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준가르 평정은 그들만의 공적이 아닙니다. 이 중앙 유라시아의 치밀한 음모와 싸움은 여러가지 그물망으로 엮여 있었고, 초원에서 청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기말은 물론 할하 몽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무리한 요구, 옥을 죄는 긴장감, 준가르 원정을 지원하라는 협박으로 많은 몽골인들이 가난과 관의 통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는 결국 1756년, 칭군자브의 '반란'으로 표면화 되었습니다. 몽골의 저항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장수들은 아무르사나라는 존재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시키기 이전에, 할하 몽골을 억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청나라의 지도층은 몽골을 명목상의 독립국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완벽한 감시 아래 그들을 두었고, 한 단위 부족에서 다른 단위 부족으로 이동하는 기본적인 움직임조차 통제에 짜 맞추어, 그야말로 지정된 영역에 가두어져 면밀하게 단속되고 구획되는 '가축' 이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청나라의 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군사를 동원해야 했으며, 이때문에 중국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초원의 싸움에서 중요한 보급품은, '걸어다니는 보급품'인 가축입니다. 청은 할하 몽골에게서 끊임없이 가축을 공급 - 수탈 - 하였는데, 1715년에서 1735년까지 4백만 마리의 가축을 지불했고, 한 마리의 가격은 고작 은화 7닢이었습니다. 또한 준가르의 피난민들을 부양하는 일도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칭군자브를 격노하게 한것은, 에린친도르지의 처형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르사나를 구금하여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었는데, 아무르사나는 그 구금에서 탈주했습니다. 이에 청은 구금에서 벗어나게 한 인물로 처음에 칭군자브를 지목했고, 칭군자브는 세차례 체포되었지만 결국 혐의가 풀렸습니다. 이에 에린친도르지가 희생양이 되어 죄를 뒤집어쓰고, 1756년 베이징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칭군자브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직후, 그는 청나라의 명령을 거절하고 초지로 달아났습니다.
칭군자브가 할하 몽골 체제를 뒤흔들 위험성 때문에, 건륭은 아무르사나를 끝장내려고 하던 병력을 되돌려, 칭군자브를 공격하는데 동원했습니다. 칭군자브로 말하자면, 그는 과거 세계를 지배하던 동족들이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어 가길 원하게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고, 차선책으로 러시아에게 접근했지만, 캬흐타 조약 이후로 러시아 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1757년 1월 벌어진 싸움의 결과는 전혀 놀라울게 아니었습니다.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 칭군자브는 2천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실패했고, 청군은 그를 격파했으며, 가족들과 함께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할하 몽골의 처지에 있어 진보를 가져오는데는 성공했는데, 건륭이 이 난리를 우려스럽게 여긴 탓에 아무르사나를 공격하는데 있어, 할하 몽골의 지원을 전혀 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당근을 던져준 것입니다.
칭군자브의 '반란'은 분명히 할하 몽골의 독자적인 행보 중 일부로, 이에 대해 몽골의 역사가들은 청의 압제에 대항한 위대하고 영웅적인 민족 저항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일에 대해 거의 비중을 두지 않고, 그저 변방의 하찮은 도적때의 발호, 사소한 사건 정도로 평가절하 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서구의 경우, 몽골이 경제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착취 때문에 청에게 반발하는 증거는 나타나지만, 이내 이것이 개인주의 ─ 근대 민족주의의 요구와는 분명히 반대될 ─ 로 인해, 민족이라는 가치보다 부족 혹은 인적 단위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여하간에 서로 다른 견해는 하나의 프레임에 시각이 갇히는것을 방지해줍니다. 칭군자브의 저항이 일어나기 직전, 건륭은 아무르사나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물론, 지긋지긋한 말일 수도 있지만, 보급 문제 때문입니다. 건륭은 보급이 부족하다고 항변하는 현지 지휘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그들을 베이징으로 압송했습니다.
