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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생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글입니다.
[한 계단 한 계단씩 착실하게 ]
나는 1974년에 광주시에서 실시한 5급(현재의 9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1978년에 법원주사보(현재의 7급)시험, 1980년에 법원행정고등고시,
1985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함으로서 대한민국에서 실시하는 공무원시험을 한 직급 한 직급, 단계적으로 모두 합격하였다.
그것도 수험 공부만을 한 것이 아니고 하위 직급에 근무하면서 한 단계 위 직급의 수험공부를 하고,
그 시험에 합격하면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수험공부를 하여 합격하는 방법으로 하였으니 내가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은 일이다.
나는 아직 나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시험을 합격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것은 대한민국 신기록일 것이다.
국가의 봉급을 받는 공무원으로서 일은 하지 않고 책만 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근무 시간 중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와 휴일을 이용해서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시험 준비는 무척이나 어렵고, 길었다. 결혼을 하여 가족을 부양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았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말단 직원도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나는 왜 욕심을 부려 한 단계 올라가는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음 단계의 시험공부를 하느냐?
합격하지도 못 할 것을 쓸데없이 욕심만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낙심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던가 내가 꿈꾸고 마음먹은
시험을 모두 합격하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고등고시를 합격한 사람은 머리가 천재이거나 아주 특별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고,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특별한 교육을 받은 바 없는 아주 평범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멍청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지도 못하였고, 문화 혜택을 받아 본 바도 없으며, 속칭 일류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였다.
중·고등 학생 시절 그 흔한 학원 수강도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그뿐인가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의 필수코스로 생각되는 절 공부 또한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단계의 국가공무원시험을 모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남처럼 살아보겠다」는 포부와「하면 된다」
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운이 좋았을 것이다.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녔다. 윗 사람들을 보면서
한 직급이라도 올라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거의 1년에 한번씩 실시되는 국가직과
지방직 4급 공무원(현재의 7급) 시험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낙방이었다.
물론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수험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정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내집앞쓸기’와 ‘가로환경정비운동’이 벌어져 동사무소 직원들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지금처럼 은행에 자진 납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세 등 각종 공과금을 동사무소 직원들이 직접 받으러 다녔다.
민원 담당 공무원을 제외한 전 직원이 하루에도 몇 바퀴씩 담당 구역을 돌아야 했다.
말이 공무원이지 사실상 노동자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근무하는 충금동은 충장로와 금남로를 관할하는
도심지 동사무소였다. 도심지이기 때문에 자연히 시청 간부 등 높은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고,
유흥업소가 많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더러운 쓰레기를 집 앞 도로에 쌓아 둔 채 늦잠을 잔다.
아무리 쓰레기를 집 앞에 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 앞 청소를 하라고 하여도 우이독경이다.
시청 간부들은 감독을 나와 어디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데 담당 직원이 누구냐고 야단이다. 도리가 없다.
윗 분들에게 욕먹지 않으려면 내가 직접 그 집 앞을 쓸어주는 수밖에……
거의 매일 새벽 5∼6시에 비를 들고 출근하여 동네 청소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런 통에 공부는 어떻게 열심히 할수 있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직장 분위기 자체가 동료 직원이 야간 학교를 다니는 것이나 상위 직급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을 시기하고
상사들은 사무실에서 책보는 것을 노골적으로 꾸지람했다.
책상 서랍에 책을 감춰 놓고 보기도 했고, 밤을 새워가면서 공부해 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4급 공무원 시험도 다섯 번이나 떨어졌다.
나는 15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광주시청에 근무할 때처럼 열심히 일한 적은 없다.
세금 징수 실적이 가장 좋고, 일 잘하는 공무원으로 여러 번 선발되었다.
전국에 근무하는 내무부(현재의 행정자치부)산하 전체 공무원을 상대로 한 소양 고사에서
시골의 말단 공무원이 당당히 1등을 했다. 전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공무원으로 뽑힌 것이다.
그 시험에서 5등을 한 사람까지는 모두 한 직급씩 특진을 하여 즉시 내무부 본부로 발령이 났다.
그렇지만 돈이 없고, 배경 없는 나는,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본부는 고사하고 한 직급도 진급시켜 주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겠지만 슬픈 일이다.
실망에 찬 나날을 보냈다. 내무부까지는 안 보내주더라도 도청이라도 보내 달라고 사정을 해 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나같이 배경 없고, 돈 없는 놈은 공채 시험을 보지 않으면 말단공무원 신세를 면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아무 대책 없이 3년 6개월 동안 다니던 광주시청 공무원 생활을 청산했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받아 마지막 학기 납부금을 내고, 남은 것을 가지고 학교만 다녔다.
드디어 대학생다운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직장을 그만 두고 나니 생활에 리듬이 깨져서 나태해지고 더 공부가 안되었다.
말은‘행정고시 준비를 한다’고 학교 도서관에 나갔지만 ‘4급 공무원시험도 몇 번씩 떨어진
주제에 고등고시는 무슨 고등고시냐?’는 자책감과 그 동안 쌓인 피로 때문인지 책만 들면 잠이 와서
1시간 공부하면 2∼3시간 엎드려 잠을 잤다.
그러는 동안 돈은 떨어지고, 졸업은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했으니 마음이 조급해 졌다.
아무 직장이라도 다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 되었다. 혹시 무슨 시험이 없나? 매일 같이
시험 공고를 주로 하는 서울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법원직시험 공고가 났다. 5급과 4급 공개채용시험이다.
5급은 그런 대로 많이 뽑았지만 4급은 채용 인원이 고작 30명이었다.
시험 과목 또한 거의 사법시험 과목과 같았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나에게는 생소한 과목이었다.
그러나 행정직 공무원 생활에 신물이 난 나에게는 법원직 공무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무조건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5급 공무원을 4년 가까이 하다 그만 두고 다시 5급 공무원 시험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4급 시험을 보기는 보아야겠는데, 뽑는 숫자는 적고 응시자는 많을 것 같았다. 만약 떨어지면 굶어 죽기 십상이다.
응시 원서를 작성할 때 2시간 이상을 망설였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5급을 볼까?’ ‘아니다! 다시 5급 공무원 시험을 볼 수는 없다. 4급을 보자’
실력도 없으면서 4급 법원직에 배짱지원을 했다.
원서를 접수하고 그때서야 서점에 들러 가장 부피가 적은 책을 골라 한달 정도 골방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법원행정고시에 합격하다 ]
4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법원에 들어간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만약 법원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광주시청에 있었거나 다른 직장에 들어갔더라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행정직 공무원과는 달리 법원직 공무원은 시험에 의해서만 승진이 가능하고,
업무 자체가 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법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업무도 처리할 수 없고, 승진을 할 수도 없다.
직장 분위기가 공부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있어도 사무실에서 책 본다고 꾸지람하는 상사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계장만 되면 각자 자기의 고유 업무를 처리하는
‘법원주사’라는 독립 관청이기 때문에 누가 자기 일을 해달라는 사람도 없고, 내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도 없다.
