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04년(황해도 토산)/사망 1866년(남대문 밖 약현)
김정호(金正浩, 1804년? ~ 1866년?[1])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였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2]이다.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이며,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1)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4]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신분은 한미했다.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이었으리라 추측한다.[5]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大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6]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7]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죽었다.
(2)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3)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가)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기 위해 직접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정호가 탐사로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 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때 가장 지도란 사사로이 만들어 집에 보관하던 지도로, 대부분 그들 소유의 산림이나 논밭을 그리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 않았다.[8]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9]라고 하였다. 그밖에 정상기·최한기·신헌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서양에도 있는데, 유명한 세계 지도 제작자인 당빌은 프랑스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나) 김정호 옥사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로서 흥선대원군이 고산자 김정호를 죽였다는 허위주장이기 때문이다.[10]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11]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12],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또한 유재건이 지은 《이향견문록》에 죄인을 수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지며 또한 김정호가 몰(沒; 죽다)로 표현하며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서도 김정호가 옥에 갇힌 기록은 없다.[13]
(다)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3) 지도와 지리지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1]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2]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 번호 보물 850호
소재지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3가 249-1
1985년 8월 9일 지정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한반도의 지도이다. 1985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었다.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 제작된 한반도의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1) 지도의 구성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는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제책하였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부록격인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실제 도엽은 126목판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이다.
전체 크기는 가로 19판, 세로 22층(22첩이라고 표시하기도 한다)이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가로 360센티미터, 세로 685센티미터이다. 이는 지도의 대량 보급을 염두에 둔 제작 기법으로, 동서 19판을 연폭으로 남북 22첩을 계속 인접하면 한반도 전체의 지도가 되게끔 하였다.
한편 한양이, 청구도에서는 두 면에 걸쳐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한 면의 중앙 부위에 위치하여 한양을 둘러싼 경계가 모두 수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수도권의 지역적 범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는 각 층의 도엽을 동에서 서로 연폭(連幅)으로 길게 잇고 이것을 병풍식으로 접어 모두 22층으로 하는 분첩절루(分帖折壘)의 방법으로 제책하여 한 질이 되게 하였다. 이때 책의 크기는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로서 당시 서지류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책처럼 보관할 수 있다.
(2) 지도의 표기
1 첩에 나타낸 지역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이며, 지도 전체로는 동서 1,520리, 남북 2,640리이다. 이때 축척은 약 1:216,000이다. 이는 청구도의 남북 2900리보다 260리의 차이를 보이는데, 청구도에서 공백 및 여백으로 표시한 부분을 대동여지도에서는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산줄기는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이어 그렸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을 하나의 줄기로 표기하였다.
도읍은 원으로 표기하고 원 안에 이름을 표기하였다.
주요 도로를 표기하고 10리마다 거리 표시를 하여 도읍간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3) 지도의 축척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는 100리를 1척(尺)으로, 10리를 1촌(寸)으로 한 백리척(百里尺) 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1촌 1보(步)가 현재의 몇 센티미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축척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종래에는 조선 시대의 10리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4킬로미터로 계산하여 축척을 1:160,000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동지지》와 《속대전》에서는 “주척(周尺)을 쓰되 6척은 1보이고 360보는 1리이며 3600보는 10리로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용하여 이우형(李祐炯)·성남해(成南海) 등은 축척을 1:216,000으로 보았다. 위의 문장을 확장하면, 1리는 21,600촌이며, 백리척에 맞추어 비교하면 1촌으로 10리, 곧 216,000촌(=3600(보)×6(척)×10(촌))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곧 축척이 1:216,000임을 뜻한다.
(4) 대동여지도 와 다른 지도 비교
김정호가 제작한 세 지도, 곧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동여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도가 필사본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막으려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대동여지도의 주기(註記)의 수는 청구도의 15,485개에서 13,188개로 줄었으며, 이는 총 2,297개 줄어들었다. 다만 몇몇 주기, 곧 하천·누정(樓亭)·진보(鎭堡)·포(浦, 항구)·부곡(部曲)·교(橋, 다리)·평주(坪洲)·목장·리(里) 항목은 늘어났다.
