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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느님 나라
마가복음 4:26-32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4주입니다. 오늘 성서 일과 복음서 본문은 마가복음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중 씨앗에 대한 비유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안식일 논쟁으로 촉발된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따먹은 것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제자들이 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다윗왕의 예를 들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막 2:23-28).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안식일 법으로 예수의 일행을 정죄하려고 뒤 따라다닙니다. 어느 안식일 날 예수께서 회당에 가셔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목격하며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드디어 걸려들었다고 생각하죠.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십니다(막 3:4). 바리새인들은 말문이 막혔죠. 그리고 회당을 나서자마자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고 합니다(6절).
안식일 법조자 무시하며,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엮으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그가 행하는 기적이 바알세불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트집 잡죠.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다 놓고 이런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가정도 버티어 나갈 수 없다. 만일 사탄의 나라가 내분으로 갈라진다면 그 나라는 지탱하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이란 것이죠.
그러면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 경고합니다(막 3:21-30).
이런 사건들 이후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죠. 한번 볼까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농부를 말하는 것이겠죠. 뿌려 놓은 씨앗은 시간이 지나면서 싹이 나고 자랍니다. 그런데 농부는 어떻게 싹이 틔워지고 자라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땅이 저절로 키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싹을 틔웁니다. 싹이 돋고 난 다음에는 땅속에 있는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성장합니다. 푸른 잎이 무성해 지면 엽록소가 태양의 빛과 이산화탄소, 물을 가지고 당분을 만들어 내죠. 그리고 그것을 이삭에 저장합니다. 당분은 이삭에서 녹말로 저장되고 그것이 다 채워지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히게 됩니다. 그렇게 곡식이 익으면 농부는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대고 수확하죠.
이런 탄소동화 작용의 비밀은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완전히 밝혀지게 되었기에 예수님 당시에는 농부들이 씨앗이 자라 열매 맺는 원리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씨앗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땅의 작용이라고 생각했고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예수시대 팔레스틴에서 행해진 농사 방법을 볼까요? 호크마 종합주석 책에는 이렇게 씌어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농부들은 씨를 뿌리기 전에 밭에서 지난해의 묵은 것들을 깨끗이 치웁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밭을 갈지는 않습니다. 당시에는 밭을 갈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된 밭의 표면에 그냥 씨를 뿌렸습니다. 따라서 농부는 씨를 뿌린 땅 밑에 돌이나 뿌리 같은 것이 들어 있어도 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땅이 씨를 뿌리기에 적합하게 준비가 되면 농부는 자기의 허리춤에 조그만 주머니를 차고 씨를 꺼내 땅에 흩뿌립니다. 씨를 뿌린 후 농부는 나무 쟁기로 씨를 뿌린 밭을 가로지르면서 끌고 다닙니다. 이렇게 해서 뿌려진 씨는 땅속에 묻히게 되고 씨를 쪼아 먹는 새들이나 강한 바람으로부터 보호됩니다.
팔레스틴의 밭들은 대개 가늘고 길다란 모양이었고, 그 옆으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길은 나귀나 소나 사람이 밟고 다녀서 단단하였습니다. 한편 팔레스틴의 밭은 기름진 평야가 적으므로 대부분 산지와 기복이 있는 가파른 언덕을 일궈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밭에는 석회석, 대리석, 현무암, 화강암 등과 같은 돌들이 상당히 많이 널려 있었습니다. 때때로 밭 한가운데 커다란 가시덤불이 불쑥 솟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끈기있게 수확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위의 내용을 참조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쪽에 나오는 밭의 비유 역시 당시 팔레스틴 땅에서 행해지는 농사법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죠.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고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나왔지만 해가 뜨자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마가 4:3-8)
이 비유를 설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알려주십니다. 또 뿌려진 4종류의 땅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4:14)“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씨앗을 뿌린 사람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죠 예수님이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면 땅이 알아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고, 이삭이 패이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면 추수 때가 된 줄 알고 예수님이 추수를 하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씨를 틔워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땅은 누구입니까? 밭의 비유를 참고하면 바로 우리들 이겠죠? 우리들 가운데도 4종류의 사람이 있을겁니다.
우리가 길바닥이라면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날쌔게 달려드는 사탄에게 그것을 빼앗겨버리게 됩니다.(15)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씨가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고 그 후에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게 되면 곧 넘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씨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와서 그 말씀을 가로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받아들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16-20)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 3:7-12)
세례요한이 한 말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할 때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울 것이니 하늘나라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본문 뒷부분은 ‘씨’, 즉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이죠.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심어놓으면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겁니다.