자기가 맡은 일만 충실히 하면 나머지 시간에 공부를 하든지, 잠깐 쉬든지 간섭하지 않는다.
사실 행정부 공무원들이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정말 열심히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업무가 독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노는 사람의 일을 다른 사람이 해야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나 티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일은 하지 않고 상사에게 아부나 하고 상사의 눈치만 잘 살피는 사람이 먼저 승진하는 경우가 있어 불평불만도 있다.
그렇지만 법원은 그런 것이 행정부보다 덜하다.
그런 부분이 나에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 중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사무관 승진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주사보 승진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다. 업무처리를 잘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공부한다고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판사실에 가면 판사님들도 공부하고, 과장실에 가면 과장도 공부하고, 사무실에서는 직원들도 공부를 한다.
법원공무원으로서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근무 명령을 받은 후, 어느 정도 업무파악이 끝나자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법원행정고시 준비를 했다.
시험 과목도 4급 시험과 비슷하고, 응시생도 거의 사법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이라서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1979년도에 첫 시험을 보고 나니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첫 해에는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고 마음가짐도 단단치 못했다.
어떻게 보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4급 공채 시험 동기생들 중 몇 명이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좀더 노력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합격해야겠다’는 각오로 퇴근 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그 다음 해에 있었던 법원행정고시에 다시 응시했다. 내가 생각해 봐도 상당히 잘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역시 낙방이었다.
2번의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니 직원들과 가족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직급도 올라가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무관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직원들이 피서를 가거나
아름다운 단풍구경을 갈 때도 혼자 남아 책과 씨름을 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계속 보아온 책이라 독서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공부도 점점 재미있어 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하지 않던가? 세 번째 도전인 제5회 법원행정고등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같은 시험에서 2번씩이나 떨어진 사람이 3번째 시험에서는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더구나 교육성적이 1등이어서 종합발령순위 1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거의 모든 합격자가 서울 근무를 희망했다. 그래서 성적이 좋은 사람 순으로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
서울지방법원 등 재경 법원에 발령이 났다. 그러나 나는 광주를 희망했다.
“당신은 성적이 가장 좋은데 왜 시골에 가려고 합니까? 내 말 듣고 이 자리에서 희망지를 바꾸시오.
나중에 후회하고 다시 서울 오겠다고 하지 말고…” 사무관 임관을 위한 면접에서 면접관이 하신 말씀이다.
참 친절하고 고마우신 말씀이었다.
그 면접관은 나중에 대법원장을 지내신 법원행정처차장 김덕주씨다.
춘천지방법원에서 원장으로 모셨던 분으로 나를 참 예뻐하신 분이다.
“광주로 가겠습니다.”
면접관님의 호의에 너무나 냉정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고향으로 가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광주가 뭐 그리 좋소?”
“죄송합니다. 노모님이 시골에 혼자 계시니 가까이 가서 모셔야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어머님은 내가 모시고 있을 때라서 어머님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고향 가고 싶은 생각에 어머님 핑계를 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는 꿈에도 그리던 광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두 직급이나 올라간 법원사무관이 되어…….
따져보면 2년 4개월의 짧은 객지 생활이었지만 나에게는 정말 긴 세월이었다.
[사법시험에 뜻을 두다 ]
내가 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구청 총무과장이 가끔 왔다. 아마 동장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오면 직원들은 물론 동장까지도 안절부절이었다. 한 마디로 쩔쩔맸다. 그의 직급은 사무관이다.
그뿐인가. 시청 총무과에 근무할 때도 과장에게 결재를 받으려면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어야 했다.
그도 역시 사무관이다. 그래서 나는 사무관이 대단한 자리인 줄 알았다.
공무원 경력이 3년인 내 월급이 5만원이었을 때, 모시고 있는 계장의 월급이 10만원인 것을 보고
「계장만 되면 세상 살만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계장이 되어 13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니
같은 과에 근무하는 공채 사무관은 대학을 갖 나와 나이도 어리고 근무경력도 짧은데 21만원의 월급을 받는 것이다.
그때 다시「사무관만 되면 인간답게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내가 사무관이 되어 보니, 그것도 26살의 젊은 나이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지 불과 7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월급이야 같은 나이의 공무원 중에서는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호봉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사무관이 되고 보니 가끔 판사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그런데 즐겁게 놀다가도「같이 법원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저 사람들과 같이 놀 수도 있고, 저 사람들이 승진하면 나도 과장도 되고 국장도 되겠지만,
저 사람들이 퇴직하여 변호사를 할 때 나는 사법서사(지금의 법무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하는 생각이
가끔씩 머리를 스쳐갔고, 그때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느 겨울, 내 생일날, 박도영 판사 부부를 초청하여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때 우리 어머님이
“어디 판사 손 한번 잡아봅시다”라고 하면서 박 판사의 손을 잡고 오랫 동안 부러운 듯 만지작거리시는
모습을 보고「아! 나도 판사가 되어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다더니 시골에서 소 뜯기고, 꼴 망태 짊어지고 남의 집 깔담살이(머슴살이)나
해야 마땅한 주제에 법원행정고등고시까지 합격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사법시험준비를 하다니…
다시 공부를 하면 또 아내는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가? 말이 결혼이지 같은 방에서 잠도 자지 못했고,
공부에 지쳐 해쓱한 얼굴색만 내비쳤을 뿐 신혼여행을 가거나, 손잡고 공원에 한번 가보지 못했는데,
사무관이 되어 겨우 살만하니 다시 사법시험공부라니… 아내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운명일 뿐 아니라,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한 여자의 운명이다.
사무관 생활 1년 만에 놓았던 책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매년 1월 1일이 되면 큰 흰 종이를 가져다가 큰 붓글씨로 <사법시험합격>이라고 썼다.
사법시험을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것뿐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 아버님 산소 쪽을 향하여 절을 두 번씩 올리고,
“아버님 아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주문을 외웠다.
아내 또한 매일 아침 깨끗한 정화수를 올렸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모두 연습이다. 지금 하는 공부가 내 인생을 좌우할 것이다.
사법시험 외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말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을 했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컸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 기회도 가끔 생겼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같이 놀자고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도 없다.
가난과 남편 시험 공부 뒷바라지에 지쳐있는 아내를 위로해주지 않을 수도 없다. 아빠로서 귀여운 딸들과 놀아주지 않을 수도 없다.
그때부터는 정말 1인 2역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책을 들고 출근하였고,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도 공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문제였다. 번듯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 좋은 대학을 나왔고, 나이가 나보다 많지만 직급은 나보다 낮은 분들이 많았다.
그 분들 입장에서는 젊은 사무관이 부럽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할텐데, 사법시험 공부를 한다고 까불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이 근무하는 공채 사무관 중에는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비교적 한가한
보직을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전혀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다른 분들과 똑같이 일했다.
아니 오히려 더 힘든 업무를 맡았다. 그러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7급 공무원시험과, 법원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을 합격했다고 하면 직장에서 일은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특혜를 받아본 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바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모범공무원이었다고 자부한다.
