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13 - 태평천국 역사관을 보고는 명나라 시대 정원인 잔웬을 구경하다!
10월 20일 난징(남경) 시내에 공자의 사당 푸츠먀오 夫子廟 (부자묘) 를 보고는 잔웬 瞻園(첨원)
을 찾아가니 잔웬(첨원)의 정문에는 金陵第一園 (금릉제일원) 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 이 원나라를 쳐서 북경을 빼앗은 일등 공신 서달 에게 하사한 저택 입니다.
훗날 청의 건륭제 가 방문해 구경하고는 잔웬 膽園(첨원) 이라고 명명했으며
태평천국 당시 홍수전이 기거했던 천왕부가 있어
건물에는 太平天國 歷史博物館 ( 태평천국 역사박물관 ) 도 들어있습니다.
“태평천국의난” 이란 아편 전쟁 패배후 청조(淸朝)에 대해 1851년 광동의 기독교도 홍수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중국 혁명운동이니 상제회는 광서성에서 봉기해 국호를 태평천국 이라
정하고 “멸만흥한(滅滿興漢)” 기치와 함께 토지균분 · 조세경감 · 남녀평등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빈농을 비롯 민중을 포함한 수십만의 태평군은 1853년 난징 (南京, 남경) 을 점령해 수도로 정하고
신국가 건설에 착수하지만 내분을 겪는 가운데, 증국번과 이홍장 의 유림 의용군 과 영국장군
고든의 상승군 의 반격을 받아 1864년 남경을 빼앗기고 홍수전이 자살함으로써 14년만에 망합니다.
중국에 있어 농민 전쟁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한(漢) 민족주의" 는 이후 손문등 동맹
회의 혁명운동으로 이어져 청조가 무느지고 중화민국 이 건설되는데......
태평청국 봉기 원인은 영국과의 아편전쟁 패배후 굴욕적인 남경조약 의 체결 입니다.
아편등 서양 물건들은 홍수처럼 중국으로 밀려들었고.... 청나라 정부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니 가장 심한 곳이 광동 이었으니 양광
(광동과 광서) 에서는 태평천국 (太平天國) "농민 봉기" 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수전 은 일곱살 때부터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천성이 똑똑하고 부지런해 열여덟살에
역사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어지지만 양친이 세상을 뜨자 상을 치르느라 몇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다가겨우 숨을 돌려 광주로 가서 과거 를 보았으나 연거푸 낙방합니다.
이무렵 기독교 서적 인 “권세양언 (勸世良言)” 의 색다른 내용에 마음이 끌린 그는 깊이 연구
하기 시작했으니... 1843년 7월에 홍수전은 친구 풍운산, 사촌 홍인간과 함께 석각담의
냇물에서 세례식 을 치른 다음에 종교적 비밀 결사인 “배상제회 (拜上帝會)” 를 조직합니다.
홍수전은 하느님의 첫째 아들이 예수니 자신은 둘째 아들이라고 했으며 신교 이기는 하지만
장차 많은 신도들이 모일 거라고 믿었으니 배상제회를 세운 홍수전은 집에 있던 공자와
맹자의 위패 를 부숴버리고 풍운산과 함께 광서성 자형산구로 들어가 "선교 활동" 을 했습니다.
광서의 배상제회 가 조직되자 홍수전은 광동으로 돌아가 2년간 “원도구세가 (原道救世歌)” 및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을 저술하니 평등사상과 선악의 대립 등을 이야기했으며 풍운산
은 자형산 숯 굽는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짧은 기간에 수천명의 회원을 가질 정도로 발전합니다.
홍수전, 풍운산, 양수청, 소조귀, 석달개, 위창휘 의 지도부가 꾸려지고 1850 년 홍수전은 전국의
회원들에게 계평현 금전촌 으로 모이게 하니 2만명 이 넘었는데 홍수전과 풍운산은
호이황의 집에서 봉기를 모의하고 있다가 이를 알고 달려온 관군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양수청 은 봉기군을 이끌고 관군을 물리쳤는데 태평천국 역사에서 유명한 “영주지전
(迎主之戰)” 으로 다음해 1851년 1월 11일 태평천국군은 봉기를 선포하고 18개 성을
종횡하며 14년간 계속되니 진압에 공을 세운 "증국번과 이홍장" 은 중국의 지도세력이 됩니다.
여기 정원은 옛날 소주에서 보았던 줘정위안(拙政園 졸정원) 이나 유원 처럼 춘하추동
4계절 별로 다른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정자를 지었는데 길은 지그재그 로 되어있네요?
연못을 파서 온갖 화초며 물고기, 새들까지 길렀다는 데.....
전각의 추녀가 연못 에 비추이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또한 난간이며 길에 온갖 짐승이며 화초의 모습을 새기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며
둥근 문에다가 정원에는 분재 또한 기이한 모습등 볼거리도 많습니다.
현존하는 잔웬(첨원) 은 1960년 중국의 현대 건축가 류둔전이 주관하여
재건한 것으로 청대 (淸代) 의 풍격을 기본적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산과 돌로 주요 풍경을 이루고 물로써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도록
조성한 정원으로서 중국 고전원림의 모범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 건물은 정묘당이라 부르는데 정묘당 남북으로 조성한 호수에는 각각 태호석(太湖石) 으로
가산(假山) 을 축조하였는데 북쪽 가산은 명나라 때부터 있던 것을 토대로 보존한 것이라!
정원의 서쪽에는 흙산이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 정자와 부채꼴 정자 가
있으니 정원의 동쪽에 있는 구불구불한 복도는 남북을 관통합니다.
북쪽 끝의 호수와 맞닿는 물가에도 정자가 세워져 있으며 정묘당 동쪽의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는 오래된 등나무 가 있는데 나무 그늘로 잔위안의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밖에 잔웬 동남쪽에 화축청(花竺廳) 과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새로 조성한 풍경지구 ( 風景地區) 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 둘러보지 못하고 중산릉 으로 가기위해 지하철역 을 물으니 오른쪽으로
가면 1호선 역이 있고 왼쪽으로 가도 3호선 역이 있다는데 거리를
물으니 비슷하다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왼쪽인 부자묘 방향으로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