2~3월쯤, 이스라엘에 가면 겨자 꽃을 흔히 많이 볼 수 있다고 하죠. 갈릴리 지역을 비롯해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온화한 곳은 온통 겨자 꽃으로 뒤덮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유채꽃밭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겨자는 들에서 자생하거나 밭에서 재배됐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르달, 헬라어로 시나피로 불리는데, 십자화과의 1년초입니다. 주로 약용이나 식용유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죠. 겨자씨는 그 크기가 좁쌀만 하고, 종류는 크게 검정과 흰색 계통으로 구분됩니다. 노란색 꽃을 피우고, 보통 1m가 채 되지 않는 크기로 자라죠. 하지만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들어 기온이 따듯한 곳에서는 검정 겨자씨가 3m까지 자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는 과장법이 숨어 있는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좁쌀만 하기 때문에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지 않는 1년생 풀입니다. 나무로 자라 큰 가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겨자풀은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마르기 시작하는데, 누렇게 말라버린 겨자 줄기는 마치 고춧대와 같이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 새들이 떼를 지어 깃드는 것을 볼 수는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겨자씨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씨가 가지는 생명력입니다. 씨는 좋은 밭을 만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도 그렇습니다. 봄이 되면 이스라엘 전역이 겨자꽃으로 물드는 것처럼 하늘나라 역시 엄청난 생명력으로 퍼져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력은 좋은 밭인 우리를 요구합니다.
또 하나는 좀 과장되기는 했지만 ‘가장 작은 씨’지만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온갖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토양을 만난 씨는 크게 자라 모든 만물에게 평안과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차별과 분쟁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평안과 안식이 주어질 뿐이죠. 우리를 통해 아니 나를 통해, 이런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지난 5월 22일은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님(요한, 1928-1994)의 30주기였습니다. 선생님은 한 살림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리들의 큰 스승이시죠.
선생님은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시절, 미군 대령을 총장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을 하다 제적 당합니다. 그 후 원주에 정착하여 교육운동을 하며 대성학원을 세우죠. 그러다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한 혁신계 ‘빨갱이’로 몰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3년에 가까이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석방 후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 사회운동에 앞장서죠. 이후 농민 운동에 투신하면서 기존의 농민운동에 대해 반성하며, 도시와 농촌 직거래와 자연요법으로 농사를 짓는 한살림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평생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였고. 모두가 ‘한 생명’임을 깨달아 살자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994년 5월 위암으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호를 여러 가지로 쓰셨습니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는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까지도 사랑하자는 뜻에서 ‘청강’(靑江, 푸른 강)이란 호를 지었죠. 사람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자고 ‘무위당’(無爲堂)이라 불렀습니다. ‘조 한 알에 하늘과 땅과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일속자’(一粟子)라는 호를 썼습니다.
그 중 일속자란 호는 선생님이 애착을 갖고 많이 쓰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 호를 한글로 쓸 때는 ‘조 한 알’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좁쌀 한알’이라고 무심코 잘 못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책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있단다>와 같은 경우죠.
좁쌀은 ‘조 열매의 쌀’입니다. 바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껍질을 벗긴 쌀인 것이죠. 선생님 가르침의 핵심은 생명을 사랑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조 한알’을 ‘좁쌀 한알’로 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좁쌀은 이미 생명력을 잃어 땅에 심어도 싹을 틔울 수 없기 때문이죠. 선생님도 살아생전 좁쌀이라는 표현을 쓰면 곧바로 아니라고 정정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책 한 권도 쓰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책은 후대 제자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찾아 엮거나 해설한 것입니다. 그중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생명 사상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서예가로도 매우 뛰어난 분입니다. 글씨도 잘 썼지만 난(蘭) 그림도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선생님의 난 그림은 ‘중생 난’, ‘풀뿌리 난’이라 불렸습니다. 난 그림 중에는 의인난(擬人蘭)도 있습니니다. 사람의 얼굴을 한 난초가 낮은 곳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죠. 이 난초들에는 고난받는 민초(民草)들의 생명력을 담았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를 두고 난초라기보다 ‘잡초’라 했습니다. 아니 잡초를 닮아 가려 했던 거죠. “내가 생활 속에서 보니까 잡초 하나의 경지도 사람이 요새 못 따라가고 있어요. 내가 손님을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원주천 뚝방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바닥에 서 있는 풀 하나가 말이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어. 주야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치이고 짓밟혀도 다음 날 아침에 가면 다시 우뚝 자연스럽게 서 있거든.”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어제는 6·15 남·북 공동 선언문이 선포된 날이었습니다. 24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평양에서 남북 화해 및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협력 선언을 하였습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 정상 간 상봉과 회담이 열렸고 합의된 5가지 내용이 발표되었던 거죠. 그 선언의 주된 내용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앗이 좋은 토양에 심어져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키우려면 우리 스스로가 좋은 밭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남을 나보다 낳게 여기는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일궈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