내가 모시고 있었던 상사와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이 지금도 거의 시청이나 법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거짓말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세 번의 실패 ]
사법시험에 뜻을 두고 근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뵈었다.
하얀 한복을 입으시고 부채를 드신 아버님은 인자하신 표정으로「너는 합격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년 가까이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린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차를 타고 어디를 갈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일할 때나, 공부할 때나 「너는 합격할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사법시험이 어디 애들 장난인가? 1차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연 3회나 떨어졌다. 제24회, 제25회, 제26회 사법시험을 계속해서 보았지만,
번번이 1차 시험에 떨어져 2차 시험장 한번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한번 떨어질 때는「다음에는 들겠지」, 그 다음에 떨어질 때도「다음에는 들겠지」하면서 자신을 위로해 왔다.
그렇지만, 세 번을 연속 떨어지고 나니 용기가 없어졌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합격하여 잔치를 하는데 떨어진 사람은 쓰린 가슴을 안고 그 축하파티장 부근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이 사무관으로 근무하다 지난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사법연수원의 전반기 연수를 마치고 실무 수습을 위하여 법원으로 올 때였다.
몇 달 전만 하여도 고통을 같이 하며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와 다른 신분이 되어 옛 동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판사들과만 어울려 다녔다. 패배자의 슬픔이란 이런 것인가?
사실 직장에 다니면서 시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법시험은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그것도 일류 대학을 나와 도서관이나 절에서 머리를 싸 메고 해도 될똥말똥 한, 세계에서 제일 어렵다는 시험이 아닌가.
특히 시험을 앞둔 며칠 동안은 모든 것을 잊고 공부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시험은 일요일에 본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는 재판부의 법정은 금요일에 열린다.
일요일에 시험을 봐야할 사람이 이틀 전 금요일에도 법정에 들어가야만 한다. 재판이 일찍 끝나지도 않는다.
재판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독서실로 갈 수도 없다. 부장판사님이 같이 식사하자는 데 거절 할 수도 없다.
따라가면 속 모르는 판사들은 술을 먹였다. 일요일에 시험 볼 사람이 금요일에 하루내내 일하고 술까지 마셔야 하니
미칠 노릇이다. 그래도 직장인이라는 것 때문에 신경질을 낼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러다 보면 밤이 깊어져 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쯤 정신 없이 공부만 할텐데
나는 근무 시간이 지난 늦은 밤까지 시간을 허비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술까지 마셔야 하니…….
집에 가는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며「이래가지고 시험은 무슨 시험이냐? 시험을 포기하든지,
직장을 그만두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눈물을 글썽이며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정답이 없다. 직장을 그만두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시험을 포기하자니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이러치도 저러치도 못한 상태에서 시험을 보면 여지없이 낙방이고 …….
갈등과 방황의 연속이었지만, 해야 한다는 의지만은 굳건히 가졌다. 아내를 설득시키고, 틈만 나면 애들을
안아주면서 시간이 없어서 오래 놀아주지 못해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은 사람들이 두려웠다.「저들은 나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머리가 좋고,
공부할 시간도 많고, 특히 시험 정보에 정통한데, 내가 감히 저들과 경쟁한다는 것이 무리가 아니냐?」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시간이 나면 젊은 수험생들과 같이 놀면서 작은 정보라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인
만큼 법률 문화도 급변하고 있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법률 문제가 튀어나오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젊은 수험생들은
‘그룹스터디’라는 좋은 공부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나이도 많고, 자기들보다 오랜 기간 동안 공부를 한 나를 대접해 준 것 같기도 했지만 1차시험 한번 합격하지도
못한 나를 무시하기도 하였다.
[죽을 때까지 한다 ]
한두 번 떨어질 때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 노력해 보라.”
고 위로도 해주더니 세 번째, 그것도 1차 시험에 연속 떨어지자 직장 동료들이 ‘미친 짓’
이라고 숙덕거리기 시작했고, 같이 공부하는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조선대학 출신이 사법시험은
무슨 사법시험이냐? 사무관시험도 감지덕지 지’라고 비웃었다.
한번은 판사님들을 모시고 현장 검증을 같다오는데 피곤하여 차 속에서 잠깐 졸았다. 모시고 있는 부장판사님이
“이사무관, 피곤하지? 공부하랴 근무하랴 자네도 참 고생이 많네”라고 했다.
피곤하여 조는 나를 보고 위로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무관, 그렇게 공부하여 사법고시가 된 단가?
아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자기가 고시 공부 했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일류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서울법대를 들어갔고, 2학년 때부터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지 몸무게가 50㎏이하로 떨어져 뱀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직장에 근무하면서 사법고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몸만 버리는 일이지 역부족이라는 충고도 해주었다
. 곁에 앉아있던 두 분의 배석판사들도 부장판사의 말에 동의했다. 기분 나쁘고 실망스러운 충고였으나 말은 맞는 말이다.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는 전혀 불만이 없던 아내마저도 지칠 대로 지쳤는지 “이제 그만 하십시오.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도 다 행복하게 사는데 우리는 이 꼴이 뭐요?”라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지쳤다. 더 이상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소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는 50년 간 단 한 명의 고시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하였고, 중학교도
마찬가지이며, 고등학교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 고시 합격자가 나왔다. 대학 역시 옛날에는 괜찮았다던데,
그 근래에는 몇 년 가야 하나씩 합격자가 나오는 형편이었다.
스스로를 이기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직장을 다니면서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을 합격할 수 있겠느냐?」는 자괴감이 나를 압박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참을만했는데,
아내의 실망 어린 말은 내 자신을 너무 불쌍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했는지」 후회스럽기도 했다. 집을 나와 일주일을 방황했다.「포기할까?」
「안되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볼까?」
팔짱을 끼고 걷는 남녀, 술집에서 술 마시는 아저씨, 나보다 직급이 낮은 직장 동료들, 거리를 쓰는
청소부 아저씨, 모두들 행복하게 보였다. 그런데 나만 초라하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만취되어 집에 들어갔다. 아내에게 호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먼저 점잖게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아온 데 대한 감사를 표한 후,
“당신 지금부터 내말 잘 들으시오. 나는 끝까지 하겠소. 50살이 되어도 좋고,
60살이 되어도 좋소. 합격할 때까지 할 것이요. 죽을 때까지 할 것이요. 그것이 못마땅하면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시오.
내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다가 죽으면, 내 비석에「이 사람은 평생 사법시험 공부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애석하게 죽었다.」
고 써주시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분명히 그와 같이 말해주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책보따리를 들고 법원 앞에 있는 독서실로 갔다. 독방을 하나 얻어 틀어박혔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자면서 집과 아내와 가족을 포기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아내는 자기 길을 가지 않고 매일 도시락 세 개씩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부터 1년은 정말 긴 기간이었다. 밥도 독서실에서 먹고, 세수도 독서실에서 하고, 잠도 독서실에서 잤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2평짜리 골방에 틀어박혀 오직 사법시험만 생각하였다.