동여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며, 또한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에 앞서 제작한 선행 지도이기도 하다. 주기 내용을 비교하면, 산악·하천·방면 항목은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많으나, 역원·창(倉)·진보 등의 항목은 두 지도의 기재 내용이 비슷하다. 전체적으로는 동여도가 총 18,376개로 대동여지도의 총 13,188개보다 5,548개나 많다.
(5) 대동여지도의 특징
대동여지도는 한국 고지도를 집대성한 최고의 옛 지도이다. 이 지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목판본으로 만들어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막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했다.
지도표(지도식)를 사용하여 지도의 주기 내용을 간결화하고 옛 지도를 근대화했다.
분합이 자유롭게 22첩으로 만들어 상하를 잇대면 도별 지도도 되고 전부 연결하면 전국도가 되도록 제작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며, 접으면 책 크기로 되어 휴대하기 편하도록 제작하였다.
전통적인 지도 제작법인 배수(裵秀)의 6체(六體)에 따랐으며, 방안도법을 이용하였고, 확대와 축소를 할 때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하여 지도의 정확성을 높였다.
주기 내용이 많아 정보가 풍부하다.
10리마다 점을 찍어 여행할 때 이정을 알기 쉽게 하였다.
2. 청구도
(1) 청구도
청구도(靑邱圖)는 1834년(순조 34년)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한국 지도로,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라고도 부른다. 현존하는 옛 지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가로 462센티미터, 세로 870센티미터이며, 축척은 약 1:216,000이다. 옛 지도 가운데 일정한 크기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축척이 동일한 전국도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이후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기초가 된 채색필사본이다. 상하 2책이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청구도의 구성 및 내용
김정호가 제작한 첫 번째 지도이며[1] 두 책으로 되어 있는 청구도는 앞머리에 최한기가 쓴 제문 다음에 김정호가 쓴 범례가 있고, 1면 크기의 역사 지도인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도(四郡三韓圖), 삼국전도(三國前圖), 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와 4면 크기의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이 들어 있다.
4면 크기의 신라, 고려, 조선 지도는 행정구역 및 지명의 시대적 변천을 개관할 수 있고, 청구도의 각 지방 지도를 찾기 위한 색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부록으로 군국총목표(軍國總目表)라는 제목의, 당시 행정구획별 남녀인구수·군보·곡부·방면·전답·민호 등이 기재된 표가 있다. 또한 지도 내용에는 수계(水系)·지형·성곽·창고·역도(驛道)·봉수·교량·고개·섬·호구·시장·군병·토산(土産)·공납·풍속·능묘·사찰 등 그 지역의 특색을 나타내는 지지사항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2]
제1책 : 청구도제(靑邱圖題), 청구도 범례,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도, 삼국전도, 신라주현총도(新羅州縣總圖),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 본조팔도성경합도, 군국총목표
제2책 :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靑邱圖 凡例
(3) 청구도의 특징
(가) 지도 구성 방법
전국을 가로 22판, 세로 29층으로 나누어 편람하기 좋도록 책첩으로 만든 총 321면의 첩지도이며, 가로 70리, 세로 100리를 기준으로 모눈을 그린 획정지도(劃定地圖)이다. 이는 동서의 길이를 1,540리, 남북의 길이를 2,900리로 계산한 셈이다. 이러한 획정법은 종전의 획정법과는 달리 바로 정조 때 천문 관측에 따라 정해진 8도의 극고도(極高度, 경위도)에 근거한 것이다.[4] 이때 남북 3천 리는 세로 30층이지만 제주도(濟州島)와 전라도(全羅道)를 잇는 한 층이 생략되어 있다.[1] 또한 청구도는 방안이 지도 위에 그려져 있어 산과 물을 자르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각 면의 위와 안쪽 또는 오른쪽에 10리 방안을 표시했을 뿐 지도 위에는 방안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특히 비지(飛地)와 두입지(斗入地)를 표시하여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점에서 청구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 실용적이다
(나) 색인도
본조팔도주현도총목