"군의 지도자는 군대와 고난을 같이해야지, 사치와 낭비에 탐닉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무리한 요구 때문에 많은 장수들이 해임되었고, 일부는 압송되는 도중, 준가르 부대의 기습을 받는 불행도 겪었습니다. 대신, 다르당가라는 장군만이 홀로 공격적인 ─ 아마도 무모에 가까울 ─ 행동을 보이면서 상당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아무르사나를 추격하여 사로잡는 ─ 비현실적에 가까울 ─ 건륭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자, 점차 황제의 총애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장수들이 겪는 문제는 삽으로 산을 치울 수 없다거나, 바늘로 바위를 부수지는 못하는 사실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조정과 황제는 이러한 '실패'에 대해 '마음속의 벽' 때문이지 물질적인 제약 때문이 아니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혹한기에 잠시 군대를 퇴각시키는 행위는 당연한 행위였지만, 건륭은 이러한 일도 마지못해 받아들였습니다.결국, 다르당가도 "희망이 없을 정도로 무능하다." 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무르사나의 경우, 중무장한 청군에 비해 훨씬 빠르게 초원을 돌아다녔습니다. 1756년의 경우, 칭군자브의 반란이 일어나며 청군은 주력을 그쪽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1757년이 될 무렵, 청군은 화북의 평원에서 무려 신장의 초원으로 이어지는, 믿기 힘든 수준의 어마어마한 보급 행렬을 이용하여 카자흐 초원의 산맥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아무르사나의 군대를 격파하여 적을 부대 단위로 뿔뿔히 흩어버리고, 수천여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르사나는 잡지 못했고, 건륭은 분노했습니다.
건륭이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이렇게 멀리 있는 준가르보다도 더욱 멀리 있는 존재, 즉 카자흐족의 아블라이와 준가르가 손을 잡는 행위였습니다. 카자흐의 경우, '길들' 이기에는 준가르보다도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여하간에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몽골은 청나라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였지만, 카자흐는 그 세계 바깥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청군자브의 반란은 1757년 1월에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개의 지역에서 아무르사나, 칭군자브의 반란에 시달린 건륭은 흥분하여,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준가르 포로들을 '모조리 학살' 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 반도들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마라. 단지 늙고 약한 이들만 남겨라. 우리는 이전 원정들에서 너무 관대했다. 우리군이 예전처럼 행동한 후 철수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초(剿)라는 발언이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완전히 없애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대학살을 벌인 장수들은 치하를 받고 고위직을 제수했는데, 이로 보아 모두 죽이라는 건륭의 발언이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모든 장수들이 이런 미친 행위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적의 목초지를 점령했고, 다만 그들 백성이 달아나게 내버려 두었을 뿐인 하다하, 아구이 같은 장수들의 경우, 처벌을 받았습니다. 소단위로 흩어진 아무르사나의 패잔병들을, 필요에 따라 러시아의 영역까지 진군하여 모두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건륭제의 대학살이 소름끼치는것은, 그 주도면밀맘에 있습니다. 건륭은 심지어 포로들 중에, '강한 장정들을 선별하여 죽이고' 단지 여자들만 종복으로 주라고 지시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젊은 남자들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1756년의 경우, 조정에서는 항복을 조건으로 준가르 배성들에게 기근 구제용으로 곡식, 가축을 주자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건륭은,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암묵적으로 고사 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오직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만 남아, 다른 몽골 부족이나 만주족 기인들에게 노예로 분배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서들이 내려진 후, 청나라의 분견대는 '반도'들을 추격해 수천 명 단위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건륭은 광기를 잠재우기는 커녕, 되려 이를 선동질했습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작은 도둑들이 아니다. 그들은 잡아서 처형해야 한다. 지도자와 추종자들을 구별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들의 부족 안에는 수많은 도적이 있다. 이들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몽골족에게나 상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단순히 반란의 진압이 아니라, 준가르의 저항을 "뿌리채 자르는 것" 입니다. 시베리아에 있던 러시아 지사들은 만주족 군대가 장정,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학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757년에 이르러, 건륭제는 준가르가 투르키스탄쪽으로 붙는것을 경계하여, 조금 더 완화된 정책으로 그들을 내지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만약 조금이라도 구실이 발생하면 학살을 반복했습니다. 건륭은 이렇게 자신이 준가르를 말살할 의도가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이전에는 준가르를 말살할 의도가 없었다. 이들을 일소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항복하고는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것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달, 장군 자오후이와 슈허더는 건륭제에게 반도들을 '없애는 일'에 충분한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았습니다. 건륭제는 이제 기만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청군의 학살, 그리고 그들이 몰고 온 질병 - 천연두 - 로 인해, 준가르는 저항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말소되었습니다. 준가르 국가와 민족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전의 초원은 인구가 극히 희박한 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위원의 성무기에서는 이에 대해,
"수십만의 인구 가운데 40%는 천연두로 죽었고, 20%는 러시아와 카자흐 영토로 달아났으며, 30%는 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다른 이들에게 보내졌다. 수천 리 안에 준가르 천막이 하나도 없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강희제의 경우, 준가르의 '반항' 을 청나라와 준가르 민족의 대결이라기 보다, 자신과 '가르단' 개인의 대결로 보아 먼 초원에서 일대일 대결로 그를 분쇄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건륭제는 베이징에 머물며 '사악한 이민족' 준가르에 대해, 깔끔하게 없애버린다는 관료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 최후의 학살에서, 건륭제는 스스로를 다양한 민족을 조화로운 영역에서 포괄하는 공평한 군주라고 포장했지만, 그러나 황제의 포용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멸망을 안기면서 스스로의 이빨을 드러내었습니다.
