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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는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3,1-5
1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신자들을 호린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다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다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한 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이었던 이들과 달리 이교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들을 따르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유다교를 거쳐 그리스도교로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라고 힘껏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염려한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 (갈라 3,2)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뒷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구원된 이의 삶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에 뒤따르는 결과이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교인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그가 정말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결국 성령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 하면 대체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네. 기도해 드릴게요.’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오늘 주님 가르침에 따라, 간절한 원이 하나 있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마음과 정신, 목숨과 영혼을 다해 아버지께 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
사실 내가 건강해야 복음 선포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합격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가화만사성해야, 그를 바탕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는 노력입니다.
기도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힘차게 활동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인생 여정을 항상 인도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기적을 기꺼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
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
“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직 말을 못 해서 자신의 의사 표시를 울음으로 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듣고 아이가 원하는 걸 해결해 줍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젖병을 물려 주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혀 주기도 합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학생이 되면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로 합니다. 이제 무조건 울기만 해서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학생이 되면 이제 엄마와 밀고 당길 줄도 압니다. 설거지를 도와 주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면 성당에 가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성적이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엄마는 자녀가 원하는 걸 기꺼이 들어 주게 됩니다. 이제 학생이 어른이 되면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꿔 드리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는 아이에서, 엄마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학생에서,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는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울기만 한다면 엄마의 마음이 아플 겁니다.
주교님은 사제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겨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어떤 사제를 마음에 들어 할까요? 우는 사제가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는데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고, 교우들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꼭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 주교님은 무척 난처할 겁니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목하고 싶다고 하면서 미리 일본어 어학 시험에 합격합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일본으로 보내 줍니다. 일본 교구에서 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2년 전에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주교님께 교포 사목을 청했습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저를 교포 사목 사제로 파견하였습니다. 능력과 사목의 역량이 검증된 사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가는 곳마다 신자가 늘어나고,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고,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본당을 분가시킵니다. 이런 사제를 ‘해결사’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제가 많으면 주교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교님이 원하는 걸 알아서 해 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타 교구에서 공소 사목 사제를 원할 때입니다. 기꺼이 손을 들어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인사 적체로 본당 신부의 자리가 부족할 때입니다. 후배 사제를 위해서 기꺼이 특수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고속 터미널 성당에도 지원하고, 시장 성당에도 지원합니다. 6년 전입니다. 저는 특수 사목을 5년 했기에 본당 신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 신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결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저를 미주가톨릭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신문을 홍보하고 만드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곳 달라스를 마치면 주교님이 원하는 걸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지만 제 부하들에게 명령하면 부하들은 제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아픈 부하가 곧 나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우는 아이의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밀고 당기는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오늘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 Borgia)
신분 : 신부, 총장
활동지역 : 아라곤(Aragun)
활동연도 : 1510-1572년
같은이름 : 방지거, 보르지아,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고,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Roma)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 아라곤의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Francesco Borgia) 사제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다니엘(Daniel)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모로코(Morocco)
활동연도 : +1227년
같은이름 : 대니얼
1227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위해 파견된 작은 형제회 소속 선교사들이 모로코에서 순교하였는데, 이 선교단은 성 다니엘이 이끌었으며 함께 순교한 선교사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그리고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이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모로코에 도착하여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체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고, 일요일 아침에 체우타로 들어가서 길거리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출현이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들은 '카디' 앞에 끌려갔다. 그는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미쳤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었는데, 무어인들은 그들은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다음 일요일, 그들은 자신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하였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마호메트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하였고, 결국은 체우타 성벽 밖에서 그들을 모두 참수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후일 에스파냐로 모셔졌고, 1516년 시성식에서 교황 레오 10세(Leo X)는 성 다니엘과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을 성대히 거행토록 하였다.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
‘인터넷 수호성인’
아쿠티스, 10월 10일 복자품 오른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은 밀라노 출신의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의 시복식이 10월 10일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아쿠티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인터넷을 통해 신앙을 전했던 소년으로 급성백혈병에 걸려 지난 2006년 1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저는 제 모든 고통을 주님을 위해,
그리고 교회와 교황님을 위해 봉헌하고 싶어요.
저는 연옥을 거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곧바로 천국에 가고 싶어요.''
그는 15살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나 고유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많은 이들이 남들을 모방하다 삶을 마감합니다.”
이는 아쿠티스가 즐겨 반복했던 좌우명이었다.
“슬픔은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이지만, 행복은 하느님을 향한 시선입니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열린 마음을 지닌 15살 소년은 충만한 삶 안에서의 참되고 심오한 신앙의 표현을 통해 지상 여정에서 자신이 맛본 천국을 들려줬다.
카를로 아쿠티스 :
부패하지 않은 성인의 시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마 뉴스룸, 2020.10.2. (CNA) :
곧이어 복자로 시복될 카를로 아쿠티스의 사진들은 온라인에서 몇 가지 혼란을 야기하였다.
목요일(10월 1일) 십대 컴퓨터 고수의 시신을 일반인들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전시되었다.
사진을 보면, 카를로의 시신은 2006년 그가 죽고 나서 자연스러운 부패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며, 아마도 그의 시신이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아시시의 도메니코 소렌티노 주교는 10월 1일(목) 사진에서 보이는 카를로의 시신이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시신의 모습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카를로의 시신은 일반인이 공경할 수 있도록 전시하기 위해서 처리되었으며 실리콘으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다고 주교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