청구도에는 색인도(索引圖) 역할을 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지도를 찾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경위선표에는 방안의 가로, 세로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으며, 각 지도의 방안에 써있는 가로 세로의 일련번호를 비교하여 지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다) 지지 정보의 결합
군현을 파악하고 통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수록한 지지적 내용인 호구(戶口), 전결(田結), 곡총(穀總), 군정(軍丁)의 수와 서울까지의 거리를 각 군현이 표현된 지도 위에 직접 기록해 놓아 통치 정보가 나타난다. 그리고 신라 이후 각 군현 명칭의 변화를 읍치 주위에 신라는 ‘라(羅)’로, 고려는‘려(麗)’로 구분하여 적고 있어 행정구역 및 지명의 시대적 변천을 개관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전투 기록 등 당시로서는 중요한 여러 역사 정보를 해당 장소에 간략하게 적고 있어 역사 정보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지리 정보는 산의 표현에서 크기나 겹쳐진 줄의 수로 지형의 높낮이의 일부 표현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라) 지도식
사방을 12개의 방위로 나누고, 10리 간격의 원이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식은 기호만 별도로 모은 범례표가 아니라 지도상에서 직접 바다, 섬, 강, 산, 읍성, 목장, 못, 다리, 고개, 봉수, 누각 등의 기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지도범례의 표현은 현대 지도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마) 범례
범례의 용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한 정보를 동일한 기호로 표시하여 지도에 수록된 정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이용자들로 하여금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범례의 내용은 방면의 호칭이 면·방·사와 같이 지방마다 다른 점을 지적하면서 면으로 통일 시키고 있다. 또한 진보·사원·역·창 등의 위치 표시가 갖고 있는 애매함을 극복하기 위해 진·사·역·창의 글자 부분이 위치임을 밝히고 있다. 군현읍치의 경우 세로로 길고 큰 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고유 명칭 두 자를 적어놓아 다른 군현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고, 병영, 수영, 통영, 각종 영은 세로 또는 가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명칭을 적어 넣었다. 봉수는 불이 타오르는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외에 도로가 홍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하천은 흑색 쌍선에 청채색을, 산지는 흑색 연속봉만에 녹색채색을 하고있다
청구도 개성부
(바) 과학적인 지도
색인도, 지지 정보의 결합, 지도식, 범례를 갖추었고, 또한 지도 구성에서의 모눈 획정이나 방위 산출, 극고에 따른 지도의 보정 등은 당시 청구도가 조선에서 가장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잘 활용한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사) 청구도의 미비점
청구도는 당시의 어떤 지도보다 뛰어나지만 옛 지도에서 가지는 단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도의 도식 곧 지도식을 전통적 방식을 채택했고, 방위를 12방위를 씀으로써 지도 자체는 정확하지만 지도의 지점(地點) 표현이 보다 불분명하게 되었다. 수계는 정확히 표시한 반면 산맥은 진산(鎭山) 중심으로 표현함으로써 산맥이 많은 동쪽이 실제보다 넓게 그려졌다. 게다가 부기가 많아 지도의 독립성보다는 지리지 《동여도지》의 부도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4) 청구도의 제작 원리
청구도는 최한기의 청구도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제작 원리로 만들어졌다.
(가) 지도 제작은 획야분주(劃野分州)[6]에서 비롯한다. 획야분주에서는 산맥과 수계에 따라 지역을 나누었다.
(나) 천문 관측에 따른 경위선의 결정에 대해서이다. 최한기는 “하늘의 1도는 땅의 200리가 되고 또 시간의 4분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다) 1791년(정조 15년)에 천문을 관측한 결과로써 지형·위치·방위 등을 바로잡았다. 이는 1713년(숙종 39년)에 청나라 사신 하국주(何國柱) 일행이 한양에 와서 상한대의(象限大儀)를 써서 한성부 종가의 극고를 실측하여 북위 37도 39분 15초, 북경 순천부를 기준으로 한양이 편동 10도 30분이라는 실측치를 얻었다. 이를 기초로 정조가 1791년에 여지도에 입각하여 8도의 경위도를 양정시켰다. 이에 따라 8도의 분폭과 전국 주의 분표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져 실제 모양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여지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정철조(鄭喆祚)·황엽(黃燁)·윤영(尹鍈)이 편찬한 여지도가 특히 우수하여, 김정호는 그 지도를 참고하여 청구도를 만들었다.