물론 청나라 측의 기록에서 건륭은 자신이 일반적인 기미 정책을 고수하려고 했으나, '본성이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교활하고, 무질서를 좋아하는' 준가르와 아무르사나의 무리들이 황제의 '자애로운 마음'에 반대해 자멸을 불러왔다고 주장하며, 단지 1,700만냥에 불과한 전쟁 수행 비용이 전대의 일들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고 자신을 합리화 했습니다.
아무르사나의 경우, 패배자가 된 그는 카자흐로 달아나 아블라이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아블라이는 당초에 아무르사나를 보호하고, 또 지원도 해주었지만 이내 이 준가르인이 늙은 베이징의 지배자를 이길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했습니다.
모든 동맹을 잃어버린 아무르사나는 러시아의 차르에게 기대었습니다. 항복을 할테니 지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청군자브의 반란이 완전히 종결될 무렵, 아무르사나는 러시아 변경의 사령관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인들은 아무르사나가 천연두를 앓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이 준가르인은 격리되었습니다. 그리고, 1757년 9월 21일, 고작 서른 다섯의 나이로 질병에 시달리며 죽어갔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처음에는 아무르사나가 이르티시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고 발뺌했습니다. 청나라의 관료들은 강을 샅샅히 뒤졌지만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계속 러시아를 추궁한 끝에 사실을 알아내었고, 그가 죽어서 묻혔다는 사실도 알아내었습니다. 건륭은 강희제가 가르단의 유체를 '송환' 하여 박살을 내었던 위업을 흉내내고자 죽은 몽골인의 시신을 얻고자 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러시아는 카자흐를 비롯한 중앙 유라시아의 여러 유목민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가 중국보다 약해 보이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결국 건륭제는 시신을 송환 받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가들은 아무르사나는 준가르 땅에 통제력을 넒히기 위한 러시아의 이용에 당했다고 하면서, '통합' 된 중국과 몽골을 떼어놓으려던 러시아의 음모고, 이를 청이 분쇄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가 합니다. 청에 제대로 통합되지도 않았던 준가르가 반역을 했다면서 말입니다. 반면 러시아는 아무르사나의 행동을 중앙 아시아에서 청에 대항한 몽골 민족이 벌인 맹렬한 저항 시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르사나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말입니다.
아무르사나의 죽은 시체가 청과 러시아의 정치적 장난질에 이용되었던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던 역사 역시, 현대에 들어 온갖 민족주의와 국가 간의 정치적 파워 게임의 장난질, 각종 이데올로기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이 일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첫댓글 맛이 제대로 갔군요... 대국의 군주답지 않은 짓이라고 밖에는... 잘 보고 갑니다.
결국 목표는 달성했군요 -_-;
명군인가 폭군인가..-_-;;;
건륭제는 남쪽에서 삽질했지요.예를들어 버마나 베트남에서.근데 중가르와의 전쟁에서는 대단한 성과를 거뒀자나요.이게 건륭제의 군사적인 역량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유목기마민족이 망할때가 되서 그런거 아니겠습니까?근데 화기의 발달이 유목보다는 농경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건 알겠는데(대포는 무겁고 위력이 강해서 들고 다니기에는 곤란하지요.중가르는 분해해서 운반했다는데 그래도 힘든 일이 많았을듯)이때 철도시대도 아니고 청군도 말타고 다녔을텐데 중가르를 어떻게 포착해서 전멸시켰습니까?스피드라는 면에서는 지난 수천년동안하고 다른게 없자나요
에효 민족이 무어고 나라가 무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