때로는 아내와 같이 자고싶기도 하고, 아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인생을 건 도박판에서 헛눈을 팔 수 없다.
먼저, 1차 시험에 3번씩이나 떨어진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외국어였다.
대학 예비고사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좋았던 나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으니
40점 대를 넘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젊고, 일류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겠지만 영어가 다른 외국어에 비하여 어렵고,
점수가 잘 안나오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영어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불쌍한 지방대학 출신들은 영어 외에는 제2외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영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합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어가 아무리 어렵게 출제된다고 해도 처음 사법시험을 볼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점수가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의 영어 성적은 어렵게 과락을 면할 정도였다. 다시 영어를 선택하면 실패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쫓기는 시간에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영어공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기왕에 망하는 것 외국어를 바꾸기로 독심을 먹었다. 서점으로 갔다. 외국어 기출문제집을 모두 구했다.
그리고 혼자 시험을 보았다. 고등학교 때 조금 공부한 독일어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문자들 앞에
앉아 프랑스어 시험도, 서반아어 시험도, 중국어 시험도 보았다.
그 중에서 점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과목을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영락없이 미친 짓이다.
다른 과목은 전혀 모르겠는데 그래도 중국어는 아는 한자가 있어서 가뭄에 콩 나듯이 답을 맞추는 경우도 있었고,
어쩐지 친근감이 들었다.
“아! 이것이다. 중국어를 선택하자!”
서점으로 다시 달려갔다. 서점에 있는 중국어 교재를 모두 샀다.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생소한 중국어였기 때문에 교재라고 해봐야 고등학교 교과서와 대학교재 몇 권뿐이었고, KBS(지금은EBS)방송교재 정도였다.
그때부터 하루에 2시간씩 중국어 공부를 했다. 15분씩 하는 라디오 교육방송도 들었다.
매일 하는 교육방송을 시간을 맞추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아내가 녹음을 해두었다가
저녁에 도시락을 가져올 때 그 테이프를 가져다주었다. 잠자기 전에 반드시 그 테이프를 듣고 잠을 잤다.
독학으로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교육방송이 큰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1차 시험에 합격하다 ]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건만 나에게는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감각이 없었다.
추우면 이불을 덮고, 더우면 옷을 벗었을 뿐이었다. 난방 시설도 되어 있지 않는 독서실에서 겨울을 보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잠잘 곳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가족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따뜻한 집과 가족을 두고서도 내 스스로 사서하는 고생이다.
그렇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생겨 미칠 것만 같았다.
법원 구내를 열댓 바퀴 돌아도 보고, 옥상에 올라가 아버님께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로움을 이기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1차 시험을 보는 일요일, 아내와 친형보다 더 잘해주는 존경하는 이재강과장이 독서실로 차(車)를 가지고 왔다.
준비하는 단 1분의 시간이 아까워 아내에게 가방을 챙기도록 하고 나는 책만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쁜 시간에 두 분이 방 청소를 하였다. 시험을 보고 와서 해도 늦지 않을텐데 무슨 이유로 이 바쁜
시간에 청소를 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모르는척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분들은 그 날 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내가 물 컵을 치우다가 거울에 떨쳐버려 ‘와장창’하면서 거울과 컵이 한꺼번에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시험 보는 날 아침에 거울이 깨져 산산조각이 났으니 아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형님은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재수 없이 시험 보는 날 아침에 거울이 깨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내가 눈치챌까봐 형님은 몸으로 나를 가리면서 나에게 말을 걸고, 아내는 조심조심 청소를 했다고 한다.
2평짜리 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는 전혀 모르고 공부만 하더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 날 시험은 망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1차 시험이 끝나자 더 이상은 독서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피로가 쌓였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밀린 일도 해야하고,
가족들도 보고 싶었다. 집에 들어갔다.
1차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1차 시험에서 3번씩이나 떨어지고
나니 1차 시험 결과를 보지 않고는 2차 시험 준비를 할 생각마저 달아나 버렸다.
더구나 같이 시험을 본 다른 사무관들과 서로 답안지를 맞춰본 결과 내가 가장 점수가 낮았다.
선택 과목인 외국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맞춰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또 떨어질 것 같았다. 2차 시험을 준비할 용기를 잃은 것이다.
1차 시험은 외국어가 당락을 결정하는데 나는 생전 처음 공부한, 그것도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이
독학으로 공부한 중국어를 선택하였으니 중국어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다는 것도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마음이 괴로우면 술을 가까이 하는지, 평소 잘먹지도 않던 술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내보기가 미안하여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하여 밤 1시경에 집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또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고, 시험도 떨어진 주제에 술까지 취하여 늦게 들어가는 것이 미안하여 아내에게 주려고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옥수수 몇 개를 사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술을 마시고 들어오세요”
아내였다. 그러나 평소에 듣지 못하던 상냥한 목소리다.
“미안해요. 다음부턴 술 안 마시고 일찍 들어 올께.”
“아니에요. 당신이 최고예요. 당신은 해냈어요”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한 마디쯤은 했을 아내가 오늘따라 유별나게 아양을 떠니 더욱 불안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야?”
“당신 합격했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합격자 발표 날짜도 아직 멀었는데 누가 그런 소릴해?”
“정말이래요. 김병대 교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분명히 합격자 명단에 당신 이름이 있데요.”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재강이 형님과 형수씨가 와 계셨다.
“축하하네”
“축하해요.”
“무슨 장난들을 이렇게 심하게 하십니까?”
“그러면 자네가 직접 김병대 교수님께 전화해 보소.”
재강이 형님 부부는 정말 좋으신 분들이다. 충금동 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했던 형님인데 사실 친형보다 더 친하다.
형님도 합격자 발표 날이 가까워지자 불안하여 우리 집에 오셨다가 김 교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자기들 일처럼 기뻐해 주신 것이다.
김병대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김병대 교수님은 대학 은사님인데 다른 대학으로 옮기셔서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한 처지였다.
교수님은 그 해 사법시험위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나를 매우 아껴주신 선생님이라 내가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법시험을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합격자 사정을 끝내고 명단을 확인해 보셨다고 한다.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해주신 것이다.
제자가 합격하였으니 기쁘기도 하셨겠지만, 하루라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발표 2일전에 살짝 알려 주신 것이다.
술이 확 깨고 가슴까지 울렁거렸다. 그때부터 2차 시험까지는 꼭 2주일 남았다. 시간이 없다.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독서실로 달렸다. 아내와 형님 부부는 황당했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독서실에 도착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술김에 밤새 책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이 되니 눈이 침침해지고 책이 보이지 않았다. 세수를 하고 와도,
수건으로 눈을 닦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눈이 까실까실 하기도 하고 아프기까지 하여
도저히 책을 볼 수가 없었다. 약국에 갔다. 약사가 조제해 주는 약을 먹고 10분쯤 지나자 이번에는 견딜 수 없도록 배가 아파 왔다.
아마 빨리 낫게 하려고 너무 고단위 처방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이다! 시험은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몸이 아프니 어쩌란 말이냐! 그 귀중한 시간에 4∼5일을 뒹굴기만 하였다.