(라) 재래 지도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정상기(鄭尙驥)가 지적하였듯이 종이의 크고 작음에 맞추어 334개 주현을 똑같이 그렸기 때문에 좁은 고을은 넓어지고 넓은 고을은 좁아지게 되었다. 김정호는 이에 유의하여 전국을 같은 비례로 제도함으로써 축척 비례가 정연하고 주현의 분합이 가능했다.
(마) 배수(裵秀)의 6체(六體)를 들어 지도 제작 원리를 설명하였다. 서진(西晉)의 배수(裵秀)는 우공구주지도(禹貢九州地圖)를 그린 지리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그가 중국 지도학의 시원을 이루었는데, 지도 제작의 여섯 원리를 제시하였다.
분율(分率) : 지형의 동서·남북의 폭원(幅員).
준망(準望) : 이곳과 저곳의 지형을 바로잡는 방위.
도리(道里) : 이곳과 저곳의 거리.
고하(高下) : 지형의 높낮이.
방사(方邪) : 지형의 모남과 비뚤어짐.
우직(迂直) : 지형의 구부러짐과 곧음.
(5) 청구도의 제도 원
청구도는 배수(裵秀)의 6체(六體)에 따라 그려졌다. 곧 방안선을 그을 때 가로 70리, 세로 100리로 나누어 분율을 고려하였고, 준망은 동서남북의 4방위 대신 12간지의 12방위법을 써서 방위를 바르게 하였다. 거리의 균정을 위해 일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10리마다 원을 둘러 그려서 도리(道里)를 바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평환법(平環法)이다. 그 전에 쓰던 방괘법(方罫法)은 사우(四隅, 네 귀퉁이)의 리수(里數)가 사정(四正, 자(子)‧오(午)‧묘(卯)‧유(酉)의 네 방위)보다 멀기 때문에 거리를 균정하게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천문 관측에 따른 경위선 표식을 적용한 점, 기하원본을 참고하여 서양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한 확대·축소의 정확성을 기했다.
3. 동여도
(1) 개요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 번호 보물 1358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 2-1
서울역사박물관
2002년 12월 7일 지정
동여도(東輿圖)는 23규(糾)로 이루어진 한국 옛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에 앞서 제작한 선행 지도로 여겨진다.[1] 제작 시기는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이며, 책첩 형태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으로 하였으며 만들어졌다.
(2) 동여도의 제작자
동여도는 그 제작자가 누구인지 여러 설이 분분하다가 최근에야 김정호의 작품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동여도지 제2책 서문에서 김정호가 지도와 지지를 만들고 이를 동여도지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지는 동여도지, 지도는 동여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간기(刊記)가 있어 김정호의 작품임을 확실히 알 수 있으나 동여도에는 간기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두 지도가 모두 23규로 되어 있으며, 매 규에 수록된 지도의 형태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또한 주기명(註記名)이 동여도는 18,736개인데, 대동여지도에서는 13,188여 개로 줄어드는데, 이는 대부분 중요도가 떨어지는 사항으로, 목각의 어려움 때문에 줄였으리라 본다.
둘째, 신헌은 대동방여도 서문에서 “김백원(金百源)에게 위촉하여 동여도를 만들게 하였다.”라고 언급하였는데, 백원(百源)은 김정호의 자(字)이다.
셋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실려 있는 지도표가 독특하며 매우 비슷하다.
4. 대동지지
대동지지(大東地志)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펴낸 지리서이다. 30권 1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평안도편 일부와 산수고 및 변방편 등은 결본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지지》는 김정호의 육필본이다. 다만 《대동지지》의 평안도편은 김정호의 친필이 아니며 나중에 누군가 정서하여 첨부하였다.
(1) 편찬 시기
대동지지는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까지 편찬하였으리 여겨진다.
