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남겨둔 제육볶음을 데워서 바께트 빵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제육볶음과 바께트 둘은 별로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빵에 제육 볶음을 올려 함께 먹으니 목이 막힌다. 뜨거운 물이 필요하다. 커피포트도 망가져 있고 한국 학생이 기증했다는 1인용 전기 밥솥도 망가져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 저녁 순례자 중에 한분이 전기 포트로 달걀을 삶는 것을 보았는데 무리하게 작동을 시켜 망가뜨렸나보다. 전자레인지로 물을 끓여서 자판기 커피와 함께 마셨다.
동키로 보낼 배낭을 현관에 내놓고 들어 오는데 한국 젊은여자애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어제 우리에게 삿대질하던 그 여자와 뭐라뭐라 영어로 말다툼을 한다. 이 여자가 아침에 우리 얼굴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스타에 올리면서 택시를 타고 부르고스에 들어 와서 공립 알베르게 침대를 차지한~~~라고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얼굴을 지우라고 항의 했다고 한다. 나도 짧은 영어로 거들었다. "택시를 타고 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우리 그룹이 아니다. 우리 세명이 택시를 타고 왔을 뿐이다."라고 겨우 해명을 했다. 바오로씨가 소매를 잡아 끌기에 더 이상 시비를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11km 떨어진 두번째 마을 '따르다호스'에서 묵기로 했다. 짧은 거리인지라 부르고스에 있는 '데카트론' 스포츠 대형매장에 들러 스틱과 무릎보호대를 사서 출발하려고 한다. 바오로씨가 사준 20만원이 넘는 블랙다이아몬드 스틱은 아깝게도 피레네산맥을 넘던 날 우리를 차에 태워준 엘사 부모님 차에 두고 내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스틱 하나씩 나누어 짚고 왔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스틱을 양보하고 걸으면서 바오로씨가 많이 힘들었나보다.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라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천천히 30분 정도 걸어갔더니 집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길이 나 있다. 10시에 매장 문을 연다는데 지금 가면 1시간 이상 추위에 떨면서 한데서 기다려야한다. 되돌아 가서 문을 연 Bar에 들어가서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휴대폰 충전도 시켰다. 와이파이가 빵빵 터져서 사진도 쌩쌩 잘 날아간다.
9시40분쯤 Bar를 나와 자동차전용도로로 보이는 길을 따라 데카트론으로 갔다. 벌판에 세워진 데카트론 매장 안은 갖가지 스포츠 용품을 갖추고 있어 보기만 해도 굉장하다. 스틱2개 12유로 무릎보호대 30유로 바오로씨 장갑과 내 발목 양말도 샀다. 어디로 갈 것인지 의논했다. 1시간 거리인 부르고스 대성당으로 돌아가서 까미노 길을 걸을 것인지, 앱을 보면서 첫번째 마을로 가서 까미노 길 따라 걸을 것인지... 결국 바오로씨가 길찾기 앱을 열고 첫번째 마을을 향해 앞장섰다. 건너편 저 멀리 부르고스 대성당과 부르고스 시가지가 보인다. 우리는 까미노 표시는 없지만 앱이 가리키는 대로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움직였다. 1시간쯤 걸어서 첫번째 마을 가까운 곳에 왔을때 농가가 보인다. 길에 서 있는 스페인 할아버지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물었더니 동료 세분과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고는 따라 오라고 한다. 20여분쯤 함께 걸어 첫번째 마을인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에 있는 부르고스 대학 캠퍼스까지 데려다 주신다. 인상도 좋으시고 친절한 스페인 할아버지와 기념 사진을 찍고 감사하다고 여러번 말씀드렸다.
벌써 12시다. 배가 고프다. 피자라도 먹고 가려고 피자 가게에 들렀더니 1시부터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공립 알베르게에 배낭 만 보냈기에 오늘도 선착순 입장이다. 공원에 앉아 씨리얼을 먹었다. ㅎㅎㅎ 씨리얼도 과자처럼 맛있고 먹고나니 배가 든든하다.
밀밭 콩밭 사이 너른 벌판을 지나 심하게 부는 바람을 안고 2시 경에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맞나 하는데, 반갑게도 아침에 동키로 보낸 우리 배낭이 문안에 놓여있다. 인상 좋은 여자분이 우리를 친절히 맞아 주고 따뜻하고 달콤한 차와 비스켓을 내놓는다. 침대가 열 몇개 있는 작은 알베르게로 순례자들이 기부해주는 돈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우리는 10유로씩 기부하기로 했다. 샤워하면서 발로 밟아 먼지 범벅이 된 옷까지 세탁 했다. 바람 좋고 양지 바른 곳에 빨랫줄이 쳐져 있다. 젖은 옷을 다 널고 침낭도 펴서 철문에 널고 핀으로 고정시켜 두었더니 바람에 심하게 펄럭인다.
4시 가까이 되어서 점심겸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 시간에 순례자 음식을 파는 곳은 없다. 7시나 되어야 가능하다. Bar 매장에 있는 두툼한 샌드위치와 따뜻한 우유를 먹고 나니 배가 부르다.
허리가 뜨끔 해서 연주가 준 동전파스를 허리에 붙였다. 그리고 침낭속에 들어가 누웠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한숨 잤더니 개운하다. 내일 아침 동키로 보낼 배낭이 우리꺼 하나밖에 없으면 동키 회사에서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 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외국인 순례자에게 전화해달라고 부탁하시로 했다. 내 침대 위에 누워있는 프랑스 여자 마리안느와 서툰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키 회사에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안느는 지금 우리가 묵고 있는 공립 알베르게 이름을 알려주고 내일 아침 우리 배낭 1개를 온타나스에 예약해둔 우리 숙소로 배달해달라고 전화를 해준다.
7시쯤 가까이 있다는 가게에 가서 길양식을 좀 샀다. 알베르게로 돌아 왔더니 사무실에 프랑스 젊은이들이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
우리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를 곁들여 토마토와 찰보리빵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날이 춥다. 가져온 옷을 겹겹이 걸치고 전기 난로를 켜 놓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