법칙과 생명질서를 64괘(384효)로써 설명한 주역 마지막 괘는 화수미제이다.
불(火)이 위로 타오르고 물(水)이 아래로 흘러내려 서로 만나지 못하는 미제는 미궁(未窮)·미완(未完)·미래(未來)·미결(未決)을 상징하는데, 그 미제의 마지막 효에는 “믿음을 두고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거니와(有孚于飮酒 无咎) 그 머리까지 취하게 즉 술독에 빠지도록 마시면(濡其首) 믿음을 두는데 옳은 것을 잃으리라(有孚 失是)”고 하였다.
공자는 음주유수(飮酒濡首)가 되는 까닭을 절(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지적하였는데, 술을 마시더라도 적절히 조절하여 마셔야만 미덥게 일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지구촌이 일가(一家)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다 함께 잘살려면 반목질시와 갈등 편당이 없어지고 민생의 근본토대인 경제로부터 정치와 종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완전한 사회, 완전한 시대를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난제는 그 중 종교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이 유불선 삼교나 기타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에 비유된다.
적절히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지만 술독에 빠질 정도로 술을 마시게 되면 종교를 너무 맹신하여 자기 종교만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존재까지 상실하게 된다.
술을 적당히 즐겁게 마시면서 모든 문제를 술술 잘 풀어가도록 해야지 술독에 빠지도록 마셔 정신까지 술술 풀어 가면 안 되는 것이다.
출처: 휴심정 글: 이응문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의 孫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