대동지지의 편찬 시기는 종래에 1864년(고종 원년)으로 와전되어 왔다. 대동지지 첫 장에 “신라 시조 원년 갑자로부터 본조 철종 14년 계해까지는 무릇 1920년이며 32갑자에 해당한다.”[2]라는 기사와 《대동지지》 권1 경도 국조기년(國朝紀年) 철종에 관한 기사 다음에 실린 “주상 전하 원년 갑자”(主上殿下元年甲子)라는 내용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라 1862년(철종 13년)부터 1866년(고종 3년)에 김정호가 죽을 때까지 편찬을 계속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위의 “주상 전하 원년 갑자” 다음 줄에 “중궁 전하는 민 씨이며 본적은 여주이고 부원군 민치록의 딸”[3]이라는 기사가 나와 있는데, 그녀의 왕비 간택은 1866년(고종 3년) 3월 6일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대동지지》가 그때까지는 편찬 중이었음을 뜻한다. 또한 《대동지지》 권5에는 충청도의 도명이 역적 김순성으로 말미암아 공충도로 바뀐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1862년(철종 13년)이었고, 이때를 상한으로 본다.
(2) 편찬 체제
대동지지는 동여도지를 근간으로 삼고 여도비지를 참고로 보완한 지지이다. 동여도지에서는 역대 주현 등 역대지가 별책으로 첫머리에 편찬되어 있는데, 동여도지에서는 이를 맨 마지막에 방여총지(方輿總志) 편목으로 배열하고 있다. 세 지지(地誌)의 총목은 전국 주현 지지의 배여리나 명칭 등이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책의 분량은 동여도지가 22책, 여도비지가 20책인데, 대동지지는 15책으로 다소 그 분량이 줄어들었다. 문목을 비교하면 대동지지는 동여도지의 42개 문목보다 20개 적은 22개 문목인데, 이는 대동지지의 문목이 여도비지의 문목처럼 포괄적이기 때문에 동여도지의 모든 문목이 20개 문목에 포함되어 있고, 지도 작성에 필요하지 않은 몇몇 문목이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3) 인용서목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편찬한 다른 지지와는 달리 인용한 사료명, 곧 인용서목을 밝히고 있다. 인용서목에 따르면 중국사서 22종, 한국사서 43종, 도합 65종의 사료를 참조하였고, 중국과 한국의 사서를 가리지 않고 정사류는 빠지지 않고 인용했다. 인용 순서는 정사, 관찬사료, 사찬사료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이는 김정호가 정사류를 중시하는 역사의식을 지녔으리라 추측케 한다.[4]
인용서목에 나오지 않았으나 인용했으리라 여겨지는 사료도 상당수 있다. 예를 들면 청구도 범례에서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지도식을 소개한다거나 여도비지 관상감조에서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인용하고 있으나, 대동지지의 인용서목에서는 빠져 있다. 대동지지는 앞선 지지와 지도를 참조하였으므로 그러한 자료도 대동지지에서 인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인용서목에 나온 사료는,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사료는 최한기의 후원으로, 관찬 사서나 자료는 최성환과 신헌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5. 여도비지
여도비지(輿圖備志)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와 최성환(崔瑆煥)이 함께 편찬한 지지(地誌)이다.
여도비지는 20책으로 1책이 1권씩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동여도지와 대동지지에 빠져 있는 평안도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청구도를 완성한 뒤에 보완해 온 동여도지의 보완 부분을 정서한 지지이기도 하다
(1) 편찬 시기
여도비지의 편찬 시기는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여도비지 제1책 경도 묘전(廟典)조에서 헌종을 종묘에 모신 기록(1851년)과 같은 책 궁묘조의 은언군묘와 전계대원군묘를 “주상 전하가 기유년에 세우다.”라는 기록(1849년), 지지에 순조의 묘호를 ‘순종’으로 표기한 일(1857년 이전), 순조릉의 인릉(仁陵) 천봉(遷奉) 기사(1856년) 등으로 알 수 있다.
(2) 편찬 체제
여도비지는 경도 및 팔도에 관한 지리지인데 최성환이 휘집(彙集)하고 김정호가 도편(圖編)하였다. 가로 18.6센티미터, 세로 30.7센티미터로서, 총 2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책이 결본으로 현재는 15책만 국립도서관에 필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 지지의 목차에서 권1은 경도와 동반 부서, 권2는 서반 부서와 한성부, 권3은 경기좌도, 권4는 경기우도, 권5는 충청좌도, 권6는 충청우도, 권7과 권8은 경상좌도, 권9와 권10은 경상우도, 권11은 전라좌도, 권12는 전라우도, 권13은 황해좌도, 권 14는 황해우도, 권15는 강원동도, 권16은 강원서도, 권17은 함경남도, 권18은 함경북도, 권19는 평안남도, 권20은 평안북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권2, 권5, 권9, 권16, 권18의 5권은 전하지 않는다.