어디서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독서실 할아버지가 찾아오셨다.
그 분은 교장선생님 출신으로 정년 퇴직을 하고 독서실을 운영하는데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시던 분이다.
배가 아픈 연유를 들으시더니 무슨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서 염소똥 같은 푸른 것을 조금 잘라 물에 타주셨다.
그리고 그만큼을 다시 잘라주면서 저녁에 한번 더 먹으라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것을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했다. 그 약이 무슨 약인지 몰라도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마당 앞 채전에 꽃이 아주 아름다운 꽃나무 몇 그루를 심으셨다.
그 꽃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한 그루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뽑아냈다.
열매가 열리면 예리한 대나무 꼬챙이로 열매에 상처를 내고 그 밑에 빈 소라껍질을 받쳐두었다.
그리고 그 꽃나무에서 나온 액체가 소라껍질에 고여 굳으면, 아무도 모르게 문지방에 올려두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 약을 매우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셨는데 우리 식구들은 그 약을 써본 경험이 없다.
다만 1년에 한두 번씩 동네 아주머니들이 죽을 상을 하고 와서 「가슴의 피」
(나는 그 병이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걸린 부인이 온방을 뒹굴며 울부짖는 것을 본적은 있다)를 호소하면
아버지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시다가 어쩔 수 없이 조금, 아주 조금을 물에 타주셨다. 그 후 얼마 안 있으면
그 아주머니는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후에 법원에 근무할 때 나는 그것이 “양귀비”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살던 시골은 의료시설이 전혀 없었다. 교통이 불편했다.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다녔다.
병이 나면 70리나 떨어진 해남읍이나, 목포로 가야 했다. 돈까지 없는 벽촌이다.
병이 나면 재래적인 민간요법을 쓰는 외에 별 다른 방법이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사먹는 일은 없었다.
그런 벽지에서 급할 때 쓰시려고 아버지는 그 꽃나무를 한 그루씩 길렀는가 보다.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것이 양귀비인 줄을 몰랐고, 그 약을 얻어먹은 아주머니들마저도
그저 신기한 약을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다는 것만 알지 그것이 무엇인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그런 약의 필요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법원에 근무할 때 시골 분들이 그
꽃나무를 기르다 처벌을 받은것을 보았다.
독서실 할아버지가 준 약이 그 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독서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준 약은 양귀비가 아니고 웅담이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행운의 여신이! ]
시험 날짜가 너무 임박한 관계로 가슴만 떨렸지,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과목도 한두 과목이 아닌 8과목이고,
한 과목당 책이 한두 권인 것도 아니고, 한 권의 책이 1∼2백 페이지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전해부터 새로 2차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국민윤리’라는 과목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조차 몰랐다.
「올해는 최선을 다하기만 하고, 안 되면 내년에 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3번이나 떨어진
1차 시험에 합격한 것만도 다행이다. 내년에는 1차 시험이 면제되니 한결 부담이 적을 것이다 라고 자위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 않는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루에 읽는 책의 양은 정해져 있어
8과목의 책을 한번씩도 제대로 못 읽고 시험 날을 맞았다. 스스로 합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은 편했다.
“지금까지는 1차 시험에 떨어져 2차 시험장 한번 구경하지 못했으니 올해는 시험장 구경만 하고 내년에는 1차 시험이 면제되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내를 위로하였다.
사실 나처럼 나이 먹고 오랫 동안 공부한 사람은 논술형 2차 시험보다 객관식인 1차 시험이 오히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시험을 이틀 남겨놓고 서울로 떠났다. 아내와 동행이다. 어머님께는 시험 보러간다고 큰절을 올렸지만,
우리 부부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지금까지 신혼 여행은 고사하고 부부가 외식 한번 제대로 못했으니
하루치 2과목만 보고 나머지 시험 기간 4일은 설악산에서 해운대까지 동해안 관광을 하기로 약속했다.
「어차피 떨어질 시험, 헛 고생하면 무엇 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돈도 상당히 준비했다. 시험 보러간다고 하니 처가와 직장 동료들이 다소의 경비를 마련해 주었다.
서울에 올라가 수험생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급 호텔인 하이얏트호텔을 찾았다.
한번도 고급스런 호텔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 호텔에는 빈 방이 없었다. 그보다 격이 떨어진
그 옆의 타워호텔에 방을 정하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결혼한 지
몇 년만에 처음으로-아내와 단둘이-생전 처음 호텔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아내와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말리지는 않으셨지만 ‘과거 보러 간단 놈이 재수 없게 여자는 무슨 여자냐’
는 듯이 뻔히 쳐다보시던 어머니 얼굴이 스쳐갔다.
단 하루를 보고 가더라도 시험은 시험인데 책을 봐야겠기에 아내더러 쉬라고 하고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 역시 기분이 좋았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아내는 정말로 여행을 온 것으로 착각했는지
공부하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밤이 되자 아내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밥 먹을 생각도 없었다. 아내를 혼자 보내고 계속 책을 보았다.
자기 혼자 먹기가 미안했던지 아내는 음식을 싸들고 호텔로 왔다. 잠 한숨 자지 않고 책을 보았다.
처음 보는 국민윤리 과목에 불안을 느껴 최소한 한번은 읽고 시험장에 가야한다는 기본 양심에서였다.
시험 날 아침이 되어 아내가 미리 잡아놓은 택시를 타고 시험장인 동국대학교에 들어갔다. 첫 시간이
‘국민윤리’ 시험이다. 처음 보는 과목이라 가슴만 조이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어떤 유형으로 나올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가 적힌 두루마리가 쫙 펼쳐지는 순간,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원효사상을 논하라」
이것이 50점 짜리 첫 문제다. 나는 몇 년 전 어느 절에서 불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떠나 한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 나오니 가슴이 벅찼다.
그럭저럭 국민윤리 한 과목 시험을 마치고 점심 시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험장을 나갔지만
나는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1분이 어디냐? 최선을 다하자」
점심을 굶고 책상에 그대로 앉아 오후에 볼 헌법 과목을 공부했다. 한 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이 급하다보니
800페이지나 되는 책 한권을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오후 시험까지 무사히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아무 말도 없이 책만 보고 있었다. 아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행가지 않느냐는 눈치였다. 그러나 차마 말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늘 시험은 그런 대로 보지 않았느냐? 내일까지만 보자」고 마음먹었다.
아내는 안중에도 없이 밥 한 수저 먹지 않고 물만 마셨다. 1분도 자지 않고 다음날 시험 볼 2과목의 책을 빠른 속도로 읽어나갔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시험장에 간 남편이 걱정이 되었는지 그 다음날 아내는 점심을 싸들고 시험장까지 들어왔다.
그때 우리 시험장에는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공부한 김전근 사무관과 이재주 사무관이 같이 있었다.
아내는 우리의 입맛에 맞는 점심을 주려고 전라도 사람이 하는 식당까지 찾아가 한식으로 도시락 3개를 싸다가
나와 두 분에게 하나씩 주었다.