여도비지의 편목은 동여도지와 마찬가지로 먼저 각 도의 첫머리에 도세를 자세하고 일목요연하게 도표를 첨부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 동여도지의 42개 문목보다 훨씬 적은 12개 문목[3]이고, 반대로 내용은 훨씬 풍부하며, 12개 문목이 모두 지도 제작에 필요하도록 작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여도비지가 동여도의 시방서로서 작성되었다는 근거로 보기도 한다.
각 주현의 편목은 건치 연혁 등 20여 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도내의 호구, 전부, 강역, 극고, 방위, 양전, 도리 등을 도표로 처리하고 있으므로 여도비지의 편목은 동여도지의 편목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지도 제작을 위한 시방서로서 좀 더 치밀하게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도비지에서는 동국여지승람과 마찬가지로 유사 항목을 통합하여 한 항목으로 묶었다. 건치 항목에는 연혁·읍호·관원·방면을, 산천 항목에는 산류·수류·도서·형승을, 식화 항목에는 토산·수리·재용·창고·장시를, 무비 항목에는 성지·고성·영아·진보·고수·전략을, 도리 항에는 역도·영로·진도·원점을, 사전 항목에는 단유·묘전·사원·서원 등을 통합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인물·풍속 항목 등 지도 제작에 불필요한 항목은 생략하였다. 이는 이전에 여러 서적을 편찬한 경험이 있는 최성환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3) 기타
(가) 극고표
여도비지는 동여도의 시방서로서 작성되었다. 그러므로 지도 제작에 필요한 사항을 담고 있고, 특히 전국 주요 지점, 즉 행정구역의 극고표를 수록하고 있다.
1713년(숙종 39년) 청나라 사신 하국주(何國柱) 일행이 한양에 와서 상한대의(象限大儀)를 써서 한성부 종가의 극고를 실측하여 북위 37도 39분 15초, 북경 순천부를 기준으로 한양이 편동 10도 30분이라는 실측치를 얻었다. 이를 근거로 정조가 1791년(정조 15년)에 감신(監臣) 김영(金泳)에게 명하여 한양의 북극 고도와 〈여지도〉의 경위선을 준거하여 8도 관찰사영의 극고 및 편동서도를 양정하여 극고표를 만들었다.
여도비지에는 정조 때 양정한 값인지 아니면 김정호가 실측한 값인지 알 수 없으나 전국 주요 지점의 극고를 기록한 극고표가 실려 있다. 함경도 25지점, 평안도 42지점, 황해도 23지점, 강원도 26지점, 경기도 38지점, 전라도 53지점, 경상도 71지점, 도합 278개 지점의 경위도가 표기되었다. 그밖에도 전국 주현의 강역표, 방위표, 도리표 등을 도표로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경위선식의 과학적인 동여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나) 여도비지와 동여도 및 대동여지도
동여도는 23규(糾)로 구성되어 있는 고지도 가운데 가장 세밀한 지도이며, 김정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동여도). 이때 여도비지는 동여도 및 대동여지도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는데,
첫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방면 등의 기재 내용이 여도비지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하며,
둘째 여도비지 권1 동반부서 관상감조에 실린 팔도 순여의 북극고를 정한 내용과 동여도 13규 여백란에 표기되어 있는 북극고 산정 내용이 똑같으며,
셋째 대동여지도 2규 여백란에 수록되어 있는 팔도의 주현수 및 대소영수 등이 여도비지 각 도의 도세를 총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작성된 각종 통계표와 일치한다.
6. 동여도지
동여도지(東輿圖志) 또는 대동여지통고(大東輿地通考)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편찬한 지지(地誌)로서, 청구도 작성을 위한 기초 작업, 곧 시방서로서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여도지는 22책으로 편찬된 지지(地誌)로서 김정호가 처음으로 펴냈으며 그리고 거의 평생에 걸쳐 보완한 지지이며, 현존본은 모두 육필본이다. 동여도지를 편찬하기 시작한 때는 확실치 않으며, 김정호가 죽기 직전까지 평생에 걸쳐 편찬하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1) 제1차 편찬
동여도지는 편찬하기 시작한 때는 1822년 무렵으로, 일차적으로 편찬·완성한 때는 1834년(순조 34년)으로 추정한다. 동여도지 제6책 권11 청주목 연혁조 기사에서 “순종 25년에 현을 강호하였고 34년에는 다시 예전으로 돌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은 동여도지 주현 연혁조에서 가장 늦은 기록이다. 그런데 청구도는 1834년 가을에 제작되었으므로 동여도지는 늦어도 그때까지는 제1차 편찬을 마쳐야 한다.
이후 동여도지 제1차 편찬본의 상하좌우 등의 여백에 내용을 첨부하였다.
(2) 편찬 체제
김정호는 동여도지 권2 동여도지서에서 편찬한 목적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爲邦之道)’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거기에서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흘러 그 기록이 달라졌음을 들어 동국여지승람의 예에 따라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여러 소장본을 연구한 결과 평안도편을 김정호가 작성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동여도지의 총목은 각 도별로 나뉘어 있으며, 편목은 각 도의 첫머리에서 도세(道勢)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각 도의 연혁을 비롯한 42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각 주현의 편목도 각도의 도세의 편목과 비슷하게 연혁을 비롯한 30여 개 항목[4]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현의 편목은 청구도 범례 38개 항목과 거의 비슷하다. 또한 각 편목의 항목은 동여도지를 편찬할 당시에 가장 최신 자료에 입각하여 인용하였고, 이러한 편목은, 일부 오류가 발견되나. 동국여지승람의 체계와 흡사하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이 동여도지의 근거 자료임을 알게 하는 근거가 되며, 마지막으로 두 책의 편목도 비슷하다.
김정호는 지지는 지도의 근원이며 지도에 다 나타내지 못한 것을 기록하고, 주현의 형편에 따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표기하되 그가 제시하는 38개의 항목에 따라 어기지 말고 지도와 병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 영남대학교 소장본
영남대학교 소장본은 가로 11.3센티미터, 세로 16센티미터의 소책자로 총 20책으로 되어 있고, 제8, 14, 18책 등 3책은 결본이어서 17책만 남아 있다. 책명은 17책 가운데 14책에서 ‘여지’(輿地)라고 하였으며, 3책은 ‘대동여지통고’(大東輿地通考)라고 하였다. 그러나 권2의 서문과 책 내용의 권 표시에는 책명을 ‘동여도지’라고 하였다. 권차(卷次)가 권1에서 권37까지 매겨져 있는데, 함경도까지만 되어 있고 평안도편은 결본이다. 제17책은 김정호의 친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은 두 권이 현존한다. 그 체제는 영남대학교 소장본과 같으나 중복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총 19책이 현존한다.
(다) 고려대학교 소장본
고려대학교 소장본은 총15책이다. 그 체제는 영남대학교 소장본과 같으며, 그 가운데 평안도편은 서체가 다르다. 현존하는 평안도편 일부도 김정호의 친필이 아니라서 김정호가 평안도편은 작성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제15책은 김정호의 친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3) 동여도지와 청구도
종래에는 청구도가 대동지지의 부도적 성격을 지녔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김정호의 사상, 곧 “지지가 지도의 근본”이라는 사상에 반하여 대동지지가 청구도보다 늦게 편찬된 점을 들어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동여도지 제1차 편찬 시기가 청구도 편찬 시기인 1834년 무렵으로 밝혀짐에 따라 청구도 편찬을 위해 동여도지의 제1차 편찬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동여도지가 청구도의 시방서 역할을 했으리라 보는 견해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두 자료에 실린 편목은 그 수와 항목이 거의 같거나 비슷하다.
동여도지 제1차 편찬 이후에 바뀐 행정 체제 변화가 청구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지지를 만든 뒤 바로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동여도지의 편목에 수치가 간략화되어 청구도에 실려 있다. 예컨대 함경도 부령(富寧)의 곡부(穀賦)조에서 동여도지에는 73,138석, 청구도에는 73100석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지도에는 자세히 적을 수 없었기 때문에 100자리 아래에서 버림한 값을 취하였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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