그분들은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아니 젓가락 들 시간이 없었다.
“식사 좀 하세요.”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밥 먹기를 청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사물이 보이지도 않고,
주위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책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역시 시험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여 어제와 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아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다음날 볼 2과목의 책을 읽을 뿐이다.
그 다음날 점심시간에도 아내는 역시 3개의 도시락을 준비해 왔다. 그분들은 먹었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는 것도 아니요, 아내와 싸운 것도 아니고, 도시락의 내용이 나빠서도 아니다. 오직 1분 1초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4일간을 버텼다.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한끼만 굶어도 미치게 배가
고프고 하루 저녁만 잠을 못 자도 견딜 수 없도록 잠이 온다. 그런데, 4일간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단 한숨의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머리는 맑고, 피곤한 줄도 몰랐다.
마지막 시험 시간이 되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떨어져 볼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왼손으로 쓰기도 하고 주먹으로 볼펜을 잡기도 하면서 한자 한자를 써내려갔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얼굴이 몇 번이고 스쳤다. 인자하신 미소를 머금고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셨다.
“아버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아버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수십 번 중얼거리면서 답안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시험 종료 벨소리를 들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나를 걱정스러운 듯 안아주는 아내에게 4일만에 처음으로 웃음으로 응대했다.
교실을 나오자마자 잔디밭에 덥석 누워 몇 시간을 잤다. 옆에 있는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고 …….
잠에서 깨니 배가 고팠다. 목도 말랐다. 식당으로 가서 생전 밥 구경 못한 사람처럼 원 없이 먹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여행을 간다고 따라왔던 아내는 고생만 하고 아무 재미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기차를 타고 들녘을 달리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지금부터라도 아내와 여행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내일은 다시 출근해야된다.
한참을 달려오다 아내에게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시험 합격하면 어쩔까? “
“합격하면 좋지요.”
아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와의 시선을 피하여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웃기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들었는가 보다.
「사법시험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시오?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합격하게?」하면서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험보고 나서 잘 보았다는 사람 치고 합격하는 사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했다. 불과 며칠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했다.
그렇게 나의 사법시험 공부는 끝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돌아오니 불안감이 들었다.
시험에 나온 문제를 책에서 찾아보니 내가 쓴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욕심이지, 무슨 사법시험을 한번 봐서,
그것도 단 며칠만에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시작하자」 그 날로 다시 독서실에 들어갔다.
그 후 합격자 발표가 있기까지 45일 정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 다음 해의 시험을 위하여,
지난번 시험 볼 때와 같은 각오로…
합격자 발표 날짜가 가까워지자 주위에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자주 물었다. “떨어졌습니다. 내년에 다시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보통의 경우 합격자 발표 이틀 전쯤이면 대충 결과를 알 수 있다.
고시 잡지사에서 미리 합격자 명단을 입수해 놓기 때문에 잡지사에 전화만 하면 알려준다.
합격 여부를 알아보라는 직원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김전근 사무관과 이재주 사무관은 떨어졌다고 하더라. 이승채 사무관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고 직원들이 속닥거렸다.
「그분들이 떨어졌으면 나도 떨어졌겠지 뭐, 떨어진 걸 알아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라고 마음을 정리하였다.
마음은 그렇게 먹고 있어도 사무실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은 어색했다. 일찍 나가버리려고 책상을 정리하는데,
무슨 카메라가 와서 나를 찍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이승채씨 아니에요?”
“맞습니다만”
“모르고 계셨어요? 합격했습니다.”
하늘을 날아갈 것같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들었다.
“어머님, 합격했습니다. 해내고 말았습니다.”
“뭐야?”
다음 말을 잇지 못하시는 어머니와 그 옆에 있던 아내는 울기만 했다.
그 다음날 13개 중앙지와 지방지에「화제의 인물」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사법시험 합격에 관한 박스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연합통신 광주지사에 근무하던 조광흠기자가 썼다. 기사를 써주신 조광흠기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MBC광주문화방송에 출연하여 10분 동안 인터뷰를 했다. 이문석 PD 선생님(지금은 광주문화방송 총무국장)과
진행을 받았던 김형주 아나운서님(지금은 광주문화방송 편성국장), 촬영을 해 주신 이상묵 국장님께도 감사드린다.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다 ]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일로부터 사법연수원 입교까지 4개월 동안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합니다.”라고 칭찬해 주었고, 친척들은 물론 직장 동료들도 전과 다른 대접을 해주었다.
시내 다방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나의 사법시험 합격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느 날, 금남로에 있는 신양다방에를 갔다. 나이드신 어른들이 몇 사람 앉아 계셨다. 그 중 한 분이
“어떤 놈은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혼자 학교를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눈물겹도록 공부하여 고시를 합격하였다는데,
우리아들놈은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결혼시켜주었더니 날마다 하는 소리가 ‘아버지가 나에게 뭘 해주었느냐?’
면서 돈만 주라고 한다.”고 신세타령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입교하는 날 아내와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연수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사실 우리 어머니는 말씀을 잘 안 하셔서 그렇지 속이 참 깊으신 분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표정을 바꾸시지는 않지만 가끔 내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얼굴을 쳐다보시는 분이시다.
그 날도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셨다.
어머니의 말없는 행동 속엔 ‘건강하거라’,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법조인이 되거라’는 등 여러 가지 주문이 들어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한가? 서로의 눈빛만 보면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지.
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벽에 부딪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법연수원 내의 경쟁은 참으로 치열하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야 판사나 검사로 임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경쟁은 그래도 할만한 사람들끼리의 경쟁이지만, 사법연수원은 사법시험 합격자들끼리의 경쟁이니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인 것이다.
나는 판사, 검사를 하고 싶어서 사법시험을 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변호사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낙제만 하지 않으면 변호사자격은 주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입교하고 나니 출신학교 별로 따로 모여 그룹 스터디를 하고, 세미나도 하는데 나는 어디 낄 데가 없었다.
겉으로는「죽자살자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해 놓고, 연수원에 들어와 또 죽자살자 공부하느냐?」며
외도토리 신세를 자위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일류학교를 선호하는가 보다.
연수기간 동안 나는 공부보다는 사람을 많이 사귀려고 노력했고, 그 중에서도 고향이 다른 경상도,
충청도, 서울 사람들과 가까이 하려고 했다. 또한,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하느라고 읽지 못했던 책도 많이 읽었다.
사법연수원의 교육 과정은 별로 힘든 것은 아니다. 1학년 때는 국가5급(사무관) 월급을 주고,
2학년 때는 4급(서기관)월급을 주며, 시설도 어느 교육기관에 못지 않게 훌륭하다. 지방 사람들을 위하여 기숙사도 있다.
서울에 기거할 곳이 없어 기숙사에 들어갔다. 최재경 검사와 최원길 변호사가 룸메이트였다.
그분들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상당히 어렸다.
밥은 식당에서 사먹고 잠만 기숙사에서 잤다. 그분들은 서울대와 고려대 출신들과 그룹스터디를 한 후,
술 한잔씩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대화할 기회도 많지 않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와는 별로 놀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이 차이가 많아서 그런 것으로 알았고, 나 자신도 어린 사람들과 조잘거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내 할 일만 했다.
나는 다른 데 갈곳이 없기 때문에 오후 5시경 방에 들어와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다.
내 것은 물론 그 분들이 벗어놓은 양말이며, 와이샤스며, 심지어는 속옷까지 빨아 널어놓곤 했다.
그들은 아침에 깨끗이 빨아진 양말을 신고 가면서도 “누가 빨았느냐”고 묻거나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갔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그런가?」생각도 해보았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까? 볼 일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조금 늦게 들어왔는데 방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내가 벗어놓은 양말도 널려있었다. 별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형님! 우리, 술 한잔 하러갑시다.” 최원길씨의 말이다.
“좋습니다. 좋은 일 있소?”
“형님!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되니 사귀지 말라’
고 하셨는데, 전라도 사람 중에도 형님처럼 좋은 사람도 있네요” 최재경씨의 겸연쩍은 인사다.
“뭐라고요?”
우리는 그 날 저녁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 그리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벽을 허무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도 하였다.
그 후 우리는 친형제처럼 잘 지냈고, 지금도 서로 의좋게 지내고 있다.
사귀어 보기도 전에 전라도 사람에 대해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며, 더구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런 사고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영�3꼭?화합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서로가 그런 언행은 삼가야 할 것이다.
7년 이상 법원에 근무한 나에게 연수 내용 자체는 힘드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10개월 간의 전반기 교육을 마친 후
광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시보로서 실제 수사 업무에 종사했다. 나에게 배당된 사건은
물론, 지도부장께서 담당하신 사건의 일부도 처리해 주었다.
검사시보를 하는 기간 중 특별히 추억에 남는 일은 없지만, 13건의 구속 사건을 처리하였는데,
피해자와 합의가 안되어 어쩔 수 없는 1건을 제외한 12건의 피의자를 모두 ‘무혐의’,‘기소유예’,
‘구약식기소‘를 하고 석방했다. 구속 기소했던 1건도 나중에 합의가 되어 보석을 청구하자 판사에게
‘석방하심이 타당합니다.’라는 의견서를 보냈다. 그랬더니 차장 검사님의 즉각적인 호출이 있었다.
“이승채 시보, 자네 검사자질이 없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처리하는 사건을 유심히 보았는데 13건 중 12건을 석방하고, 1건 마저 석방함이 타당하다니 이게 무슨 검사인가?”
“예. 저는 검사자질이 없습니다. 막상 피의자를 조사해보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고, 한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다고 하는데 딱하지 않습니까? 말이 교도소지 그곳에 간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차장 검사님은 하도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다른 말은 안 하셨다.
“그래, 이리 앉아 차나 한 잔 하고 가소. 검사지망 할 생각은 없는가?”
“예. 솔직히 저는 검사할 자신이 없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벌해야 하는데 포승줄에 묶여오는 피의자만 보면
측은한 생각부터 드니 어떻게 검사를 하겠습니까?”
그때의 차장 검사님은 지금 법무부장관으로 계시는 김정길씨였다. 고등학교 선배님으로 나를 매우 아껴주시는 분이다.
당신 생각으로는 은근히 내가 검찰 쪽으로 오기를 바라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는 검사를 누가 권한다고
지망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시보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변호사 시보 기간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이형년 변호사님의 사무소에서
변호사 실무를 했는데, 그분은 천성적으로 심성이 좋고, 낙천적인 분으로 평소 내가 존경하는 분이셨다.
특별히 지도해 주시는 것은 없지만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어려운 연수생에게 용돈까지 주셨다.
나는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분 입장에서는 얼마 안 되는 돈이었을지 모르지만 연수생에게는 굉장한 돈이었다
. 그분으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아내에게 옷도 한 벌 사주고, 외식도 시켜 주었다.
거의 모든 연수생이 법원과 검찰실무는 열심히 해도 변호사 실무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변호사 실무가 끝나자마자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곧바로 후기 시험을 봐야하기 때문에
2개월 간의 변호사 실무수습기간 중 한 달만 연수를 하거나 아예 지도 변호사에게 인사만 하고 공부한다고
서울에 올라가 버리는 사람이 많다.
지도 변호사도 연수생이 있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분이 있어 사실 변호사 연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 나는 2개월의 변호사 연수기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출근하여 소장도 쓰고, 준비서면도 쓰고, 답변서도 쓰고,
당사자 면담도 하는 등 정작 내가 변호사 인 것처럼 일했다.
12월 1일부터 연수원 후기시험을 보는데, 11월 30일 토요일 오전 근무까지 했으니 아마 동기 연수생 중
변호사 실무를 나보다 열심히 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되지 않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내가 변호사 개업을 할 때 광주에서 가장 유명했던
그분과 합동사무소를 운영하는 영광을 얻었다. ㅇ연수원 후기시험 중 민사실무시험에서는 2개월 동안 직접 사건을
처리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을 때도 전혀 당황할 것이 없었다.
후기 시험을 마치자마자 판사나 검사로 임관될 것은 생각도 못하고 광주에 내려와 이형년 변호사님이 계시는
삼호센타 건물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얻었다. 집기를 마련하는 등 변호사 개업준비를 완벽하게 해두었다.
기왕에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사법시험을 보았고, 낙제할 정도로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머뭇거림이 없이 하루라도
빨리 개업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내가 원한다고 임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법시험 성적이 꼴찌에 가까울 뿐 아니라 연수원에서도 젊고,
일류 대학 나온 사람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단 하루라도 판사 어머니란 말을 들어보고 죽자.”는 어머니와 “기왕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면 판사를 해야지
처음부터 변호사가 무엇이냐?”고 나무라는 장인 장모님께 “성적이 안 좋아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라는 말로 그분들을 설득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사법연수원을 우등으로 수료하게 된 것이다. 사법연수원 우등수료자 명단이 법률신문에 게재되어
그것을 본 아내가 시어머니와 친정부모에게 고해바쳐 내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 계신 부모님들의 소망을 져버려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판사를 지망했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판사를 하면서 좋은 경험과 많은 공부를 하였다.
[판사가 되다 ]
내가 판사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10세(만 9세)에 입학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동창생들은 대부분 동생과 나이가 같다.
초등학교를 입학할 나이가 되어 동네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으나 다른 사람은 입학을 하고 오는데 나는 그냥 돌아왔다.
그 다음 해에 나보다 한살 아래 아이들과 같이 학교에 입학하러갔다.
그렇지만 역시 입학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왜 학교에 보내주지 않느냐?”
고 울고불고 사정을 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을 잡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사정이나 알면 섭섭하지나 않을텐데, 사정을 모르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는 학교를 아예 못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학교를 안 보내려고 그러신 줄로만 알았다.
10살이 되던 해에야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네친구들은 3학년인데 나는 1학년이다.
그래도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내가 크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늦게 학교에 다닌 것이 부끄럽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왜 어머니가 입학하러 갔다가 2번씩이나 그냥 돌아왔는지를 몰랐다.
나의 대학 졸업식장에도 어머니는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 대학졸업식에서 사각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을 보시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많이 보내지 못할 것 같고, 어차피 열댓 살 먹으면 남의 집
깔담살이(소를 먹이는 머슴)를 보내야겠는데, 그렇다고 아들을 까막눈 만들어 놓을 수도 없어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보내야 되겠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학교를 보내놓으면 이름자도 쓰지 못할것 같아 최대한 늦게 학교를 보내려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보내놓고 보니 공부를 잘해서 ‘1년만 더 보내자, 1년만 더 보내자.’
한 것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다는데 학교 늦게 보낸 부모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동네에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생이 남녀 합하여 18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 중학교를 진학한 여학생은 한사람도 없고
, 남학생들 중에서도 나와 손원식, 정영기라는 친구 셋만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부끄러운 일인지, 자랑스런 일인지는 몰라도 나는 우리 마을이 배출한 두 번째 대학생이다.
지금은 모두 나름대로 잘 살고 있지만, 내 친구 중에는 남의 집 머슴 살이를 한 사람, 서울에 가서 구두닦이를 한 사람,
목욕탕 때밀이를 한 사람, 짜장면 집 종업원을 한 사람이 많고 공무원 생활을 하거나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닌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은 “너, 커서 면사무소 소사(급사)라도 해먹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는 면사무소 소사를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서중학교에 시험을 보러간다니까 우리집 밑에 사는 손성만이라는 사람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너의 집 형편에 무슨 중학교를 간다는 것이냐?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한 것 때문에
나는 당시 30이 넘은 그 사람과 몽둥이를 들고 몇 시간을 싸운 적이 있지만, 말인즉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판사가 되리라고는 나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은 물론,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형제, 일가 친척들, 사랑하는 아내,
처가식구들,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어렸을 때 꿈이 대통령 아닌 사람 없고, 판사 아닌 사람 없다지만,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꿈을 꿔본 적은 없다.
어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다시 한 단계 높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고,
다시 한 단계 높은
시험에 합격하곤 하여 사법시험까지 합격하기는 하였지만 사실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일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냥 판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면접시험에서 2번씩이나 혼이 났다.
그 첫 번째는 사법시험의 면접시험이다. ‘2차 시험만 합격하면 면접시험은 형식적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5공 시절에는 2차 시험 합격자를 조금 많이 뽑아놓고, 학교 다닐 때 시위에 가담하거나,
가족의 사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3차 면접시험에서 걸러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성적순으로 뒤에서부터 잘라버렸다.
우리 동기생들은 2차 시험에서 308명이 합격하여 298명이 최종적으로 합격했다. 10명이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온 동네사람들을 불러다 잔치까지 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져 창피를 당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수험 번호순으로 들어가서 면접시험을 보았다. 내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2∼3분, 길어야 5분 정도 있다가 나왔는데,
나는 보내 주질 않는 것이다. 신상에 관한 것은 단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두 분의 면접관이(한 분은 대학교수이고,
한 분은 현직 부장판사였다)번갈아 가면서 학술적인 질문을 계속했다. 거침없이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대답을 잘 했다. 민법에 관해서 물어보다, 상법에 관해서 물어보고, 헌법도 물어보고, 형법도 물어보고,
소송법도 물어보고, 약 30분간을 잡아놓고 별 것을 다 질문하였다. ‘그래도 법원 밥을 7년이나 먹었는데,
면접관 앞에서 벌벌 떨 내가 아니다.’는 배짱으로 임했다.
한참을 묻던 두 분의 면접관은 서로 이마를 맞대고 한참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제는 전번의 질문보다 훨씬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 중에는 보통 학생들은 알기 어려운, 법률 전문가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었다. 어떻게 되었던 10년 이상 법학 공부를 하였고, 집중적인 공부를 못하여
시험은 늦게 합격하였지만 법원사무관으로서 실무도 익힌 터라 아는 데까지 대답했다.
“이승채씨! 공부 참 많이 했네, 수고했어요.”
면접관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자, 웅성거리고 서있던 수험생들이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물어봅디까?”라고 물었다.
“학문적인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 대답했더니, 그 중에 누군가가 “이승채씨는 위험해요. 성적이 나쁜 모양입니다.”
라고 겁난 소리를 했다.
계속된 그 사람의 이야기는 사정권에 걸린 사람은 합격시킬 것인가? 불합격시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심하게 물어본다는 것이다. 자기는 작년에 커트라인에 걸려 면접에서 혼나고 떨어진 후 올해
다시 합격했다고 했다. 올해는 별로 안 물어 보는 것으로 보아 자기는 성적이 좋은 것 같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현기증이 났다. 즉시 총무처 고시과로 달려가 내 성적을 좀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합격자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정확한 성적을 알려줄 수 없다면서 “성적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합격선에는 들것 같습니다.”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때부터 최종 합격자 발표시까지 그것 때문에 혼자서 애를 많이 태웠다. 합격자 발표 후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을 열람해본 결과 내 성적은 꼴찌에서 몇 번째 안되었다.
또 한번은, 판사 임관을 위한 마지막 면접이다. 판사 임관을 위한 면접이야 이미 내 발령순위를 알고 있었고,
공무원 생활을 오래했으니 신원조회에 걸릴 것도 없고, 사상 관계는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흠잡을 것이 없었다.
사법시험 성적은 1등이나 꼴등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연수원 성적은 상위권과 하위권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발령 순위를 정하는데는 연수원 성적이 크게 작용한다.
비록 사법시험 성적은 꼴찌에 가깝지만 사법연수원을 우등으로 수료했기 때문에 나의 발령순위는 16위였다.
아무리 판사임용을 적게 한다고 해도 1년에 30명 이상은 함므로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 자리에 나를 앉혀놓은 5명의 면접관은 아무 말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참 이상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러니 시험의 신뢰도를 믿을 수가 있는가?”라고 서로 이상하다는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분들이야 나를 모르겠지만, 모두 법원의 고위직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들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뭐가 잘못된 게 있습니까? 뭐가 이상합니까?”라고 오히려 면접관에게 먼저 물었다.
“이승채씨! 참 이상합니다. 당신은 판사 지망생 중 사법시험성적은 꼴등인데, 사법연수원성적은 1등이니,
사법시험 꼴등짜리가 어떻게 연수원성적이 이렇게 좋습니까?”
그럼 내가 사법연수원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말인가?
“네, 그것은 제가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책을 보지 못하여 사법시험 성적이 나쁩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면접관들은 이해가 간 모양이다.
“네, 알겠습니다. 어느 직장에 있었습니까?”
“법원에 있었습니다.”
“사무관으로? 고생 많이 하셨구먼, 훌륭한 법관이 되십시오.”
이렇게 하여 나는 법관이 되었다. 그 고비 고비가 쉽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수월하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출처] 판사가 되다 |작성자 이승채
첫댓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소설 읽듯이 재밌게 읽었고 많이 반성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